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권 시인의 살아 생전 모습. 사진 조선일보 DB
조정권 시인의 살아 생전 모습. 사진 조선일보 DB

삶이라는 책
조정권 지음|파란|234쪽|1만5000원

조정권(1949~2017) 시인 1주기를 맞아 유고 시집이 나왔다. 조정권은 1970년 등단 이후 2014년까지 10권의 시집을 냈다. 서정시의 전통 계승과 혁신을 골고루 추구한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여러 평론가로부터 ‘정신주의 시’의 시인으로 불렸다. 시라고 하는 게 무릇 인간의 정신활동인데, 조정권이 유난히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은 평소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때문이다. 그는 언어를 활용해 미학의 통합을 시도했고, 궁극적으로 예술을 통한 인간 정신의 고양(高揚)을 두드러지게 추구했다.

조정권은 특히 ‘산정(山頂)의 시인’으로 불렸다. 그는 30편의 연작시로 구성된 시집 ‘산정묘지’로 숭고한 정신의 서정시를 웅장한 필력으로 빚어냈다.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라며 시작하는 시를 통해 고고하고 청정한 정신을 노래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요즘처럼 결빙의 계절에 읽기 좋은 시집이다. 프랑스어로 번역돼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조정권의 시는 수직적이다’라며 “신이 있고 자아에 대한 인식이 가능할 수 있는 저 높은 곳을 향해 오르는 것과 너무 높고 어렵기 때문에 다시 내려가는 이중적 움직임 속에 시는 위치한다”라고 소개했다.

조정권의 유고 시집은 투병 중 쓴 시편들을 꽤 많이 수록하고 있다. “겨울 산 힘 뺀/ 마른 나무가 간직한 노래/ 귀 기울여 듣다가 듣다가/ 잎 다 땅에 돌려주고/ 난 이 음악을 끄네/ 저/ 힘 뺀 아다지오/ 겨울/ 바람소리”라며 삶의 마감을 예감한 음성을 뚜렷이 들려준다.

시인은 병원에 입원하던 중 옥상에 바람을 쐬러 갔다가 40년 넘게 시를 쓰며 산 생애를 새벽이슬에 비유했다. “고요히 잠겨 있던 내 귀에/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방금 사라진 이슬의 침묵 소리// 나는 침묵 그 소리를 시에 담아 들고 오다가/ 떨어뜨렸다”라는 것.

시 ‘먼저 간다’는 미리 쓴 이별의 노래였다. “고목 가지 위/ 너무 높아 끝만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꼭대기/고목 가지 위에 고요의 흰 잎사귀 큰 잎을 못 읽었는데/ 그 높은 고요 꼭대기에서 어떤 잎이/ 가을 하늘/ 고요히 마당에 투신하더라/ 무슨 뜻일까”.


산 정상을 좋아했던 시인

시인은 말년에도 여전히 ‘산정’의 이미지를 탐구하는 노래를 지었다. “바위 꼭대기에 섰으니 석간송이고/ 누워있으니 와송이고/ 하늘을 바라보니 망천송이네”라며 시작한 시 ‘산정에서’는 “눈을 이고 있으니 설송이고/ 눈을 이고도 견강하니 강송/ 그러고도 무심히 세상을 향해 팔을 뻗고 있으니/ 관음송 아닌가”라며 끝난다. ‘송’을 중심으로 구성된 운율에 따라 낭송하거나 암송하라고 쓴 시처럼 읽힌다.

일본 하이쿠처럼 극도로 간결한 시편도 유고 시집에 들어있다. “저곳은 혼자 어떤 사람이 한없이 걸어가 본 들판 같은 곳이었습니다”라는 한 줄 시편의 제목은 ‘노을’이다. 그 저물 녘이 온 세상을 물들이듯 시인이 말년에 남긴 언어 역시 소리 없이 독자의 가슴에 배어들 듯하다. 또 다른 짧은 시 ‘별’도 남다른 울림을 낳는다. “잉크 한 방울이/ 북극 하늘에 거주하시나 보다”라는 구절이다. 시인이 연작시 ‘산정묘지’에서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라고 노래한 것이 절로 생각난다.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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