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저트에 곁들인 빈티지 포트. 사진 김상미
디저트에 곁들인 빈티지 포트. 사진 김상미

추운 겨울밤 집으로 향하다 보면 훈훈하게 와인 한잔 마시고 싶어 발길을 재촉하게 된다. 풍부한 과일 향이 입안을 묵직하게 채우면 하루의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따뜻함이 가득한 와인이라면 주정 강화 와인(알코올 도수를 높인 와인)이 제격이다. 클래식과 팝이 만나 크로스오버 음악이 탄생한 것처럼 주정 강화 와인은 와인에 증류주를 섞어 만들어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주정 강화 와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포르투갈에서 생산되는 ‘포트(Port)’다. 포트는 특히 영국에서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개와 고양이처럼 늘 티격태격하지만, 교역은 활발하게 진행하는 사이였다. 프랑스는 영국산 양모가, 영국은 프랑스산 와인이 각각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계승 서열이 높은 프랑스 왕이 스페인 왕까지 겸하게 됐다. 이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자신들도 스페인 왕위에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나섰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합쳐지는 것이 두려웠던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편에 섰다.

프랑스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면서 와인 수입이 어려워지자 영국은 대안으로 포르투갈과 메투엔(Methuen) 조약을 맺었다. 영국의 양모를 무관세로 포르투갈에 수출하고, 포르투갈 와인에는 프랑스 와인 관세의 3분의 1만 부과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포트의 영국 수출은 급물살을 탔고, 포트는 지금도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와인 가운데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왜 포트는 증류주를 섞어 만드는 걸까. 포트는 원래 일반 레드와인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영국까지 긴 시간 배로 싣고 가다 보면 와인 맛이 변하기 일쑤였다. 자칫 영국의 포르투갈 와인 수입이 허사가 될 판이었다. 이때 마침 포르투갈을 방문한 영국 와인상이 우연히 증류주가 섞인 와인을 맛보게 됐다. 포도즙의 당분이 모두 알코올로 변하기 전에 증류주를 더해 만든 와인은 발효되지 않은 잔당이 많아 달콤한 맛이 났고, 알코올 도수도 높아 웬만해선 상하는 일이 없었다. 와인상들은 이 방법을 도입해 포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포트의 풍부한 과일 향과 진한 단맛은 영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지금도 시가 바(cigar bar)에 가면 코냑이나 위스키와 함께 시가와 즐기기 좋은 술로 포트를 추천한다.

포트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것은 루비(ruby) 포트, 빈티지(vintage) 포트, 토니(tawny) 포트다. 루비 포트는 숙성 기간이 짧아 가격이 저렴하고 선명한 루비 빛을 띠며 달콤한 과일 향이 풍부하다. 빈티지 포트는 포도의 작황이 좋은 해에만 생산되는데, 약 2년간 숙성시킨 뒤 병에 넣어 출시한다. 빈티지 포트의 참맛은 오랜 병 숙성에서 나온다. 100년 넘게 보관할 수 있고 오래될수록 탁월한 복합 미(복합적인 맛)를 자랑한다. 1960년대 빈티지 포트도 현지에서는 200유로(약 26만원) 정도면 살 수 있기 때문에 포르투갈을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자신의 생년 빈티지 포트를 한 병 사는 것도 기념이 될 만한 일이다.

토니 포트는 커다란 나무통에서 장기간 숙성시켜 만든다. 최소 숙성 기간은 3~7년인데, 고급 토니 포트는 10년, 20년, 30년, 40년 단위로 숙성시켜 출시한다. 나무통은 액체는 새지 않지만, 공기는 통과하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나무통에서 와인을 오래 숙성시키면 공기와 만나면서 산화가 진행된다. 오래 산화된 토니 포트를 맛보면 마른 과일 향과 함께 견과, 캐러멜, 커피 등 다양한 향미가 풍성하게 피어오른다. 충분히 산화된 와인이므로 한 번 열어 마신 뒤에도 남은 와인을 수개월씩 보관하며 마실 수 있다.

포르투갈산 주정 강화 와인으로 포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부 세투발(Setubal) 지역에는 머스캣(Muscat)이라는 백포도로 만든 ‘모스카텔 드 세투발(Moscatel de Setubal)’이 있다. 이 와인도 포트처럼 발효 도중 증류주를 부어 만든다. 모스카텔 드 세투발의 창시자인 호세 마리아 다 폰세카(Jose Maria da Fonseca)다. 그의 자손들은 현재 7대째 이어진 와이너리(와인 양조장)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이 만든 모스카텔 중에서도 프리바다(Privada)는 코냑(cognac)과 알마냑(almanac)을 섞어 만들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코냑과 알마냑은 모두 와인을 증류해 만든 브랜디다. 코냑은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알마냑은 프랑스 알마냑 지방에서 생산된다.

포트와 모스카텔 드 세투발은 디저트 와인으로 인기가 높지만, 식전주로 즐겨도 좋다. 달콤한 맛과 함께 상큼한 신맛이 입맛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식전주로 마실 때는 10℃ 정도로 차게, 디저트로 즐긴다면 16℃ 정도로 온도를 약간 높이면 더욱더 맛있다. 디저트로 즐길 때는 견과류, 곶감, 짭짤한 치즈, 다크초콜릿, 케이크 등과 궁합이 잘 맞는다.


토니 포트를 숙성시키는 커다란 나무통. 사진 김상미
토니 포트를 숙성시키는 커다란 나무통. 사진 김상미
달걀 요리에 곁들인 버번 배럴 숙성 샤르도네. 사진 김상미
달걀 요리에 곁들인 버번 배럴 숙성 샤르도네. 사진 김상미

버번 담았던 나무통에서 숙성시킨 와인도

최근에는 와인에 증류주를 섞는 고전적인 방식 대신 증류주를 숙성시켰던 배럴(나무통)에 와인을 숙성시키는 참신한 시도도 진행 중이다. 미국 나파 밸리를 대표하는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 와이너리가 바로 그 주역이다. 몬다비는 버번을 숙성시킨 배럴에 카베르네 소비뇽과 샤르도네 와인을 숙성시켜 출시하고 있다.

버번 배럴에 숙성시킨 카베르네 소비뇽은 묵직하고 탄탄한 레드 와인에 바닐라, 캐러멜, 다크초콜릿 등 버번 특유의 향미가 더해져 맛이 우아하고 고급스럽다. 버번 배럴에 숙성시킨 샤르도네는 열대과일, 꿀, 캐러멜 등 달콤한 아로마가 풍부하고 와인을 마신 뒤에도 은은한 버번 향이 오래 입안을 맴돈다.

두 와인 모두 식사와 즐겨도 좋지만, 음악이나 영화를 감상할 때 견과나 치즈 등 간단한 안주와 함께 음미해도 좋다. 평소 와인만 즐기는 사람에게는 버번의 향을 느끼게 해주고, 증류주를 선호하는 사람에게는 와인의 매력을 체험하게 해주는 독특한 와인이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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