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들은 은행을 믿지 않는다.’  그만큼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을 위험한 행위로 여긴다. 아무리 여윳돈이 있어도 은행보다는 장롱 등 집안 구석구석 비밀스런 장소에 보관하는 게 일반적이다.

 2005년 5월 러시아에서 영업 중인 은행은 1285개. 그러나 상위 20대 은행 자산이 전체의 61.6%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상위 5개 은행이 45.1%로 절대적이다. 나머지 은행은 소규모로 운영되고 있다.

 러시아 최대 은행 스베르방크(Sberbank)는 지난해 기준 전체 은행 자산의 29%, 개인 예금의 59%, 개인여신의 50%, 기업여신의 32%를 차지하는 등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전국적인 지점망을 보유한 유일한 은행이다. 전국에 산재하고 있는 은행 지점 3263개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1011개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다. 스베르방크는 석유기업과 더불어 대졸 취업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이곳에서 받는 월급은 일반 직장의 3배 이상인 데다 각종 혜택이 많아 입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일단 입사하면 주택수당 등 엄청난 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 신세대들에게 인기다.

 러시아의 지난해 은행 총자산/GDP 비율은 42.6%에 불과했다. 동구권의 헝가리 67%, 폴란드 52%, 체코 93%와 비교해도 형편없는 수준이다. 금융부문을 통한 자금 중개기능은 아주 취약하다. 1990년대 루블화 가치하락과 1998년 경제위기 때 다수의 민간은행 파산 영향으로 은행에 대한 국민 신뢰도가 낮아진 것이 큰 원인이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은행에 예금한 돈을 찾지 못하고 날린 경험이 있다.

 아직도 대부분의 러시아 국민들은 은행을 공과금 납부나 장거리 송금수단 정도로만 이용하고 여유자금은 달러 등 외환으로 바꿔 직접 보관하는 경우(Mattress Money)가 많다. 러시아 투자은행 르네상스 캐피털은 2003년 매트리스 머니 규모를 170억~550억달러 규모로 추정했다. 그러나 실제 소비시장의 검은 돈과 합하면 자그만치 1500억달러, 전체 GDP의 17%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고유가에 따른 수출 증대로 오일달러가 유입되면서 유동성이 증가함에 따라 은행의 역할과 업무영역도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러시아 은행들은 개인 대출, 소비자 금융, 모기지 론, 신용카드 등으로 업무영역을 확장하면서 고객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민간은행 석유·가스 재벌그룹이 소유

 러시아 은행은 크게 국책은행, 민간은행으로 나뉘어 영업을 하고 있지만 국민들로부터 신뢰성을 상실한 채 점차 외국계 은행에 잠식당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 상위 5대 은행 중 알파방크(Alfabank)를 제외한 4개 은행이 국책은행이다.

 상위 5대 은행은 스베르방크(Sberbank갨avings Bank, 러 중앙은행 지분 60%), 브네쉬토르그방크(Vnesh

torgbank.대외무역은행, 정부 지분 100%), 가즈프롬방크(Gazprombank.국영 가스기업 Gazprom 지분 50% 이상), 모스크바방크(Bank of Moscow,모스크바 시 소유), 알파방크(Alfabank갂lfa Group 계열 은행)다. 민간은행 중 규모가 큰 은행은 대부분 석유.가스 재벌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소규모 민간은행의 경우 예금.대출업무보다는 조세 회피, 불법자금 거래 알선 등 업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취약한 구조 때문에 고객들로부터는 높은 금리 제공을 빌미로 돈을 끌어모으기도 한다.

 러시아 은행은 지난 1998년 경제위기 당시 대다수 민간은행이 도산하면서 신뢰도를 상실했지만 최근 수년 동안 오일달러 유입으로 유동성이 증대하면서 다소 회복되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가 스베르방크 중심의 독과점 구조를 완화하고 은행에 대한 국민 신뢰도를 개선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2003년 12월 예금보험법을 제정하면서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예금보험법은 예금보험제도에 가입한 은행예금에 대해 1인당 10만루블(약 3000달러)까지 예금지급을 보장하는 것을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 예금보험제도 시행 이전에는 스베르방크 예금에 대해서만 100% 예금 지급이 보장되었다. 예금보험법 제정 이후 러시아 중앙은행은 은행에 대한 심사를 거쳐 예금보험제도에 대한 가입허가 여부를 결정했다. 7월 현재 835개 은행이 가입했다.

 또 은행에 대한 인가, 감독 및 인가취소 권한은 모두 러시아 중앙은행이 할 수 있도록 했고, 개인예금 취급은행의 사실상 대부분이 예금보험제도에 가입하게 됨에 따라 은행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점차 개선될 것으로 전망됐다. 은행의 최소자본금을 500만유로 이상으로 인상하고, 자본적정성 비율(BIS 비율과 유사)을 10% 이상으로 규제하는 한편, 동일인 여신한도를 자본금의 25% 이내로 제한하는 등 은행 건전성 강화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심사기준에 이르지 못한 몇 개 은행이 지난해 6~7월 사이 줄줄이 파산하면서 러시아 국민들은 재차 은행위기 악몽을 경험했다. 중앙은행이 불법자금 거래 민간은행에 대해 인가를 취소한 것이 발단이 돼 민간은행을 중심으로 예금인출 사태가 발생하면서 일대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은행 신인도는 재차 바닥으로 추락했다.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 및 예금보험제도 조기도입 발표 등으로 사태는 진정됐지만 민간은행에 대한 예금이 스베르방크로 이동하거나 다시 장롱이나 매트리스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외국은행 현지법인 설립만 허용

 러시아는 자국 은행의 후진적 운용형태에도 외국은행의 지점 설치는 불허하고 있다. 다만 현지법인(자회사) 설립은 허용하고 있다. 현지법인 설립 시 지분참여 비율에 대한 제한은 없지만 은행 전체 자본금 중 외국계 자본금의 비중을 12% 이내로 제한하고 있는 등 규제가 많다.

 현재 외국은행은 5월말 현재 총 130개 은행에 지분참여 중이다. 그중 100% 외국지분투자 은행은 37개, 외국지분이 50% 이상 100% 미만인 은행은 8개 수준이다. 3월말 현재 은행 전체 자본금은 3935억루블(약 137억5000달러)인 바 이중 외국계 자본은 252억루블(약 8억8000만 달러)로서 6.39% 수준이다.

 열악한 환경에도 지난 2001년 이후 5% 수준에서 2004년부터 6%대로 상승하는 등 최근 외국은행의 러시아 진출은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 말 현재 100% 외국계 은행의 자산 합계는 3479억루블(약 135억달러)로 은행 전체 자산 합계액 5.3%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에서 충분한 지점망을 갖추고 활발하게 영업활동을 하고 있는 외국계 은행은 라이파이젠방크(오스트리아), 시티뱅크(미국), 인터내셔널 모스코우 은행(합작) 등이다.

 이중 라이파이젠방크는 모스크바에 12개 지점망과 6개 지방 도시에 지점을 설립하는 등 가장 영업규모가 크다. 이 은행은 러시아 경제 위기 직전인 1996년부터 영업을 시작, 2001년부터 소매금융에 진출했고, 2004년에는 자산규모가 45.6% 증가하는 등 급성장하고 있다.

 시티뱅크 역시 2002년부터 소매금융 업무를 시작했으며, 2004년 자산규모가 30.4% 증가했다. 모스크바에 7개 지점을 두고 있으며, 업무영역을 점차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계 은행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신인도에도 스베르방크 등 러시아 국책은행들에 비해 부족한 지점망과 텃새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러시아 대기업들이 장기간 거래관계를 유지해온 스베르방크 선호 경향이 강해 점유율을 크게 높이지 못하는 실정이다.

 러시아 은행산업의 고수익성 및 성장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외국인 투자증대 추세에 따라 외국계 은행의 진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러시아 은행업계에도 러시아에서 만연하고 있는 ‘고위험 고수익’ 등식이 성립 중이다.

정병선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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