5월 24일 필 미컬슨이 역대 최고령 PGA 투어 메이저 우승 기록(50세 11개월)을 세웠던 PGA 챔피언십을 앞두고 연습 라운드를 함께한 네 명의 선수. 왼쪽부터 브라이슨 디섐보, 필 미컬슨, 케빈 나, 이경훈. 케빈 나의 주선으로 함께 연습 라운드를 하게 됐다고 한다. 사진 이경훈
5월 24일 필 미컬슨이 역대 최고령 PGA 투어 메이저 우승 기록(50세 11개월)을 세웠던 PGA 챔피언십을 앞두고 연습 라운드를 함께한 네 명의 선수. 왼쪽부터 브라이슨 디섐보, 필 미컬슨, 케빈 나, 이경훈. 케빈 나의 주선으로 함께 연습 라운드를 하게 됐다고 한다. 사진 이경훈

꿈을 이뤄가는 여정은 고단하면서 아름답다. 초라한 현실을 생각하면 하늘의 별처럼 아득하기만 하던 꿈도 한 걸음씩 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을 향해 두 팔 벌려 반겨주는 마법이 일어난다.

고양시 일산에 살던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살을 빼기 위해 뭐라도 해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동네 연습장에서 처음 골프 클럽을 잡았다. 먼저 골프를 시작한 친구들은 70대 타수를 치고 있었다. 이 소년이 세계 최고의 무대인 PGA 투어에서 우승하는 골퍼로 성장할 것이라고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5월 17일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AT&T 바이런 넬슨에서 미국 무대 진출 5년 6개월 만에 첫 우승을 차지한 이경훈(30) 이야기이다. 꿈은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가?


살 빼려고 중1 때 골프 시작

이경훈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난 13세 때 골프를 시작해서 다른 선수들보다는 좀 늦은 편이었다. 아버지 따라서 연습장에 가서 골프를 시작했다. 나를 가르치던 프로님이 ‘너 참 잘 친다. 스윙 좋다’며 칭찬해주시고, 주변 분들에게 보여주시고 했었다. 난 칭찬받는 게 마냥 좋아서 골프 선수를 하겠다고 했던 것 같다. 사실 어머니께서 바이올린 레슨을 하셔서 나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보려고 하셨는데, 금방 포기하셨다. ‘여기 열 번 연습하고 있어’ 하고 나가시면, 멍때리거나 바이올린으로 기타 치듯 튕기며 혼자 놀고 있었으니까. 전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근데, 골프는 재미있었다. 또, 내가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골프를 시작했을 때 나와 같은 연습장에 당시 김비오 등 이미 잘 치는 주니어 선수들이 있었다. 그게 사실 굉장히 도움이 됐다. 잘 치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극도 받고, 어깨너머로 배운 것도 많았다.”

늦게 시작했지만, 이경훈은 곧 두각을 나타내 아마추어 국가대표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내 아마추어 시절의 정점은 바로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딴 거다. 2009년에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됐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우리 남자 팀은 적수가 없다 생각하며 금메달을 낙관했는데, 막상 대회에 가니 다른 나라 선수들이 다들 잘 치더라. 거기 이번에 마스터스를 우승한 마쓰야마 히데키도 있었다. 연습 라운드 때도 성적이 안 좋아서 다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본대회에 가서는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이경훈은 프로 무대에서도 빠르게 성장했다. 일본 투어 2승(2012·2015)을 거뒀고, 2015·2016년 한국 오픈을 2연패 했다. 그러나 안주하지 않고 PGA 투어에서 우승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어릴 적 꿈을 향해 2부 투어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특히 한국 오픈에서 2연패를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해 콘페리 투어(2부 투어)를 뛰면서 게임이 안 풀려서 시드를 잃기 직전이라 힘들었다. 다행히 한국 오픈 오기 직전 대회에서 첫 톱 10을 하고 자신감을 찾았고, 한국에 와서 우승한 것이었다. 골프가 일 년 내내 안 풀리다가도 한순간에 다시 자신감을 찾아 우승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경훈은 2016년부터 PGA 2부 투어를 3년간 뛰고 2018~2019시즌 1부 투어 티켓을 따내고 나서 3년간 80번 도전 만에 첫 우승을 차지했다. “AT&T 바이런 넬슨 우승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번에 우승을 노려보자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퍼팅이 너무 안 되어서 그냥 퍼터 감 잡는 게 목표다 생각하고, 욕심 없이 나갔는데, 우승까지 하게 되었다. 전에는 우승권에 있으면 잠도 잘 못 자고 그랬었는데, 이번에는 우승하기 전날 잠도 잘 잤다. 정말 마음을 비웠던 것 같다. 우승에 대한 마음이 강하면, 샷에 집중을 못 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아무 생각을 안 했다. 사실 그 중간을 지키는 게 매우 어렵다. 욕심이 과하면 경기를 망치고, 그냥 너무 내려놓자 하면 나태해질 수도 있으니까.”


이경훈(오른쪽 두 번째)과 아내 유주연씨가 부모님과 함께 대회장에서 찍은 사진. 이경훈이 골프를 시작하고 PGA 2부 투어에서 뛸 때까지 아버지가 현장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했다.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렸다. 사진 이경훈
이경훈(오른쪽 두 번째)과 아내 유주연씨가 부모님과 함께 대회장에서 찍은 사진. 이경훈이 골프를 시작하고 PGA 2부 투어에서 뛸 때까지 아버지가 현장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했다.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렸다. 사진 이경훈

2부 투어 돕던 아버지 치아도 빠져

우승 직후 이경훈의 부모님은 깜짝 선물로 우승 축하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마음이 뭉클했다. 성적이 안 날 때 부모님이 농담으로라도 때려치우라는 말을 하신다고 하는데, 우리 부모님은 단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야구 선수를 꿈꾸셨다가 못 하셔서, 자식이 생기면 원하는 걸 하게 해줘야지 생각하셨던 것 같다. 선수 생활 시작하고 아버지가 나와 함께 다니셨다. 매년 겨울 전지훈련과 시합장, 미국 2부 투어까지 십 년 넘게 아버지가 나와 동행하시고, 어머니는 늘 혼자 식당을 운영하셨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입맛에도 안 맞는 빵으로 끼니를 때우시고. 비행기도 많이 타고 몸이 힘들다 보니 치아도 손상됐다. 기뻐하는 부모님 모습을 보며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외아들인데 자주 뵙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가 살가운 편도 아니어서 죄송스러운 마음이 더 들었다.”

이경훈은 메이저 대회인 PGA 챔피언십 때 필 미컬슨, 브라이슨 디섐보와 함께 연습 라운드를 하는 ‘영광’을 갖게 된다. “PGA 챔피언십 직전에 우승해서 그 대회에 참가할 기회가 주어진 거였다. 나를 잘 챙겨주는 케빈 나 형에게 같이 연습 라운드를 하자고 연락을 했는데, 대형 스타인 미컬슨, 디섐보와 함께하도록 주선을 해줬다. 처음 미컬슨과 만나 연습 라운드를 했는데, 그 대회에서 메이저 대회 최고령 우승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워서 나에겐 평생 추억이 됐다. 미컬슨이 내게 퍼트 잘한다며 왜 우승했는지 알겠다고 칭찬도 해줬다. 미컬슨은 농담도 잘하고, 골프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50대라는 사실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쳤으면 지겹거나 지루해할 만도 한데, 골프를 정말 좋아하고 즐긴다는 게 느껴졌다. 잘 치는 선수와 치다 보면 나도 더 잘 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이런 세계적인 선수와 같이 경기하면서 그들의 마인드나 게임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큰 무대를 뛰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경훈의 다음 목표는 페덱스컵 랭킹 30위까지만 나갈 수 있는 투어 챔피언십에 출전하는 것이다. “메이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보고 싶다. 가능한 한 오래오래 이 큰 무대에 머물며 언젠가는 세계 1위에 내 이름을 올려놓고 싶다. 그렇게 좋은 것이든 힘든 것이든 경험을 많이 쌓아서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 이경훈은 행복하다고 했다. 7월이면 주변에서 ‘내조왕’이라 부르는 아내 유주연씨와 사이에 첫 아이(태명 축복이)가 태어난다.

민학수 조선일보 스포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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