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토 몬텔레나 전경. 사진 나라셀라
샤토 몬텔레나 전경. 사진 나라셀라

세계 역사에는 두 개의 ‘파리의 심판(Judgement of Paris)’이 존재한다. 하나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1976년에 실제로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그리스 신화 속 파리의 심판이 로마 건국으로 이어졌다면, 1976년 파리의 심판은 세계 와인 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스 신화에 기록된 파리의 심판은 프티아의 왕 펠레우스와 바다의 요정 테티스의 결혼식에서 시작된다. 제우스가 마련한 성대한 결혼 축하연, 여기에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초대받지 못했다. 화가 난 에리스는 연회장으로 들어가 황금 사과를 하나 던져두고 떠났다. 사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자에게.’

황금 사과를 놓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의 경쟁이 치열했다. 제우스에게 판정을 요청했지만, 그는 후환이 두려워 파리스를 심판관으로 지목했다. 헤라는 권력을, 아테나는 지혜를, 아프로디테는 미인을 뽑아주는 대가로 약속했다. 파리스는 황금 사과의 주인으로 아프로디테를 선택했다.

문제는 그 미인이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라는 점이었다. 헬레네와 사랑에 빠진 파리스는 그녀를 데리고 트로이로 도망쳤고, 이는 곧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됐다. 목마 계략으로 트로이가 함락되는 순간 아수라장을 겨우 빠져나온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프로디테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이아스다. 험난한 여정을 헤치고 이탈리아반도에 닿을 수 있었고 로마 건국의 시조가 됐다.

1976년에 벌어진 파리의 심판은 파리에서 와인숍과 학원을 운영하던 영국인 와인 평론가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로부터 시작됐다. 미국 와인의 우수성을 알아본 그는 나파 밸리 와인과 프랑스 명품 와인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기획했다. 당시는 프랑스가 와인으로 전 세계를 제패하던 때. 미국, 남미, 호주 등 신대륙 와인은 명함도 못 내밀던 시대였다.

스퍼리어는 나파 밸리에서 레드와 화이트 와인 각 6종씩을 공수해 왔고, 프랑스 와인은 보르도산 레드와 부르고뉴산 화이트로 4종씩을 준비했다. 심사위원으로는 프랑스 와인계의 저명인사 9인을 초대했다. 기자들도 불렀지만, 프랑스인은 아무도 가지 않았다. 자국 와인이 당연히 이길 행사이므로 취재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타임’ 파리 특파원만이 유일하게 참석한 기자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먼저 시행한 화이트 와인 테이스팅에서 나파 밸리의 샤토 몬텔레나(Chateau Montelena) 샤르도네가 프랑스 명품 화이트 와인을 모두 꺾고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레드 와인도 마찬가지였다. 1위는 나파 밸리의 스택스 립 와인 셀라(Stag’s Leap Wine Cellars)가 출품한 S.L.V. 카베르네 소비뇽이 차지했다.

프랑스 심사위원들은 패닉에 빠졌다. 프랑스 와인은 오래 묵어야 제맛을 내는데 숙성이 필요 없는 미국 와인과 영 빈티지를 비교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의견도 있었고, 프랑스 와인이 여전히 우위에 있다며 평가 결과를 무조건 부정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파리의 심판’이라는 중의적인 제목으로 ‘타임’에 대서특필된 이 행사는 전 세계 와인 업계의 흐름을 바꾼 계기가 됐다.


‘파리의 심판’ 당시 사진. 소믈리에가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위해 와인을 서빙하고 있다. 사진 나라셀라
‘파리의 심판’ 당시 사진. 소믈리에가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위해 와인을 서빙하고 있다. 사진 나라셀라
2019년 한국을 방문한 샤토 몬텔레나의 오너 와인메이커 보 배렛. 사진 나라셀라
2019년 한국을 방문한 샤토 몬텔레나의 오너 와인메이커 보 배렛. 사진 나라셀라

프랑스와 다른 개성 찾은 미국 와인

스택스 립 와인 셀라는 1970년 워런 위니아스키(Warren Winiarski)가 설립한 와이너리다. 위니아스키는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사람이다. 그는 1년간 이탈리아에서 머물다 와인에 심취하게 됐고 미국으로 돌아가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위니아스키는 과수원이었던 땅 44에이커를 매입해 카베르네 소비뇽을 심었고 밭 이름을 스택스 립 빈야드(S.L.V.)라고 지었다. 스택이 뛰어노는 밭이라는 뜻인데, 스택은 사냥꾼을 조롱하며 절대 잡히지 않는 전설적인 사슴이다. 1972년 이 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첫 빈티지가 출시됐고 1973년산이 두 번째인데, 바로 이 와인이 파리의 심판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S.L.V. 카베르네 소비뇽을 맛보면 잘 익은 체리와 자두, 살짝 마른 무화과 등 농익은 과일 향이 가득하다. 여기에 다크초콜릿, 흑연, 송로버섯, 바이올렛 등 다양한 향이 섞여 복합미도 탁월하다. 질감은 부드럽지만 구조감이 탄탄하고 신맛이 산뜻해 와인이 힘차고 경쾌하다. 위니아스키의 표현대로 ‘벨벳 장갑 속의 강철 주먹(Iron fist in a velvet glove)’ 같은 느낌이다.

샤토 몬텔레나는 원래 1882년에 설립된 와이너리다. 미국의 금주령 시기(1920~33)를 견디지 못하고 폐허가 된 이 와이너리를 1972년 변호사였던 짐 배렛(Jim Barrett)이 사들여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는 원래 카베르네 소비뇽에 관심이 많았지만 1973년에는 포도나무가 너무 어려 와인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출품한 것이 샤르도네였는데 이것이 화이트 와인 부문에서 1위를 했다.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는 레몬, 사과, 살구, 복숭아 등 달콤한 과일 향이 풍부하고, 은은한 꽃 향과 톡 쏘는 계피 향이 우아함을 더한다. 한 모금 머금으면 달콤함, 고소함, 상큼함이 와인의 부드러운 질감과 한데 어우러져 입안을 가득 채운다.

2019년 짐 배렛의 아들 보 배렛이 한국을 방문했다. 파리의 심판 같은 행사를 한 번 더 한다면 어떨 것 같은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나파 밸리 와인과 프랑스 와인이 확연히 다릅니다. 40여 년 전만 해도 미국은 프랑스 와인을 모델로 와인을 만들었어요. 맛과 향이 비슷하니 심사위원들이 헷갈릴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파리의 심판을 계기로 미국 와인은 도약할 수 있었고, 나파 밸리 와인은 독자적인 개성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미국만이 성장한 것이 아니다. 파리의 심판은 모든 나라에 우리도 언젠가는 프랑스 못지않게 훌륭한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줬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마트, 백화점, 와인숍 등에서 품질 좋은 와인을 다양하게 접하게 됐다. 스택스 립 S.L.V. 카베르네 소비뇽 1973년산과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 1973년산은 오늘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한쪽을 조용히 빛내고 있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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