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슐츠(오른쪽)는 2018년 6월 26일 스타벅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이 됐다. 그가 경영을 맡은 뒤 스타벅스는 증시에 상장했고, 퇴임 때까지 주가는 2만1000% 상승했다. 사진 스타벅스
하워드 슐츠(오른쪽)는 2018년 6월 26일 스타벅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이 됐다. 그가 경영을 맡은 뒤 스타벅스는 증시에 상장했고, 퇴임 때까지 주가는 2만1000% 상승했다. 사진 스타벅스
김외현 플랫폼9¾ 이사, 전 한겨레 기자·베이징특파원,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김외현
플랫폼9¾ 이사, 전 한겨레 기자·베이징특파원,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하워드 슐츠가 스타벅스를 창업한 것은 아니지만, 슐츠의 손을 거치면서 스타벅스는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뉴욕의 빈곤층 출신인 슐츠는 연방정부가 처음 실시하는 학자금 대출 프로그램 덕에 대학을 다녔다. 졸업 후 제록스 복사기를 파는 세일즈맨에서 커피머신 세일즈맨으로 변신한 그는 고객사였던 스타벅스에서 놀라운 커피를 경험하고서 스타벅스로 옮겼다. 밀라노 출장에서 지역 커뮤니티 기능을 하는 에스프레소 바 문화를 경험한 뒤, 슐츠는 미국에서 커피숍 체인 ‘일지오날레’를 직접 창업했다. 그리고 이는 훗날 세계적인 ‘커피 제국’의 주춧돌이 된다.


전 직장 스타벅스를 인수하다

일지오날레를 개업해 시애틀에 매장 3곳을 낸 지 1년이 됐을 무렵, 스타벅스 창업자인 제럴드 볼드윈이 찾아왔다. “스타벅스를 팔기로 했고, 당신이 사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해왔다.

인수 자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다른 일지오날레 주주가 스타벅스 인수를 가로채려 하는 시도가 있었다.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변호사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의 아버지 빌 게이츠 시니어였다. 빌 게이츠 시니어는 슐츠와 함께 해당 주주를 찾아가 “당신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젊은이의 꿈을 훔치려고 부도덕하게 행동하다니 비열하다”며 나무라고 손을 떼라고 경고했다. 이어 빌 게이츠 시니어는 슐츠에게 투자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투자자들도 소개해줬다.

1987년 슐츠는 마침내 380만달러(약 43억원)에 스타벅스를 인수했다. 스타벅스 창업자 3명은 당시 인수한 피츠라는 커피 매장으로 사업의 중심을 틀었다. 이후 시애틀의 일지오날레 매장도 모두 스타벅스가 됐고, 슐츠의 시대가 정식 개막했다.


직원을 파트너로 부르는 기업

슐츠는 스타벅스를 통해 ‘아버지 세대에 통용됐던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의 지배하고 통제받는 관계에서 벗어난 사업 모델’을 만들어간다. 첫째, 1988년 스타벅스는 미국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의료보험을 파트타임 직원에게까지 확대시켰다. 1980년대 후반 기업들은 의료보험 범위를 줄이는 추세였지만, 스타벅스는 이에 역행한 것이다. 투자자들은 반대했지만, 슐츠는 의료보험 제공으로 직원들의 이직률을 낮추면 새로운 신입사원 교육비 등 비용을 줄이고 충성도를 높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 1991년 스타벅스는 풀타임 직원뿐 아니라 파트타임 직원에게까지 스톡옵션을 제공했다. 이 또한 민간기업으로는 최초였다. 슐츠는 “성공의 열매를 직원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스타벅스가 추구하는 사업의 핵심”이라고 설득했다. 1992년 증시에 상장한 스타벅스의 주가가 오르면서, 직원들은 목돈을 만질 기회를 얻었다. 슐츠는 이를 소중히 여기며, “내 부모는 무엇 하나 소유하지 못했다. 회사의 일부는커녕 집조차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스타벅스는 직원들을 ‘파트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스타벅스는 직원들의 온라인 대학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학비를 지원한다. 미국 정부 최초의 학자금 대출 프로그램 덕에 집안 최초로 대학 졸업장을 딸 수 있었던 하워드 슐츠가 주도한 사업이다. 사진은 이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애리조나주립대에서 슐츠가 2019년 1월 강연을 하는 모습. 사진 플리커
스타벅스는 직원들의 온라인 대학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학비를 지원한다. 미국 정부 최초의 학자금 대출 프로그램 덕에 집안 최초로 대학 졸업장을 딸 수 있었던 하워드 슐츠가 주도한 사업이다. 사진은 이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애리조나주립대에서 슐츠가 2019년 1월 강연을 하는 모습. 사진 플리커

스타벅스의 성장

미국 전역으로 매장 수를 늘려간 스타벅스는 미국에 새로운 커피 문화를 정착시켰다. 드립커피 위주였던 미국의 커피 문화가 카페라테, 카푸치노 등으로 다양해졌다. 집과 직장에 이은 ‘제3의 공간’을 지향했던 스타벅스에서 사회 남녀노소 모든 계층이 새로운 일상을 누리게 됐다.

슐츠는 스타벅스 본사가 모든 매장을 직영하면서 이 모든 현상이 어느 곳에서나 균질하게 유지되도록 했다. 1987년 6곳이었던 스타벅스 매장 수는, 증시에 상장한 1992년 165곳까지 늘었다. 이후 스타벅스는 2000년까지 8년 동안 연평균 성장률 49%를 기록했고, 1995년 일본을 필두로 1999년 한국과 중국 등 해외 진출에 성공해 2000년에는 전체 매장 수가 15개국 2800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슐츠는 최고경영자(CEO)직에서 물러나 ‘글로벌 전략가’로 국외 사업에 매진했고, 특히 ‘차(茶)의 본고장’ 중국 사업에 주력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중국 내 스타벅스 매장은 하루에 1~2곳씩 늘어났다.

시애틀 기반 농구팀 슈퍼소닉스의 구단주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5년 뒤 오클라호마에 매각하는 결정을 내렸다. 지역 스포츠팀을 팔아치웠다는 비판을 받았고, 시애틀에서 그의 명성은 추락했다. 슐츠는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모든 책임을 시인하고 사과했다.


위기 속 CEO로 컴백

슐츠가 CEO에서 물러나 해외 사업에 열중하는 동안, 미국에서 스타벅스는 서서히 쇠퇴하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스타벅스 매장 수가 늘면서 매출은 늘었지만, 지속 가능한 수치가 아니었다. 2006~2008년 주가는 75% 하락했고, 미국 본토에선 2007년 말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불친절한 서비스에 대한 고객 불만도 늘었다. 이 무렵 미국의 스타벅스 매장에 대한 슐츠의 평가는, “더는 풍부한 커피 향을 느낄 수 없었고, 새로 선보인 아침 식사용 샌드위치 탓에 치즈 냄새가 날 때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2008년 1월 슐츠는 CEO로 복귀했다. 고위 임원진을 대거 갈아치웠고, 매장 수백 곳을 폐점했다. 2008년 2월 26일 미국 전역의 스타벅스 매장을 닫고, 바리스타들을 상대로 에스프레소 제조에 대한 재교육을 했다. 당시 교육에서 슐츠는 카페라테의 품질이 완벽하지 않다면 쏟아버리고 다시 만들라고 가르치고, ‘옳은 행동’을 위한 권한과 책임감을 강조했다. 같은 해 벌어진 금융위기에도 스타벅스는 다시 성장 궤도로 올라섰다. 2년 뒤 매출이 사상 처음으로 100억달러(약 11조3000억원)를 돌파했다.


사회 속으로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이었던 슐츠는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퇴역 군인들의 사회 적응을 위한 재단을 설립했고, 군인 가족들에 대한 지원을 제공했다. 슐츠는 ‘스몰비즈니스(골목상권)’의 지원을 위해 스타벅스를 통해 ‘인디비저블(Indivisible⋅분리할 수 없는)’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위한 일자리 만들기’ 기부 캠페인을 진행했고, 모금한 기금으로 소규모 사업체들에 저이자 융자를 제공했다.

슐츠는 기후 변화, 무역, 세제 개편, 동성 결혼, 총기 규제 등 정치적 사안에 다양한 견해를 밝히며 참여했고, 이는 2012년 이후 대선 때마다 그가 출마할 거란 관측으로 이어졌다. 슐츠는 2018년 스타벅스 CEO를 다시 사임하고서 2019년 초 중도 성향의 제3의 후보로 출마를 검토 중이란 뜻을 밝혔다. 그러나 몇 달 뒤 출마 의사를 철회했고, 2020년 대선에선 ‘우리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라는 이유를 제시하며 조 바이든 대통령을 지지했다.

김외현 플랫폼9¾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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