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보수에 모두 쓴소리를 하는 생명운동가 정성헌. 1970년대부터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한 진보 농사꾼 출신으로 올해 3월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현재 DMZ생명평화동산 이사장이기도 하다. 사진 고운호 객원기자
진보와 보수에 모두 쓴소리를 하는 생명운동가 정성헌. 1970년대부터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한 진보 농사꾼 출신으로 올해 3월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현재 DMZ생명평화동산 이사장이기도 하다. 사진 고운호 객원기자

낮은 산으로 아스라한 담장을 친 듯한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은 붉은 벽돌로 된 격조 높은 근대식 건물이었다.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라고 했다. 건물 여기저기에 만국기와 함께 초록색 새마을운동 깃발이 겨울바람에 휘날렸다.

낡은 양복에 운동화를 신은 정성헌(73)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이 서둘러 기자를 안내한 곳은 ‘아사달’이라는 이름의 유기농 태양광 발전소. 반듯한 계단형 텃밭과 비닐하우스 위에 높이 올라선 태양광 패널들이 허공의 방패처럼 겨울햇빛을 받아 검게 빛났다. 장관이었다. 오랜 세월 물에 씻기고 햇볕에 바랜 노인의 백발도 빛을 받아 갈치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몸은 야위어 걸을 때마다 바지춤이 휘적거렸으나 눈빛은 형형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했던 소위 진보진영 출신이지만, 지난 3월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2014년까지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도 봉직한 바 있는데, 그 시절 차관급 예우로 제공되는 관용차와 고액 연봉을 거절하고 버스를 타고 강원도 인제와 서울을 오간 일화는 유명하다. 먼저 그것부터 물었다.


관용차와 고액 연봉을 왜 거절했나.
“차가 너무 작았다(웃음). 큰 차를 타야 오래 사는데. 적어도 버스나 기차 정도는 돼야 안심하지 않겠나. 월급을 깎은 건 내 기준이 있어서다. 중산층의 중간 소득 정도가 적당하다. 당시 중간 소득이 3000 몇 백 정도 됐는데, 내가 집이 어려우면 그 두 배 정도 받겠지만, 그 이상은 과하다. 당시에 경조사비 포함해서 한 달에 200만원 정도로 책정해 받았다.”

지금 새마을운동 회장으로는 얼마를 받나.
“중간 소득 정도 받는다. 그때보다는 조금 더 돈이 필요해서. 허허.”

정치권이나 법조계에서 떠받드는 전관예우, 관례적인 억대 연봉은 그에겐 딴 나라 이야기 같았다. 정성헌은 ‘내 기준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지금 가족이 있는 강원도를 떠나 분당의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에 있는 작은 관사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기자가 동승한 차량은 문이 고장 나, 정차할 때마다 그가 내려서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을 맡으면서 ‘근면·자조·협동’이라는 기존의 캐치프레이즈를 ‘생명·평화·공경’으로 바꿨다. 선생이 주장하는 말이 회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고 있나.
“일단 새마을운동중앙회는 48년 동안 이어진 조직이다. 긍정적인 점이 많다. 207만 명 회원 중 80% 이상이 새마을부녀회 봉사활동을 하는 여성이다. 지역과 나라에 도움 되는 일을 정말 많이 한다. 한때 중앙집권문화가 주도했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나는 이 조직을 전광석화처럼 개혁할 생각이 없다. 내 사람 데려다 바꿀 수도 있지만, 점령군식으로 하면 마음으로 동의가 안 된다. 개혁이 뭔가? ‘나는 괜찮은데 너는 틀렸어’라는 태도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개혁이 아니라 치유다. 지금은 자연도, 나도, 너도, 제도도 병들었다. 그러니 잘 살펴보고 발전시킬 건 시키고 고칠 건 같이 고치자는 거다. 3000명 정도 회원들과 직접 얘기를 나눴고 ‘생명·평화·공경’으로 가자는 데 70% 이상이 찬성했다.”

이념적인 차이는 문제가 안 되던가.
“중요한 건 문제 해결이다. 우리 사회에 보수와 진보만 있다고 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회사가 자본과 노동으로만 돼 있나. 소비자와 지역 주민, 자연도 경영에 참여해야 한다. 자본과 노동만 얘기하는 건 19~20세기 중반까지의 발상이다. 그런 면에서 난 이념이 아니라 이치를 따지는 사람이다.”

이념이 아닌 이치로 따져보면 지금 대한민국이 어떤가.
“이치에 안 맞는다. 지금은 노동 착취보다 자연 착취가 더 심각하다. 자본과 노동이 한편이 돼서 착취한다. 노동 운동이 지구 문제를 해결하나? 자본가가 온난화를 해결하냐고?”

진보진영도 쓴소리가 달갑지는 않을 텐데.
“나는 진보단체에서도 초청받고 보수단체에서도 초청받는다. 맘대로 얘기하니까 오히려 아무 데서나 막 불러댄다(웃음).”

보통은 그럴 경우 왕따를 당한다(웃음). 좌우 진영에 공통으로 하는 얘기는 뭔가.
“국가·시장·시민사회의 분류에 이제는 자연을 포함시켜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운동이든 세상을 바꾸려면 고도의 정치성과 고도의 종교성을 통합해야 할 거다. 19세기 동학운동을 보라. 농민이 주축이 되긴 했지만, 그 경전의 내용이 현재의 생태계 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운동의 흐름은 어떤가 하면, 무조건 고소·고발이다(웃음).”

방법론적으로 뭐가 문제인가. 다들 더 좋은 세상을 꿈꾸며 달려가지 않나.
“내가 보기엔 세상을 바꾸려는 선의가 아니라 덜 썩게 하려는 정도다. 운동의 주체가 일반 시민이 돼야 하는데 죄다 법조인·교수다. 우리 운동이 고소·고발 중심이 된 게 20년은 됐다. 잘못된 걸 고치려고 법에 호소하는 건 맞지만,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다. 변호사 중심의 운동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결국 후퇴한다. 법에 의존하면 내부 민주주의가 확산되지 않거든.”

어찌됐든 인권은 신장하고 있지 않나.
“글쎄. 요즘엔 초등학생이 운동장에서 무릎이 깨져도 학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하지 않나. 안전교육 안 했다고 비싼 변호사 사서 따진다. 너무 법 좋아해도 삭막해진다. 법에 의존하는 건 진취적이지 않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깨지면 결국 아이가 망가진다. 정말 인권을 보장하고 싶으면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서 공경 운동을 말한 건가. 하지만 요즘엔 ‘공경’보다는 ‘존중과 공감’이 대세다.
“어른을 공경하자는 뜻의 한 방향 말이 아니다. 자기를 좀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자는 거다. 욕먹을 각오로 얘기하면, ‘미투’ 문제도 폭로와 대결로 가면 피해자인 여성들이 더 많이 다친다. 남혐(남자 혐오), 여혐(여자 혐오)으로 다투다 보면, 결국 그것도 고소·고발로 간다. 큰소리가 잦아들면 못난 놈들이 대번에 변호사를 사서 법정 싸움으로 가거든. 법은 공명정대하지 않아서 못난 놈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오고 피해자는 절망한다. 그래서 한 놈 단죄하는 것보다 남성이 부끄러움을 갖도록 자각시키는 게 중요하다는 거다.”

‘못난 놈’이라는 말 앞에서 목소리가 한껏 격앙됐다. 예민한 주제라 격론이 있었으나, 부끄러움을 깨우치도록 더 높은 가치를 제안해야 한다는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해답은 교육이라는 말로 이야기가 수렴됐다.

육체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정성헌 회장은 새마을운동중앙회에 와서 가장 먼저 밭을 가꿨다. 사진 고운호 객원기자
육체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정성헌 회장은 새마을운동중앙회에 와서 가장 먼저 밭을 가꿨다. 사진 고운호 객원기자

교육 개혁이 아니라, 개벽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대체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난 쉽게 기본만 따진다. 지금 가정은 물론 공교육과 사교육이 다 몸을 억압하는 교육이다. 좋은 밥 먹고 운동해야 하는데, 맛있는 것 먹고 움직이질 않지 않나. 초등학교 6학년이면 하루 활동량이 2만 보는 돼야 한다. 몸이 비정상이면 성격이 나빠진다. 그래서 첫째가 몸이 튼튼한 교육, 둘째가 좋은 마음을 가르치는 교육이 돼야 한다. 좋은 마음은 좋은 말에서 나오니 말 교육을 바로 해야 한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사는 존재이니 국어와 역사·지리를 쉽고 바른말로 배워야 할 테고. 마지막은 일해서 먹고사는 이치를 가르쳐야 한다. 육체노동의 가치를 배워야 허튼 생각을 안 한다.”

그는 국회의사당 마당도 3분의 1은 밭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국회의원이 농사지은 채소로 여의도 주민 초대해서 밥해 먹이라는 거야. 그래야 정치인들이 정화가 돼. 생활의 가치를 아는 거지.” 그가 새마을운동중앙회에 와서 가장 처음 한 일은 밭을 가꾸는 일이었다. 흙을 갈아 엎어 파·양파·감자 등 작물을 심고 농사를 가르치자 직원들이 신이 나서 경쟁하듯 밭을 가꿨다.

얼마 전 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 자격으로 평양과 개성에 나무 심기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공표했다. 모든 문제를 땅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모습에서 한편으로는 치열한 땅에서 조금 떠 있는 듯한, 이상주의적인 면모가 느껴진다.
“절대 아니다.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다. 사람이 사는 데 중요한 게 뭔가. 공기·물·밥이다. 온실가스와 산업 폐기물 때문에 공기와 물과 땅이 망가지고 있잖나. 땅을 살리는 건 굉장히 현실적인 일이다. 이 상태로 가면 50년 후엔 농작물 소출이 불가능해진다. 사람이 알약만 먹고살 순 없잖나. 땅과 물과 하늘을 중심으로 하는 생명 운동은 아주 현실적인 어젠다다.”

북한에는 어떤 나무를 심을 계획인가.
“헐벗은 곳엔 빨리 자라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 그다음엔 식물성 기름과 연료가 될 나무를 심어야 하고. 한반도에 기름 짜는 나무가 50종이니, 이북 애들하고 충분히 의논을 해봐야지. 기름·식량·약용으로 면밀히 연구해서 갈 거다. 새마을운동 회장 맡으면서 내가 주장하는 말이 ‘빨리 말고 제대로’다.”

여전히 관료들은 ‘제대로’보다 ‘빨리’를 앞세우는 문화인데.
“공을 세우고 먼저 하려는 태도는 좋지 않다. 천천히 해도 된다. 북한 애들도 금방 안다. 여기서 제대로 하려고 하면, 자세도 대우도 확 달라진다.”

모든 이치를 누구에게 배웠나.
“어머니다. 99세에 돌아가셨다. 나는 강원도 춘천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당시엔 가난해서 자식들이 밥보다 욕을 더 많이 먹었는데, 내 어머니는 ‘이 자식아!’ 소리도 한 번 내뱉은 적이 없다. 뭘 하지 말라는 소리도 안 했다. 내가 열아홉에 처음 구속됐는데, 한 번 면회 오시곤 일절 안 오셨다. 천주교 신자셨는데 돌아가신 후 어느 날 일기를 봤더니, 깨알같이 민주주의·통일을 위해 매일 혼자 기도하셨더라. 7년간 앓다 가셨는데 아내가 그랬다. ‘나는 어머니 인품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간다’고. 공부 많이 한 거랑 인품은 다르다는 걸 어머니를 보고 알았다.”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고개를 갸웃하며) 잘 모르겠다. 똑똑한 사람은 아니다. 훌륭한 사람도 아닌 것 같다. 그저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게 전부다. 허허.”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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