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 숙회와 샤르도네. 사진 김상미
문어 숙회와 샤르도네. 사진 김상미
능이버섯 닭백숙과 샤르도네. 사진 김상미
능이버섯 닭백숙과 샤르도네. 사진 김상미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됐다. 레드 와인을 아무리 좋아해도 여름이면 시원한 화이트 와인이 더 끌리기 마련이다. 이럴 땐 샤르도네(Chardonnay)와 친해 보는 것이 어떨까? 샤르도네를 ‘도화지 같은 와인’ 또는 ‘와인계의 팔방미인’이라고들 한다. 포도가 자라는 곳의 기후와 토양은 물론 와인 메이커의 실력과 철학까지 고스란히 반영해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상큼한 샤르도네는 해산물과 잘 어울리고 묵직한 샤르도네는 육류와 잘 맞는 등 여러 음식과 즐기기도 좋다. 여름 보양식에 시원한 샤르도네 와인 한잔 곁들이며 더위에 지친 입맛을 되살려 보자.

샤르도네는 프랑스 내륙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서 탄생했다. 중세 시대부터 1000년이 넘도록 이어온 만큼 관련 설화도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샤를마뉴에 대한 것이다. 미식가였던 대제는 와인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775년 샤를마뉴 대제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부르고뉴의 포도밭 한 곳을 수도원에 하사했다. 그 밭은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봄이 오면 눈이 가장 빨리 녹는 최상급 밭이었다.

어느 날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하사받은 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을 샤를마뉴 대제에게 바쳤다. 그런데 대제에게 바쳤던 와인이 하필 레드 와인이었다. 대제의 길고 흰 수염이 보기 싫게 얼룩지자 이를 보다 못한 황후가 적포도를 모두 베어내고 백포도로 바꿀 것을 명령했다. 이때부터 대제가 하사한 밭에는 백포도만 길렀는데, 그 밭이 바로 코르통 샤를마뉴(Corton-Charlemagne)다. 부르고뉴에서 가장 좋은 밭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곳은 지금도 최고급 샤르도네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샤르도네는 오랜 기간 세계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우아한 화이트 와인이라 칭송받아 왔다. 하지만 샤르도네에 영광의 세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르고뉴를 벗어나 전 세계로 산지가 확대하면서 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발단은 1980년대 미국과 호주 등 신대륙에서 대량 생산된 샤르도네였다. 지나친 오크(참나무속)향과 과숙한 포도에서 나온 들척지근한 단맛은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렴한 가격 때문에 소비가 급속히 늘어 ‘와인은 몰라도 샤르도네는 안다’라는 말까지 생겼지만, 결국 저급한 와인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팽배해졌고 애호가 사이에서는 ‘ABC(Anything But Chardonnay·샤르도네만 아니라면 다 좋다)’라는 말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소비자의 입맛을 자극하며 이윤만을 추구한 인간의 잘못된 욕심이 초래한 결과였다.

최근 샤르도네는 과거의 영광을 거의 되찾았다. 지난 10여 년간 신대륙을 중심으로 품질 고급화가 빠르게 진행된 것이다. 와이너리들은 오크 사용을 제한하며 샤르도네의 순수한 과일향을 되찾는 데 힘썼다. 이제는 저렴한 샤르도네에서도 이전의 들큼함은 찾아보기 힘들고, 지역별로 저마다의 개성을 한껏 뽐내고 있다.


장어 바비큐와 샤르도네. 사진 김상미
장어 바비큐와 샤르도네. 사진 김상미

여름 보양식과 샤르도네 페어링

모든 포도가 품종별로 재배지의 기후를 타지만, 샤르도네 포도만은 기후와 상관없이 서늘하든 덥든 어느 곳에서나 잘 자란다. 날씨가 서늘하면 맛이 상큼하고, 온화하면 부드럽고 우아하다. 더운 곳에서 생산된 샤르도네는 묵직하고 달콤한 과일향이 풍부하다. 스타일이 워낙 다양해 각기 다른 기후에서 생산된 샤르도네를 나란히 놓고 맛을 보면 전혀 다른 와인이라 여겨질 정도다.

서늘한 기후에서 생산되는 샤르도네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샤블리(Chablis)다. 샤블리는 와인 이름이자 프랑스 북부에 있는 지역명이다.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2억 년 전, 아주 긴 시간 동안 바다 밑에 잠겨 있었던 땅이어서 토양에 해양 퇴적물이 가득하다. 그래서 샤블리를 맛보면 신선한 과일향과 함께 조개껍데기 같은 미네랄향이 느껴진다. 샤블리와 생굴의 조합을 환상의 궁합이라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여름에는 생굴을 먹지 않으니 대신 전복이나 문어 등 다양한 해산물과 샤블리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전복은 회나 찜으로 요리하고 버터구이로도 자주 먹는다. 문어는 숙회로 먹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모두 양념을 진하게 하지 않고 식재료의 질감과 향을 살리는 방식이다. 따라서 와인도 샤블리처럼 과일향이 섬세하고 상큼해야 음식의 은은한 맛을 압도하지 않는다. 전복이나 문어에 샤블리를 곁들이면 음식과 와인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바다향이 서로 어울려 멋진 궁합을 이루고, 와인의 경쾌한 신맛이 마치 음식에 레몬을 뿌린 듯 깔끔함을 선사한다.

여름 보양식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닭과 오리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오리백숙이나 닭볶음탕을 땀 흘리며 먹고 나면 기운이 샘솟는 것 같다. 이런 음식에는 온화한 기후에서 생산된 샤르도네가 제격이다. 대표적인 것이 부르고뉴 샤르도네인데 레몬·자몽·복숭아 등 잘 익은 과일향이 풍부하고 질감이 부드러워 가금류와 특히 잘 어울린다.

부르고뉴는 지역이 좁고 길어 생산지의 위치와 와인 등급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다. 레이블에 부르고뉴가 써진 샤르도네는 엔트리급인 ‘지역 등급’이다. 맛이 경쾌하고 무게감도 가벼워 백숙처럼 향이 진하지 않은 음식과 잘 어울린다. 마콩(Macon)처럼 부르고뉴 남쪽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나 ‘마을 등급’ 와인은 조금 더 비싸지만 과일향이 풍부하고 묵직하다. 이런 와인은 찜이나 볶음탕처럼 양념이 진한 요리와 궁합이 잘 맞는다.

칠레·호주·미국 등 신대륙은 날씨가 덥고 건조해 이곳에서 생산된 샤르도네는 알코올 도수가 높고 보디감도 묵직하다. 따라서 음식도 기름기가 많은 장어나 육류가 잘 어울린다. 달콤한 열대과일향이 풍부해 양념이 진한 요리에 곁들여도 좋다. 칠레산은 스타일이 신선하고 경쾌하며, 호주산은 과일향이 진하고 질감이 부드러운 편이므로 취향에 따라 생산 국가를 선택하는 재미도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와이너리인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에서는 버번(옥수수와 호밀로 만든 미국 위스키) 배럴(와인을 숙성하기 위한 통)에 숙성시킨 독특한 샤르도네를 내놓아 와인 애호가와 위스키 애호가 모두에게 호평받고 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보디감이 매력적이어서 묵직한 레드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특히 좋은 평가를 받는다. 휴가를 떠나 바비큐를 즐길 때 불맛이 밴 장어나 돼지고기에 차갑게 식힌 버번 배럴 샤르도네 한잔 곁들여 보면 어떨까. 그동안 쌓인 피로가 단숨에 날아갈 것이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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