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SKY 캐슬’에서 전대미문의 악녀 ‘김주영’을 현실감 있게 소화한 배우 김서형(47세). 사진 고운호 객원기자
드라마 ‘SKY 캐슬’에서 전대미문의 악녀 ‘김주영’을 현실감 있게 소화한 배우 김서형(47세). 사진 고운호 객원기자

자식의 서울대 의대 입성을 앞둔 가장 화려한 날. 장총으로 제 머리통을 날려버린 영재 엄마(김정난)의 피투성이 시신을 눈 아래 내리깐 채 JTBC 드라마 ‘SKY 캐슬’은 시작했다. ‘we all lie’라고 울려 퍼지는 주제가와 달리, SKY 캐슬 사람들은 거짓말에 서툴다. 그들은 우아하게 자기를 감추기보다 욕망의 직설화법을 택한다. 그들은 열등감과 수치를 드러내는 데 부끄러움이 없다. 샤넬 트위드 재킷을 입고도 머리끄덩이를 잡고 “아갈머리를 찢어버릴라”고 위협하는 모습이라니.

자식을 ‘서울대 의대’에 보내려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부모들은 목표지에 도달하기 전엔 웬만해선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 까마득한 계층의 사다리를 걷어내려던 내부 고발자 ‘혜나’가 캐슬의 가장 높은 곳에서 떠밀려 죽은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당황하며 되묻기 시작한다.

‘빅브러더’ 김주영 ‘스앵님’이 세뇌하듯 경고했던 말, “감수하시겠습니까?”의 의미를.

이 블랙 코미디의 최전선에서 중산층의 고막을 황홀하게 후비던 최면술사, 자식 가진 부모를 마음껏 조종했던 입시계의 ‘빌런’이 나는 몹시 궁금했다. 검은 옷을 입은 사제처럼, 왜 그녀가 말하면 뭐든지 믿고 싶어지는 걸까. 새끼를 맡긴 자는 새끼를 맡은 자 앞에서 왜 항상 저자세인가.

“부모라면 기다려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너, 니 새끼 서울대 의대 보내는 거 포기 못 하잖아?” 싱싱한 미끼로 부모를 농락하던 그 농밀한 발성. 두 개의 목소리는 우리 안에 있던 빛과 어둠의 동굴에 닿아 깊은 파장으로 반복재생되곤 했다. 데뷔 이래 가장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김서형을 만났다.


그런 악역을 어떻게 감수했나.
“처음엔 두 번이나 거절했다. 이런 역할을 하면 내가 어떤 고통을 받는지 알기 때문에 나는 못 한다고 했다.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나 이거 하면 아파서 쓰러진다고. 실제로 많이 울었다.”

“어머니,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 굉장한 확신이 느껴졌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일종의 빅브러더의 시선이랄까.
“상대를 늘 아랫사람 대하듯 한다. 하하하. ‘감수할 수 있느냐?’는 말도 앞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얘기 아닌가.”

염정아씨와 기 싸움이 팽팽했다.
“우리 둘이 만나면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생겼다(웃음). 리허설 때부터 그 텐션(긴장감)이 어마어마해서 기가 다 빠져나가곤 했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같다는 평도 있더라.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기분이 어땠나.
“사실 다른 사람의 마음보다는 내 마음을 조절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이 컸다.”

‘김주영’은 훨씬 현대적이고 복잡하고 위엄을 갖춘 여성이다. 악역의 클래스가 역대급이었다.
“10년이 지났지만 내가 신애리 이상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런 불안이 늘 있었다. 그동안 ‘샐러리맨 초한지’ ‘기황후’ ‘자이언트’ ‘굿와이프’ 등 많은 드라마를 했지만, 나의 그 10년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다(웃음). 혹시 내가 고급스러운 신애리를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당신의 상대역은 누구라고 생각했나.
“감독님이 얘기한 건 딱 하나다. 김주영과 한서진은 같은 인물이라고. 한서진은 10년 전의 김주영이다. 그 끝을 아니까 계속 다그치는 거다. ‘감수하시겠습니까?’라고. 자식을 자기 욕망으로 채우려는 엄마들, 잘났다고 떠들어도 내 앞에선 다 우스운 존재들이니 손바닥 안에 있는 거다. 게다가 둘 다 자기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자식을 그 지경으로 몰고 갔으니까.”

염정아씨도 김서형씨도 둘 다 발성과 딕션(발음)이 좋고 ‘신경증’적인 장악력이 있다. 그녀를 경쟁 상대로 생각했나.
“아니다(웃음). 가장 비슷한 사람이라 그녀가 TV에 나오는 걸 그저 열심히 봤다. 아이들에게 가는 모습, 식구들과 사는 모습… 내가 비상구를 못 찾을 땐 그 모습을 보곤 했다. 엄마로서 병적인 모습, 그런데 내가 훨씬 더 병적이더라고. 하하하.”

어떤 장면에서 쾌감을 느꼈나.
“한서진이 선짓국집 딸 곽미향이라는 사실을 알고 박장대소할 때. 아 하하하하. 그 장면이 나는 정말 좋았다(웃음).”

“아갈머리를 찢어버릴라”라는 과격한 입심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한서진과 달리 김주영은 속눈썹 몇 가닥으로 상대의 기를 눌러버리는 나노급 제스처를 선보인다. ‘너 따위한테 쓰다 버려지지 않겠다’라고. 신경증과 히스테리의 달인 염정아와 미니멀한 동작으로 자제력 있는 ‘악인’을 연기하는 김서형이 30대에 붙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니, 만약 두 사람의 배역이 바뀌었더라면.

특별히 더 가슴에 남는 대사가 있나.
“한서진에게 처음 물세례를 받고 했던 대사가 생각난다. ‘기다려줬어야죠. 영재가 아무리 집을 떠나 가을이에게로 도망쳤어도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줘야 하는 사람이 부모 아닙니까.’ 그 말을 울림 있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명상실에서 한 대사들… 예서에게 ‘너를 방해하는 사람은 설령 엄마일지라도, 물리쳐라’는. 글쎄, 모르겠다. 나는 왜 그런 대사들에 꽂혔을까(웃음).”


“초심을 잃지 말자, 민폐 끼치지 말자”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김서형. 학창 시절 방송반에서 혼자 시를 읽고 녹음하며 발성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 고운호 객원기자
“초심을 잃지 말자, 민폐 끼치지 말자”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김서형. 학창 시절 방송반에서 혼자 시를 읽고 녹음하며 발성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 고운호 객원기자

궤변이든 최면이든, 그녀 안에 두 가지 모순된 목소리가 충돌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자기애는 강하지만 자존감은 약했던, 그렇게 부서지고 접합되기를 반복하던 과정에서 점점 더 강하게 반짝이는 크리스털로 조형돼가는 김서형을 보는 건 기분 좋았다.

짧게 친 커트 머리, 길게 솟은 코와 차가운 눈을 지닌 이혜영 류의 ‘매니시한(남성스러운)’ 여배우들의 계보에서 김서형도 예외가 아니었다. 도도한 커리어우먼이나 악녀로 일관된 커리어. 그라고 왜 다른 욕심이 없었을까. 그는 “그 과정에서 내가 나를 반복하며 있지는 않았을까, 그런 조바심은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25년 차 배우로 살면서 대중에게 섭섭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어떤 목표 의식이 있었나.
“민폐 끼치지 말자, 그래도 나는 조금씩 잘 쌓아가고 있다, 그런 마음. 어쨌든 목표는 ‘롱런’이니까. 내가 CF 퀸도 아니고, 예쁜 거로 인기를 얻는 스타도 아니잖나. 그 과정에서 나는 내 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지점을 알았던 것 같다. 대중이 원하는 시선 안에서 최대치의 무언가를 해내는 법을. 그래서 ‘신애리’ 이후 10년간, 뭔가 확 터지진 않았어도, 김서형과 그 캐릭터는 살아남았던 거고.”

자기를 지켜내며 일했던 셈이군.
“대중이 마지막 심판자지만, 나는 사실 내 시선의 기준이 더 중요했다. 내 나름대로 생명력을 잃지 않으려고 ‘서치(검색)’를 많이 했다. 이를테면 샤를리즈 테론이나 샤론 스톤의 고혹적인 악역 연기. 영화의 매장면을 다 돌려보진 않아도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를 계속 몸에 저장하는 거다.”

옷 한 벌 피팅하는 데만 6시간 걸렸다는 게 사실인가.
“그랬다. 감정선에 맞게 디자인, 디테일, 원단 다 다른 것으로 꼭 맞게 입었다. 시청자분들이 보기엔 다 같은 블랙일지 몰라도, 나는 대본의 흐름대로 장면마다 몸을 맞췄다. 완벽주의의 끝까지 갔다. 하하.”

롤모델이 있나.
“어릴 땐 이혜영씨 얼굴을 좋아했다. 연기하는 모습에선 ‘디어 마이 프렌즈’의 김혜자 선생님 보고 ‘아, 저분과 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지만, 나는 누군가를 ‘롤모델’로 우러러본 적은 없다. 감사하게도 어린 나이에도 카리스마 있는 배역을 해냈고, 늘 김서형이 가지고 있는 한계치를 넘어섰다. 과대평가된 김서형과 같이 살다 보니, 나도 산전수전 겪으며 ‘김서형’이라는 배우를 믿어주게 된 것 같다.”

기품을 유지하는 비결은 뭔가.
“나 자신과 싸움에서 정직했다. 나의 재능, 나의 노력, 나의 실패를 꿰뚫어 보고 항상 의문을 가졌다. ‘열심히 할 거야. 이래도 나를 캐스팅 안 해?’ 속으로 윽박지르면서, 하하. 그 외의 공간에선 ‘멍 때리면서’ 나를 비워뒀다.”

거울을 보면 본인의 얼굴이 맘에 드나.
“멋진 역할들을 만나 멋있어진 것 같다. 그런데 다시 봐도 예쁘진 않다(웃음).”

당신의 어떤 면이 자랑스러운가.
“열아홉 살 때부터 집을 떠나와서 가끔은 흐트러질 때도 있었지만 다시 쓸어 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를 믿고 신뢰했다. 10년 동안 나를 던지면서 일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톱배우들도 오디션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선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과 ‘악녀’를 대표작으로 뽑는 데 동의하나.
“나는 조근현 감독과 했던 ‘봄’이라는 작품을 좋아한다. ‘악녀’는 칸에 진출했으니 의미 있지만,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노력과는 달리 나에게 ‘에로배우’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웃음). 난 분명 KBS 16기 탤런트로 시작했는데, 하하.”

유년 시절은 즐거웠나.
“엄마 말씀이, 말 터질 때부터 배우가 되겠다고 했다더라. 어릴 땐 아빠와 ‘주말의 명화’를 봤고, 아바의 노래를 들었다. 유년기부터 고등학생 시절까지 강릉에서 보낸 게 내겐 행운이었다. 등하교할 땐 코스모스길을 걸으며 이문세 노래를 흥얼거렸고, 시를 읽고 녹음해서 내 목소리를 들어보곤 했다. 심심할 땐 고구마 서리도 하고, 힘들 땐 바다에 나가 물만 쳐다봤다. 사춘기 시절엔 우울과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지금이 정말 좋다.”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나.
“돈이 있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 돈이 없어도 꿋꿋하게 사는 사람들. 본성, 욕망, 인성의 불편한 지점을 다 드러냈다.”

그 정중앙에 당신이 있었다.
“감사하다.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악역을 아껴줘야 한다. 캔디 역할은 만나는 사람도 많고 좋은 감정을 나누지만, 악역의 감정 소비는 좀 다르니까(웃음).”

이제껏 본인이 가장 잘한 일은 연기를 한 것과 요크셔테리어 종의 강아지 ‘꼬맹이’를 14년간 키운 것이라고. 여리고 약한 동물을 키워보니, 모든 생명체는 믿어주는 만큼 예민하게 반응하더라고. 그러니 “여러분도 자식이 갓 태어났을 그때처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기다려줘라”라고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이쪽과 저쪽은 있되, 중간은 없는 것 같은 김서형. 자신을 채찍질해서 얻은 악의 멍 자국으로 온몸이 시퍼런데도, 찰과상 하나 입지 않은 것처럼 청량한 자존감을 내보이는 무중력의 자아. 이걸 순진이라 할까, 순열이라 할까. 자신의 문체를 끝까지 지켜낸 작가처럼, 총구 앞에서 마지막 동작을 완성한 무용수처럼, 가끔은 선악을 넘어서 한 인간의 미학적 의연함에 감탄하게 된다.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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