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8일 김영하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채 헤매다가 문득 어떤 생각에 이르게 되는 글을 좋아한다”고 했다. 사진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2019년 4월 18일 김영하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채 헤매다가 문득 어떤 생각에 이르게 되는 글을 좋아한다”고 했다. 사진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문학동네|216쪽|1만3500원

소설가 황석영의 별명이 ‘황구라’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한번 입을 열면 대하소설에 버금가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황석영은 외국 작가들을 만나면 그 별명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면서 “내 별명은 ‘빅 마우스’다(My nickname is Big Mouth)”라고 떠벌인다. 하지만 어느덧 칠십 고개를 넘긴 뒤 그가 술자리에서 예전처럼 ‘구라’를 왕성하게 푸는 게 뜸해졌다. “어디 편찮으신가”라고 후배 문인들이 물으면 그의 입에서 반사작용처럼 구라가 튀어나온다. “임플란트를 왕창 하고 난 뒤부터 구라가 잘 안 돼”라는 것.

황석영의 뒤를 이를 ‘문단 구라’를 꼽으라면 선뜻 소설가 김영하가 생각난다. 황석영과 비교할 때 세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에서 큰 차이가 나지만, 한번 입을 열면 청자를 끝까지 사로잡고 이야기의 여운도 남기는 솜씨는 같은 계보에 속한다. 황석영이 때로는 혁대를 풀어 뱀장수 흉내를 내면서 ‘광대’처럼 좌중을 압도한다면, 김영하는 조곤조곤 말하면서 오로지 서사의 힘으로만 문장과 문장을 이어서 시간과 공간을 장악한다. 황석영은 1970년대 담배 연기 뽀얀 문단 술자리에서 구수한 구라를 풀었지만, 김영하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 팟캐스트로 입심을 과시했고, 몇 년 전부터 공중파 TV 예능프로에 나가 작가답게 지식의 양념을 친 재담을 늘어놔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김영하가 최근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냈다. 초판 10만 부를 찍으면서 그가 누리는 대중적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김영하는 동인문학상 수상작 ‘검은 꽃’ 등의 소설 외에도 지금껏 산문집을 꽤 많이 냈다. 미디어의 변화가 주도하는 세태 풍속과 문화 현상을 포착하는 감각이 돋보이는 산문을 종종 써냈다.

이번엔 여행을 주제로 한 산문집이다. 책을 내게 된 동기에 대해 작가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꽤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다.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작가였고, 그다음으로는 역시 여행자였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책의 도입부에 실린 산문 ‘추방과 멀미’는 중국 여행을 다룬 글인데, 작가가 몇 해 전 소설을 쓰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공항에서 추방된 경험에, 스무 해 전 대학생 시절 첫 해외 여행지로 중국 땅을 밟았던 기억을 겹쳐놓았다. 인생행로에서 느꼈던 뜻밖의 체험을 멀미에 비유해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풀어놓았다. 노태우 정권 때 학생운동을 펼친 세대에 속한 작가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던 중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국내 재벌 기업후원으로 사회주의 국가 중국 시찰을 다녀오고, 그 여행 이후 운동권에서 멀어지고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독자로 하여금 웃음 짓게 하는 재미와 마음속을 헤집게 하는 깊이가 함께 있다.

김영하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가 여행기이듯이, 문학의 가장 오랜 형식은 ‘추구의 플롯’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여행자 스스로 변화하고 나름대로 변화를 깨닫는 과정이라는 것. 그래서 김영하의 여행 철학은 다음과 같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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