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독일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청년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1921~47)의 실제 청춘은 나치 독일에 의해 갈가리 찢겼다.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던 그는 자신이 쓴 희곡 ‘문밖에서’가 초연되기 하루 전날 병상에서 삶을 마감했다. 사진 문학과지성사
20세기 독일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청년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1921~47)의 실제 청춘은 나치 독일에 의해 갈가리 찢겼다.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던 그는 자신이 쓴 희곡 ‘문밖에서’가 초연되기 하루 전날 병상에서 삶을 마감했다. 사진 문학과지성사

사랑스러운 푸른 잿빛 밤
볼프강 보르헤르트 지음|박규호 옮김
문학과지성사|644쪽|2만원

볼프강 보르헤르트(1921~47)는 20세기 독일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청년 작가로 영원히 각인돼 있다. 26세에 요절한 그는 짧지만 강렬한 불꽃처럼 달아올랐다. 그가 써낸 시와 소설, 희곡, 수필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청년의 정서를 대변했을 뿐 아니라 시대가 달라져도 늘 실존의 고뇌에 빠진 청춘의 영혼을 제시하고 있다. 보르헤르트가 남긴 20여 편의 단편 소설과 시집 한 권 분량의 시, 희곡을 한자리에 모은 전집이 최근 우리말로 처음 완역됐다.

보르헤르트는 영원한 청년 작가로 불리지만, 그의 실제 청춘은 나치 독일에 의해 갈가리 찢겼다. 사춘기 시절부터 조숙하게 문학적 재능을 키우던 보르헤르트는 전쟁이 터지자 군대에 징집됐다. 전투 중 총상을 당했지만, 자해 행위로 여겨져 조사받았고, 그 과정에서 발견된 편지에서 나치를 비판한 대목 때문에 군사 재판에 넘겨져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최전선에 배치되는 조건으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는 러시아와 싸우는 동부 전선에서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다 발에 동상을 입고, 황달과 발진티푸스까지 앓았기 때문에 야전병원 신세를 졌다.

퇴원한 뒤 잠시 귀향했지만, 다시 부대에 복귀하기 전날 밤 친구들과 벌인 환송식에서 나치 정권을 조롱한 정치 유머로 고발당해 체포됐다. 온갖 범죄자들로 들끓는 교도소에 투옥돼 9개월간 고초를 겪은 뒤 다시 군대에 끌려가선 서부 전선에 배치됐다. 이내 전쟁이 끝난 덕분에 그는 프랑스군의 포로가 됐지만, 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탈출해선 무려 600㎞를 걸어간 끝에 고향 함부르크에 도착했다.

보르헤르트는 전후 폐허가 된 독일 사회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면서 희곡도 써냈다. 그는 희곡 ‘문밖에서’를 단 며칠 만에 탈고했고, 이 작품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낭독된 뒤 단숨에 전후 세대를 대변하는 청년 작가로 주목받았다. “한 남자가 독일로 돌아온다. 그는, 그 남자는 오래 떠나 있었다. 아주 오래. 아마도 너무 오래”라는 희곡의 지문은 패전 이후 귀환 병사들의 정신적, 육체적 형상을 대변했다. “집으로 오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집은 없기에 집으로 오지 못하는 그들 중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 그러므로 그들의 집은 저기 문밖이다. 그들의 독일은 저 바깥, 비 내리는 밤, 길거리다.”

보르헤르트는 단편 ‘이별 없는 세대’로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애착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에겐 깊이란 끝 모를 나락이다”라고 시작하는 이 작품은 잔혹한 역사에 유린당한 청년 세대의 절규를 애절하게 담고 있다.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다. 우리는 이별의 삶을 살 수 없다. 우리에겐 그런 삶이 허락되지 않는다. 두 발이 비틀거리며 방황할 때 집시처럼 떠도는 우리 마음에 끝없는 이별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나 우리는 도착하는 세대”라며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별에, 새로운 삶에 고스란히 도착하는 세대다. 새로운 태양 아래, 새로운 마음에 고스란히 도착하는 세대”라는 역설을 통해 희망을 노래했다.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도착이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다”라고.

보르헤르트는 2년 남짓 창작 활동을 하는 동안 대부분 병상에서 작품을 썼다. 전쟁 중 얻은 온갖 질병이 그의 건강을 쉼 없이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보르헤르트는 생전에 시집과 단편집을 출간했지만, 자신이 쓴 희곡 ‘문밖에서’가 초연되기 하루 전날 병상에서 삶을 마감했다.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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