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불갑사 주변은 꽃무릇(석산)의 군락지로도 널리 알려졌다. 사진 이우석
천년고찰 불갑사 주변은 꽃무릇(석산)의 군락지로도 널리 알려졌다. 사진 이우석

이제 곧 한가위. 수확은 아직 일러 뵈는데 이를 즐기는 추석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애써 풍성한 밥상을 떠올려 본다.

오곡백과를 올린 차례상. 많은 햇것이 있지만 상을 빛내는 주인공은 단연 굴비다. 맑은 바닷물에 살던 조기로 잡혀 햇볕과 바람을 맞고 굴비가 되니, 그 맛을 만인이 좋아한다.

저(箸)를 들어 단단한 살을 찢어내고 손으로 훑어 굴비 속살을 발라낸다. 갓 지어 뜨거운 백미 밥을 한 숟가락 떠, 짭조름 구수한 굴비 한 점을 올린 다음 한입에 넣고 앙다문다. 어찌 가을의 풍요를 칭송하지 않을까.

이것만으로도 굴비의 고장, 영광 여행의 이유가 된다. 한가위를 앞둔 영광(靈光) 여정이 여행자의 영광(榮光)이 되는 순간이다.

어염시초(魚鹽柴草)의 고장, 영광을 이르는 말이다. 누구나 영광을 해산물(魚), 소금(鹽), 땔나무(柴), 나물(草) 등이 풍부한 곳으로 여긴다. 여기다 하나 더 붙이자면 삼백(三白)이다. 너른 들판에 나는 하얀 쌀과 여름 내내 거둬들인 소금, 겨울이면 한 바구니씩 쏟아지는 눈이 삼백이다.

삼홍(三紅)은 가을 영광에서 필자가 본 것이다. 칠산 앞바다로 떨어지는 붉은 저녁노을, 붉디붉어 고운 청보리쇠고기, 가을 불갑사 오르는 길섶에 쑥쑥 솟아오른 꽃무릇(석산)이 영광의 세 가지 붉은색, 삼홍이다.

삼홍을 즐겨야 영광 여행이 즐겁다. 불갑사 꽃무릇, 그 매혹적인 선홍빛을 눈에 담고 서해안 최고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는 백수해안도로를 달리며 붉은 노을을 만난 뒤 허리띠를 풀어 제치고 푸짐하고 맛난 남도 밥상을 받아들이면 오감이 충족된다.

그 유명한 법성포 굴비와 영양 덩어리 민물장어, 모싯잎송편, 청보리쇠고기까지 먹거리가 지천인 곳이 영광이라, 그냥 눈으로만 둘러보기란 퍽 어렵다.

먼저 꽃무릇. 이파리 하나 없이 한없이 가녀린 줄기 끝에, 탐스러운 붉은 꽃잎 여남은 잎을 틔우는 꽃무릇은 실로 희한한 모양이다. 여름철 잎이 있을 때는 꽃망울조차 볼 수 없고, 이파리가 다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봉오리를 틔우는 꽃무릇. 그래서 꽃무릇은 잎과 꽃이 서로를 그리워한다며 상사화(想思花)란 별칭으로도 불린다.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인 영광에 처음 세워진 도량, 불갑사. ‘불교의 으뜸’이란 이름값처럼 고즈넉한 천년고찰에 엉뚱하게도 한없이 화려하기만 한 꽃무릇의 붉은 향연이 펼쳐졌다.

고창 선운사, 함평 용천사 등 꽃무릇은 주로 유서 깊은 절집 주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찰에 꽃무릇이 많은 이유는 뿌리에 함유된 강력한 독극물 때문이다. 인도에서 코끼리 사냥용 독화살에 발랐다는 이 맹독을 절에선 탱화나 불경이 썩지 않도록 방부제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불갑사 일주문을 지나면 길옆 여기저기에 빨간 연지 자국이 찍혀 있다. 계곡에도 연못에도 어김없이 빨간 전모(氈帽)를 쓴 기녀를 닮은 꽃이 가을바람에 맞춰 한들한들 승무를 춘다. 추석을 앞두고 가장 붉다. 외로운 줄기 하나에 의지한 채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는 꽃무릇의 모습은 화려함보다는 애절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스산한 가을에 더 어울린다.


영광을 대표하는 별미인 법성포 보리굴비 요리. 사진 이우석
영광을 대표하는 별미인 법성포 보리굴비 요리. 사진 이우석

‘밥강도’보리굴비와 젓갈, 간장게장

법성포(法聖浦)는 불교적 의미가 담긴 지명이다. 영광(靈光)이란 이름도, 불갑산(佛甲山)도 그렇다. 인도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최초로 백제에 불법을 전한 곳이 법성포다. 태국에서 종이배를 띄우면 법성포에 와서 닿는다는 말도 있다. 법성포는 삼국시대 해상 루트의 요지였다.

법성포는 기름진 칠산 앞바다에서 잡은 풍부한 해산물과 세곡 집하항으로 오랜 세월 번성한 곳이다. 흥선대원군이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집은 영광에 제일 많다)’이라 일렀다. 지금이야 사람도 집도 줄었다. 하지만 칠산 앞바다의 풍부한 물고기와 해산물은 떠나지 않았다. 어염시초의 고장답게 남도 밥상 중에서도 다양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영광 땅에선 어디서건 상다리 부러질 정도의 풍성한 상차림을 접할 수 있다.

요즘 흔한 반조기, 반굴비 형태가 아니라 옛날식으로 바싹 말린 짭조름한 보리굴비가 맛이 좋다. 밥을 녹찻물에 말아 보리굴비를 올리면 그냥 일개 밥도둑이 아니라 천하의 대도처럼 공기째 탈탈 털리고 만다.

천일염 젓갈 역시 굴비와 한 패거리다. 여기다 ‘밥강도’쯤 되는 간장게장까지 합세하면 영광 밥상은 가히 ‘양산박’으로 불러도 될 지경이다. 추석을 앞두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방앗간 모싯잎송편에는 짙은 가을 향기가 서렸다. 가을 영광 식도락 여행의 ‘보너스’라 칭할 수 있다. 눈과 입과 코 그리고 폐부까지 ‘영광의 길’이 펼쳐졌다. 아니 갈 수 없는 일이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5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plus point

여행 정보

둘러볼 만한 곳
영광 백수해안도로는 수평선이 펼쳐지는 칠산 앞바다를 끼고 돈다. 저녁에는 붉은 노을이 바다로 떨어진다. 중간 지점 노을전시관에서 전망과 함께 다양한 노을 관련 전시물을 감상할 수 있다.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 영광군에는 불교 이외에도 유난히 종교와 관련된 곳이 많다. 원불교가 태동한 영산성지가 있으며, 박중빈 대종사의 탄생지와 깨달음을 이룬 노루목 대각지, 최초 교당 구간도실터 등이 한데 모여 있다. 개신교 역시 염산 설도면에 한국전쟁 당시 순교자를 기념하는 기념관을 두고 있다.

먹거리
영광 하면 어쨌든 굴비다. 법성포항에 즐비한 1만5000~2만원대 굴비백반집을 이용해도 만족하겠지만, 밥상에 그득한 여러 가지 반찬을 즐기려면 한정식집이 낫다. 층층이 쌓아 올린 반찬과 함께 술 한잔 즐기다 밥 먹을 때면, 미식축구 공수 교대하듯이 새로운 반찬으로 바뀐다. 전국 생산량의 30% 가까이 차지하는 영광 장어는 불갑사 입구 장어정이 잘한다. 베 짜는 모시를 반죽에 찧어 넣고 주먹만 한 크기로 빚어 찐 일명 ‘머슴떡’, 모싯잎송편은 영광의 60여 곳 떡집에서 구입할 수 있다. 만나떡집은 직접 모시밭을 일궈 재료로 쓴다. 청보리 사료를 먹여 기른 청보리쇠고기는 영광 읍내 축협에서 구입할 수 있다.

화순은 흑염소 맛집이 많다. 귀농 농가에서 차린 하늘농원은 직접 키운 흑염소를 잡아 부추를 잔뜩 올린 수육찜으로 내는 집이다. 흑염소를 꺼리는 이들을 위해 따로 준비한 우럭매운탕이 맛있다.

이우석 스포츠서울 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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