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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삶의 태도 돌이켜보게 하는 ‘남김’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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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독서수첩 28] 남김의 미학
극단적 삶의 태도 돌이켜보게 하는 ‘남김’의 지혜
기사입력 2017.09.05 18:59


남김(여백)의 미학이 드러난 단원 김홍도의 산수화 ‘옥순봉도’. <사진 : 위키피디아>

남김의 미학
이남호 지음 | 현대문학사
1만6800원 | 392쪽

최근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와 산문을 모은 전집(전 20권)이 5년에 걸친 편집 작업 끝에 완간됐다. 시만 950편에 이른다. 이남호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편집위원을 대표해 “미당이 발표해놓고 시집에 싣지 않은 시는 시인의 뜻을 존중해 전집에 수록하지 않았다”면서 “언젠가 후학들이 새로 전집을 만들 것을 예상해 남겨뒀다”고 밝혔다. 그 ‘남김’의 여운이 묘하게 남았다.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에 당선돼 비평가로 활동해 온 이 교수는 지난해 가을 환갑을 맞아 산문집 ‘남김의 미학’을 냈다. 부제는 ‘한국적 지혜와 미학의 탐구’. 문학을 비롯해 건축·미술·공예·음식 등에 깔려 있는 전통문화를 ‘남김의 미학’이란 차원에서 재조명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가 ‘끝장’이니 ‘막장’이니 또는 ‘승자독식’이니 하면서 극단적인 삶의 태도를 지니게 된 것은 예부터 내려온 ‘남김’의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선 황진이의 시조에 나타난 남김의 미학을 보자.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이 교수는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외로운 밤을 다 외로워하지 않고 남겨두겠다는 생각이고, 그렇게 남겨둔 밤을 미래의 행복한 밤에 보태서 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며 “이러한 생각과 마음이 있으므로 해서 화자(話者)는 불면과 외로움의 긴 밤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황진이 시조에 나타난 남김의 미학

그러한 태도는 월산대군의 시조에 나타난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는 ‘비움’의 미학과는 다르다. 불교에서 차용한 ‘비움’의 정신이 무욕과 무용에 바탕을 둔 종교적 깨달음에 기대고 있다면, 황진이의 ‘남김’은 보다 더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황진이의 시조를 창으로 부르면 남김의 미학이 더 뚜렷이 드러난다. 시조창은 종장의 마지막 구절을 노래하지 않는 법이다.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까지만 노래하고 ‘펴리라’는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랫말을 이처럼 남겨두는 노래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경우다. 이 교수는 “굳이 설명하자면 그것은 다하지 않는 것, 모자란 것, 부족한 것이 다하는 것, 충분하고 충족된 것보다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이 교수는 남김의 미학을 우리의 전통문화 곳곳에서 찾아냈다. 못생기고 구부러진 목재를 그대로 사용한 화엄사 구층암의 요사채라든지, 선운사 만세루 들보를 꼽을 수 있다. 분청사기는 끝까지 다 칠하지 않음으로써 방심과 어리숙함의 여지를 남겼다. 김홍도의 산수화에선 여백의 동력이 강조된다. 덕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심원한 풍경도 상상할 수 있게 했다.

이 교수의 심미안은 서정주의 시에서도 남김의 미학을 읽어낸다. 그의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라고 시작한다. 이 교수는 “섭섭함을 겉으로 다 드러내지 않는 태도 혹은 섭섭함을 스스로 남기는 여유 있는 마음을 지니라고 말한다”라고 풀이했다. 이 교수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사랑도 남기고, 미움도 남기고, 칭찬도 남기고, 그리움도 남기고, 슬픔도 남겨두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다하려 말고 조금은 남기자. 이것이 우리 선조들의 삶과 문화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남김의 미학”이라는 얘기다.

기사: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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