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을 지르며 요란하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십여명의 무리가 차례로 앞을 지나갔다. 2018년 11월 29일(현지시각) 오후 3시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중심가로 불리는 베니스(Venice) 해변 입구에 도착하자 마주친 풍경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스케이트보더들이 대수롭지 않은 듯 무심해보였다. 해변 방향으로 100m 가량 들어가니 야자수가 늘어선 베니스 해변가 산책로가 나왔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곡예하듯 시끌벅적한 보더들은 물론 기타 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야외 코트에서 농구하는 사람, 개와 산책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옷차림도 각양각색이다. 베니스 해변을 왜 반항적인 히피 문화의 중심지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베니스 해변가에서 한 블록 안쪽으로 들어가면 최근 10년 사이 LA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으로 꼽히는 모바일 메신저 ‘스냅챗’의 본사가 있다. 2011년 창업한 스냅챗은 수신인이 내용을 확인하면 메시지가 사라지기 때문에 일명 ‘단명(短命) 메시지’로 불리며 미국 10대들에게 특히 인기를 끌고 있다. 전체 사용자 가운데 70%가량이 18~34세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스냅챗을 이용하는 사람 수는 2억명에 육박한다.

스냅챗의 모회사 스냅은 2017년 3월 성공적으로 미 뉴욕 증시에 상장했고, 기업가치가 약 300억달러(약 33조원)로 평가받고 있다. 스냅챗 효과에 따라 베니스 해변 일대 사무실 임대료는 2011년 이후 100%(2017년 말 기준) 올랐다.

스냅챗 본사 주변에는 유니레버에 1조원에 인수된 면도날 정기 배송 업체 ‘달러셰이브클럽’부터, 아마존에 역시 1조원에 인수된 비디오 초인종 업체 ‘링’,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비디오게임 ‘리그오브레전드’의 개발·운영사 ‘라이엇게임즈’도 있다.

‘스냅챗의 도시’ ‘콘텐츠의 도시’ LA가 이제 ‘기술혁신의 도시’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10년 사이 다양한 형태의 혁신을 내세운 벤처기업들이 늘고 있는 데다 현지 기반 벤처캐피털(VC)이 50~60군데나 생겨나면서 벤처·기술기업의 생태계가 구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1~2년 사이 이 지역이 ‘실리콘비치(Silicon Beach)’로 불리며 특히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을 ‘스타트업(초기단계기업) 생태계의 구축’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 혁신의 발원지이자 기술기업의 성지인 실리콘밸리의 ‘이상 현상’이다. 실리콘밸리는 풍부한 고급 인재, 탄탄한 VC, 스탠퍼드대·UC버클리 같은 명문 대학, 혁신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문화, 이런 모든 것이 어우러진 네트워크 효과(어느 제품의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그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의 효용이 커지는 것) 등으로 어떤 도시도 대체할 수 없는 곳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애플부터 알파벳(구글의 모회사), 페이스북까지 전 세계 거대 기술 기업 5곳 중 3곳이 실리콘밸리에 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정점을 찍은 실리콘밸리(Peak Valley)’라는 주제의 커버스토리를 싣고, 과도한 기업 유지 비용, 한계에 봉착한 혁신 등을 이유로 ‘탈(脫)실리콘밸리’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들어 실리콘밸리로 유입되는 인구보다 나가는 인구가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익명의 실리콘밸리 기업가를 인용해 “이곳에서 기업을 유지하려면 미국의 다른 지역보다 4배 정도 돈이 더 들어간다”고 전하며, ‘높은 비용’이 실리콘밸리 위기의 가장 큰 이유라고 분석했다. 실제 실리콘밸리의 주택 가격 중간값(median)은 94만달러(약 10억5000만원)로 미국 평균 주택 중간값의 정확히 4배다.

거대 기업이 주로 자리잡고 있는 실리콘밸리의 특성상, 그 틈바구니에서 혁신을 해보려는 스타트업이 설 자리가 없다는 분석도 나왔다. 인공지능(AI)이나 빅데이터 같은 유망 기술 분야의 인재를 빨아들이기 위해 대기업들이 어마어마한 연봉과 보너스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만 해도 평균 연봉이 24만달러(약 2억7000만원)에 달한다. 자금력이 부족한 스타트업으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금액이다.

이 때문에 실리콘밸리에 있는 기업가들이 LA나 텍사스주의 오스틴 등 다른 도시로 거점을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거물’로 꼽히는 피터 틸(인터넷 결제 서비스 페이팔의 공동창업자)이 2018년 2월 실리콘밸리를 떠나 LA로 자택과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특히 LA가 ‘기술기업들의 새로운 거점’으로 더 부각되고 있다.

2019년 새해를 맞아 ‘이코노미조선’은 ‘실리콘비치’로 불리고 있는 LA를 찾아가 그 비결이 무엇인지 취재했다. 취재는 2018년 11월 마지막 한 주 동안 진행됐다.


강점 1│고급 엔지니어의 산실

LA에는 캘리포니아대(UCLA),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캘리포니아공대(Caltech) 같은 명문대를 포함해 엔지니어를 양성할 수 있는 대학이 무려 25개가 있다. LA에서 배출되는 엔지니어 수는 연간 1만명이 넘는다. 보스턴(9862명), 실리콘밸리(7561명), 뉴욕(6811명)보다 많다.

그동안 LA 명문대를 졸업한 인재들은 실리콘밸리로 취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이곳에서 자리잡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데이비드 최 로욜라 메리몬드대(LMU) 경영대 창업센터장은 “이 지역 명문대 졸업생들은 10년 전만 해도 실리콘밸리로 가거나 이 지역의 이름 있는 항공 산업계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유능한 인재들도 이곳에서 취업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졌다”고 말했다. 재닛 정 UCLA 앤더슨 경영대학원 프로그램 매니저는 “UCLA 경영대학원을 졸업하면 으레 컨설팅이나 금융업계로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LA의 작은 회사에 취직해 단기간에 회사를 성장시키며 경험쌓는 것을 택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며 “특히 기술 벤처기업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테슬라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가 12월 18일(현지시각) LA 호손에서 도심 고속터널 시범 구간을 공개했다. 사진 AP통신
테슬라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가 12월 18일(현지시각) LA 호손에서 도심 고속터널 시범 구간을 공개했다. 사진 AP통신

강점 2│현지 VC만 50곳

인재들이 실리콘비치에 몰리더라도 자금이 없다면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 10년 사이 업프론트벤처스, 크로스컷벤처스등 LA 기반 VC만 50~60군데로 늘었다. 실리콘밸리 같은 다른 지역 VC들도 적극적으로 LA 지사를 내며 다양한 유망 기업들에 투자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테슬라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다 2017년 잠시 쉬면서 LA에 ‘82랩스’라는 회사를 창업해 숙취해소음료를 만들었던 이시선씨는 호기심에 만든 음료의 소비자 테스트 반응이 너무 좋아 고민에 빠졌다. 테슬라로 돌아가 다시 빡빡하게 일할지, 아니면 스타트업 운영을 이어갈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시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먼저 안 실리콘밸리 VC ‘슬로우벤처스’와 LA 현지 VC ‘스트롱벤처스’ 관계자들이 이씨를 찾아왔다. 이들이 제시한 투자금은 총 50만달러(약 6억원). 조건은 테슬라에서 나와 82랩스에만 전념해달라는 것이었다. 망설이던 이씨가 “망하면 이 돈을 돌려줘야 하냐”고 물었고, 이들은 “안 돌려줘도 된다.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남은 투자금으로 다른 걸 하라”고 했다. 이씨는 “테슬라를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투자금을 대주고, 회사가 성장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지원해준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강점 3│항공·우주부터 콘텐츠까지 다양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는 2018년 12월 18일(현지시각) 미국 LA 서부 호손에 있는 자신의 우주개발회사 ‘스페이스X’의 주차장 앞에서 미래 교통 시스템에 대한 비전을 펼쳤다. 테슬라를 창업해 전기차를 대중화하고, 스페이스X로 민간 우주시대를 연 머스크가 이번에는 도심 교통 체증을 해결하겠다며 테슬라 전기차를 타고 자신이 판 지하터널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시연한 것이다. 앞서 2016년 12월 머스크가 트위터를 통해 LA 교통체증을 불평하며 그 해결책으로 지하터널을 언급한 지 꼭 2년 만이었다. 머스크는 터널에 전기장 발생 장치를 설치하고, 전기를 흘려 차가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 전기차는 1.8㎞ 거리를 30여초 만에 이동했다.

LA는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는 스페이스X 외에도 나사(NASA)의 핵심시설 중 하나인 제트추진연구소, 보잉·록히드마틴의 생산기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LA에는 전 세계 콘텐츠와 미디어 업계의 중심지인 할리우드도 있다. 존 남 스트롱벤처스 공동 대표는 “할리우드에는 다양한 창의적 인재와 문화가 모인다”며 “콘텐츠·미디어 업계는 어떤 서비스를 내놓을 때 할리우드에서 테스트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일단 통하면 전 세계에 출시해도 된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창 쉬 업프론트벤처스 수석은 “LA에는 첨단 기술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군이 존재하기 때문에 실리콘밸리에서 볼 수 없는 혁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평평해지는 혁신 기지”

다만 LA 대표 기업이 스냅챗 정도라는 점, 글로벌 대기업들이 본사를 아예 옮기기보다는 특정 사업부나 지사를 두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은 한계로 꼽힌다.

‘이코노미스트’는 “투자자들이 실리콘밸리로 무조건 몰려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실리콘밸리로 기울었던 ‘혁신의 운동장’이 영상통화나 메시징 앱 같은 다양한 기술 도구를 통해 평평해지고 있다”며 “LA 등 다양한 지역이 혁신 기지로 떠오르는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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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비치와 실리콘밸리 실리콘비치와 실리콘밸리 모두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에 있다. 실리콘비치는 기술·벤처기업들이 밀집한 LA 해안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실제 지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해안가에 있는 샌타모니카부터 베니스, 마리나델레이, 플라야비스타 지역에 특히 많은 기업들이 몰리고 있다. 최근에는 플라야비스타 지역에 스마트폰 주변기기 업체 벨킨의 본사부터 유튜브 스페이스, 페이스북 LA 지사 등이 잇달아 들어서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LA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반 정도 북쪽으로 가면 있다. 샌프란시스코(우버·트위터)부터 멘로파크(페이스북) 팰로앨토(테슬라), 마운틴뷰(구글), 쿠퍼티노(애플), 샌타클래라 (인텔·엔비디아), 새너제이(어도비)까지 길이 48㎞, 너비 16㎞의 띠 모양을 이루고 있는 기술 기업 허브를 부르는 말. 역시 실리콘밸리라는 특정 지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plus point

아마존 이어 구글까지 실리콘밸리 밖으로

미국 정보기술 대기업이 뉴욕으로 향하고 있다. 2018년 11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이 뉴욕에 제2 본사를 건설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구글도 뉴욕 맨해튼 허드슨강변에 대규모 업무단지를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2018년 12월 17일(현지시각) 구글은 10억달러(약 1조원)를 투입해 약 16만㎡(약 4만8000평) 부지에 3개 업무동을 조성하고, 2020~2022년에 직원들을 순차적으로 입주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구글은 뉴욕에서 고용하고 있는 직원 수(7000명)를 두 배 늘릴 예정이다. 루스 포랫 구글 최고재무책임자는 “뉴욕은 세계적인 수준의 다양한 인재를 지속적으로 구할수 있는 곳”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는 최근 거대 기업들조차 실리콘밸리를 벗어나 다양한 지역을 물색하는 것과 맞물린 것이다. 애플도 최근 텍사스주 오스틴에 10억달러를 들여 새 캠퍼스를 조성한다고 밝혔다. 시애틀에 본사가 있는 아마존은 뉴욕과 워싱턴 인근에 제2 본사를 짓는다고 발표했다.

plus point

실리콘밸리, 파티는 끝났다

‘실리콘밸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피터 틸은 “실리콘밸리가 너무 편협해지면서 스스로 혁신을 파괴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블룸버그
‘실리콘밸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피터 틸은 “실리콘밸리가 너무 편협해지면서 스스로 혁신을 파괴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블룸버그

페이팔의 공동창업자인 피터 틸은 “기술 혁신의 전진기지로서 실리콘밸리의 리더십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틸은 2018년 1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뉴욕타임스(NYT) 딜북 콘퍼런스에서 “실리콘밸리가 너무 배타적이 되어, 혁신을 되레 파괴할 수 있는 집단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실리콘밸리를 성장시켜 온 ‘네트워크 효과’가 무질서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군중의 지혜’가 아니라 ‘군중의 광기’라고 봐야 할 지경”이라고도 했다. 실리콘밸리와 가까운 미 스탠퍼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틸은 페이스북 등에 초기투자하며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벤처 사업가이자 투자자로 왕성하게 활동해 왔다. ‘실리콘밸리의 산증인’인 셈이다. 그런 그가 공개적으로 ‘실리콘밸리의 전성기는 끝났다’고 비난하는 것은 실리콘밸리에서 그가 유일하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인물이라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앞서 9월에도 한 유명 유튜버 쇼에 출연해 “1980년대 후반 내가 대학생일 때만 해도 스탠퍼드대와 실리콘밸리는 매우 자유롭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곳이었다”면서 “지난 20년간 실리콘밸리는 민주당 지지자의 땅으로 바뀌었으며, 좌로 너무 치우친 성격을 띠게 됐다”고 했다. 2018년 초 틸은 실리콘밸리에서 LA로 거주지와 사무실을 옮겼다.

장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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