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테네 신전을 배경으로 한 그리스 와인들. 사진 김상미
그리스 아테네 신전을 배경으로 한 그리스 와인들. 사진 김상미

인류는 언제부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을까?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코카서스산맥 남쪽에서 와인을 담았던 토기가 발견됐는데, 연대를 측정해 보니 기원전 6000년쯤의 것이라고 한다. 이때를 시작으로 본다면 와인의 역사는 무려 8000년에 이른다. 와인은 이곳을 시작으로 중국, 이집트, 그리스로 퍼져 나갔다. 그중에서도 그리스는 와인 문화가 로마를 거쳐 유럽 전체로 뻗어나가는 관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왜 우리 주위엔 유명한 그리스 와인이 없을까?

그리스는 15세기 중반부터 약 400년간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회교도 치하에 있었으니 와인 생산이 원활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세기 초 독립을 이뤘지만, 그리스 와인은 불안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쉽게 과거의 영예를 되찾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그리스 와인의 성장세가 예사롭지 않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 토착 품종이 넘치는 개성으로 와인 애호가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아주 먼 옛날 올림퍼스의 신들이 마셨던 와인이 이런 맛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게 만드는 그리스 와인.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그리스 와인을 만나보자.

그리스 남쪽 에게해에 자리 잡고 있는 산토리니섬. 깎아지른 절벽에 파란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이다. 하지만 산토리니의 역사는 낭만과 거리가 멀다. 원래 둥글고 큰 섬이었던 산토리니는 기원전 1600년쯤 일어난 거대한 화산 폭발로 섬이 통째로 쪼개지면서 초승달 모양의 본섬과 주변의 작은 섬들만 남은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토양의 대부분이 화산분출물이다 보니 산토리니 땅에는 수분이 거의 없다. 이런 땅에서 포도가 자란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산토리니의 포도나무는 커다란 바구니 모양을 하고 있다. 가지가 위로 뻗지 못하도록 땅바닥에 딱 붙여 둥글게 말면서 포도나무를 키운다. 포도를 이렇게 재배하는 이유는 강풍과 턱없이 모자란 수분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포도나무가 위를 향해 자란다면 포도송이는 금세 바람에 날아가고 만다. 그래서 가지를 둥글게 휘어 바구니처럼 만들고 그 안에 포도송이를 숨겨 기르는 것이다.

포도나무를 바구니 형태로 만들면 적은 물로도 포도를 기를 수 있다. 산토리니의 연 강우량은 350㎜에 불과하다. 비는 겨울철에 주로 내리지만, 화산 토양이어서 물 빠짐이 너무 좋아 땅에 수분이 거의 남지 않는다. 따라서 산토리니의 포도는 아침 일찍 밀려 들어오는 안개로 수분을 보충할 수밖에 없다. 안개가 가져다준 습기를 바구니 안에 가둬서 포도를 기르는 것이다.

산토리니를 대표하는 품종은 아시르티코(Assyrtiko)라는 백포도다. 아시르티코 와인을 처음 맛보면 그 독특함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입안을 꽉 채울 정도로 보디감이 묵직한데 신맛이 살아 있어 와인이 경쾌하다. 라임, 자몽, 흰 복숭아 등 과일 향이 상큼하고, 흙이나 조개껍데기 같은 미네랄 향이 어우러져 있다. 탄탄함과 경쾌함을 모두 갖춘 스타일이다. 그래서 아시르티코는 해산물과도 잘 어울리지만 파스타, 닭고기, 돼지고기에 곁들여도 좋다.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반도는 바다와 산이 공존하는 곳이다. 해안에서 차를 타고 내륙으로 30분만 이동해도 고도가 급격히 높아지고 기온이 서늘해진다. 펠로폰네소스반도 북동쪽에 위치한 네메아(Nemea) 계곡은 해발 200~850m의 다양한 고도에서 포도를 기르는 곳이다. 이곳은 아기오르기티코(Agiorgitiko)라는 토착 품종으로 만든 레드 와인과 헤라클레스의 전설로 유명하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저주 때문에 가족을 살해하는 비극을 저질렀다. 속죄를 위해 그는 12가지 과업을 수행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네메아의 사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사자의 가죽이 너무 두꺼워 화살이나 창으로는 물리칠 수 없자 헤라클레스는 몽둥이로 사자를 내리친 뒤 목을 졸라 죽였다. 이때 흘린 사자의 피가 땅을 적시고 포도를 붉게 물들였는데, 그 포도가 바로 아기오르기티코라고 한다.

아기오르기티코 와인은 피처럼 선명한 루비 빛이 무척이나 매혹적이다. 가벼운 아기오르기티코는 신선한 산딸기와 체리 향이 풍부하고, 묵직한 아기오르기티코는 농밀한 과일 향과 톡 쏘는 향신료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가벼운 타입은 매콤한 음식이나 파스타와 즐기기 좋고, 묵직한 타입은 육류와 궁합이 잘 맞는다.


부활 꿈꾸는 그리스 와인

그리스 북부의 항구 도시 테살로니키에서 서쪽으로 약 한 시간 반 차를 달리면 베르미오(Vermio)산 남쪽 자락에 있는 나우사(Naoussa)에 도착한다. 산을 넘어 북쪽으로 70㎞ 더 가면 아민테오(Amyntaio) 고원이다. 해발 고도가 높고 기후가 선선해 우아한 와인이 생산된다.

이곳의 스타 품종은 단연 시노마브로(Xinomavro)다. 시노마브로는 그리스어로 ‘시고(xino)’ ‘검다(mavro)’는 뜻이다. 시노마브로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을 때 많은 와인 애호가가 이탈리아의 명품 와인 바롤로(Barolo)를 떠올렸다. 강건한 스타일의 부르고뉴(Bourgogne) 레드 와인 같다고 평가한 이도 있었다. 레드 와인 중에 가장 고급스럽다는 바롤로와 부르고뉴의 특징을 모두 갖춘 시노마브로의 등장은 혜성과도 같았다.

시노마브로의 가장 큰 장점은 복합미다. 산딸기, 라즈베리 등 잘 익은 과일 향과 말린 자두, 야생화, 토마토, 올리브, 담배, 견과 등 다양한 향미의 어울림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타닌이 많고 숙성 잠재력이 길기 때문에 10년 이상 묵히면 맛이 더욱 좋아진다. 아민테오에서 생산된 시노마브로는 섬세하고 강건한 맛이 특징이다. 나우사의 시노마브로는 향미가 풍부하고 부드럽다.

시노마브로는 로제와 스파클링 와인으로도 생산되는데, 질감이 탄탄해 육류와도 제법 잘 어울린다. 시노마브로의 품질은 바롤로와 부르고뉴에 필적할 만하지만, 가격은 절반 수준이다. 350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지녔음에도 긴 침체기를 겪어야 했던 그리스 와인이 부활을 꿈꾸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개성 넘치는 와인으로 우리 입맛을 사로잡을지 기대된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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