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4월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례식 때 미국 전·현직 대통령들은 교황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진 미국 대통령들이 군사력도, 경제력도 없는 교황의 주검 앞에 고개를 숙인 것이다. 조지 W. 부시 현 대통령, 전직 대통령인 아버지 조지 부시와 빌 클린턴의 조문 모습은 여러모로 현실과 종교 세계의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생전에 많은 질책을 받았다. 교황은 부시 대통령의 면전에서 이라크전을 반대했고, 미국의 사형 제도도 비판했다. 두 사람은 현실적으로 별로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부시 대통령은 교황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미국 대통령이 교황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부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부시 자신은 가톨릭이 아닌 기독교 신자다. 부시 대통령은 왜 전직 대통령들과 함께 교황의 장례식을 찾아갔을까.

 부시 대통령의 교황 장례식 참석은 현실 정치와 종교 세계의 미묘한 상관 관계, 나아가 백악관에 대한 갈수록 커지는 바티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헌법에 의해 종교와 정치가 분리돼 있다. 하지만 ‘현실 정치의 황제’인 미국 대통령은 ‘종교 세계의 황제’인 교황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만큼 미국에서 가톨릭 비중이 높기도 하지만, 교황으로 상징되는 가톨릭 종교의 힘이 전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만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가까워지려는 미국 대통령들의 노력은 교황의 재위 지난 26년간 계속돼 왔다. 1960년대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었다. 그는 교회로부터의 독립성을 강조하기 위해 교황을 만나지 않았다. 반면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즉위한 이후인 1979년 카터 대통령은 백악관으로 교황을 초대했고, 이듬해엔 자신이 직접 바티칸을 찾아갔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네 차례나 교황을 만났고 교황청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도 4년 임기 동안 두 번 교황을 찾았고,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와 네 차례 직접 만났다. 현 부시 대통령은 작년 6월 바티칸을 방문하는 등 1기 임기 4년 동안 세 차례 교황을 알현했다.

 물론 미국 대통령, 특히 현 부시 대통령의 교황에 대한 구애가 정치적 계산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 미군들의 포로 학대, 사형제 등에 대해선 교황의 공개적인 질책을 받았지만 종교적 신념과 가치관에서 공유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이 이른바 ‘거듭난 기독교인’으로 독실한 기독교신자란 것은 잘 알려진 일. 낙태와 동성애, 안락사 반대, 줄기세포 연구 제한 등 이른바 ‘생명 문화’에서 부시는 교황과 강한 동질성을 가졌다.

 이런 보수적 입장의 부시 대통령은 작년 대선에선 가톨릭 신자인 존 케리 민주당 후보보다 더 많은 지지를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받는 기록을 낳기도 했다. 미국의 정치 분석가들은 부시 대통령이 교황과의 종교적 신념 공유를 통해 미국내 보수적 지지 기반을 강화하고, 복음주의 기독교인들과 가톨릭 사이의 ‘결합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내 가톨릭은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육박하는 약 6400만명에 달한다.

허용범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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