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종전 60주년을 맞아 전문가들에게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경제인은?’이란 질문을 던졌다. 마쓰시타 쇼이치로(松下幸之助),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혼다 쇼이치로(本田宗一郞) 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글로벌 기업 창업자들이 상위 그룹을 차지했다. 1위는 역시 마쓰시타.

 그런데 2위가 의외다. 이름은 도코 토시오(土光敏夫). 각각 3·4위를 차지한 소니의 모리타, 혼다의 혼다처럼 쟁쟁한 글로벌 기업 창업자가 아니다. 공업학교를 졸업한 엔지니어 출신으로,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휘청거리던 이시카와지마하리마(石川島播磨)중공업, 도시바(東芝)를 부활시킨 이른바 재건(再建) 경영인이다. 1970년대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게이단렌(經團聯) 회장, 임시행정조사회장을 맡아 행정개혁에 일획을 그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불충분하다. 공적으로 따지면 어디 모리타, 혼다만 할까.

 1982년 7월23일. 그가 작고하기 6년 전 일본 공영방송인 NHK가 방송한 한편의 프로그램이 일본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는 일본의 고도성장이 성숙 단계에 진입해 일본 열도가 흥청거리면서 거품경제로 향할 무렵이다. 제목은 ‘85세의 집념·행정개혁의 얼굴·도코 토시오.’ 도코 회장의 실생활을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저녁 반찬은 메자시(정어리 등 생선을 꼬챙이에 꿰어 말린 일본 식품) 한 마리, 우메보시(저린 매실), 양배추 푸른색 바깥잎, 무잎이 전부다. 칫솔과 컵은 무려 50년 동안 사용한 것, 즉 서른다섯 살에 산 것이다. 일요일, 뒷마당 밭을 일굴 때 쓰고 나가는 모자는 남이 버린 것을 주운 것이고 낡은 고무줄 대신 헌 넥타이로 묶은 바지를 입는다. 이런 생활 때문에 별명이 ‘메자시 도코씨’다.

 이런 생활을 한 것은 천성적으로 검소한 데다 정말로 돈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게이단렌 명예회장으로 받은 연봉은 5100만엔. 이중 3500만엔을 일찍이 모친(母親)이 만든 사립학교에 기부했다. 이후 소득세, 지방세를 빼고 나면 도코 회장의 손에 남는 돈은 100만엔 정도. 월 8만엔으로 생활을 꾸려야 했다.

 도코씨가 이시카와지마하리마중공업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할 때인 1954년 4월2일. 당시 불거진 이시카와지마조선소 의혹사건으로 도쿄지검 특수부가 관련회사 사장이던 도코씨 집을 덮쳤다. 벨을 누르고 “도코씨, 계십니까?” 하고 물으니, 부인이 “지금 외출 중인데요. 아마 지금쯤 버스 정류장에 있을지 몰라요”라고 대답했다. “도망간 건가?” 싶어 긴장을 한 검사가 달려가니 촌로(村老) 같은 도코씨가 정류장에서 우두커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건을 담당한 검찰총장은 훗날 에세이에서 이날 이야기를 이렇게 썼다. “가택 수사를 하고 돌아온 수사관이 투덜거렸다. 대기업 사장인데 국철 손잡이를 잡고 출퇴근하고, 아내는 남이 보낸 편지봉투를 뒤집어 다시 사용한다고.” 21일 동안 구류생활을 하던 도코씨는 철창 안에서 법화경을 독경, 주위의 잡범들로부터 ‘선생님’ 호칭을 얻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도코씨를 사랑하는 것은 이런 검소한 생활과 정신 때문이다. 그의 정신은 ‘적극 사고.’ 학생시절 입시에 4번이나 낙방한 도코씨는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하나의 여로, 인생 경험”이란 자세를 견지해 자신도 회사도 살렸다.

 “능력은 필요조건이긴 해도 충분조건은 아니다. 충분조건은 집념이다. 일에서 실패와 고난은 따라붙게 마련이다. 원래 독창적 산물은 집념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불가능이란 ‘능력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집념의 결여’ 때문에 생긴다.”

선우정 조선일보 도쿄 특파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