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서 주인공 한시현(김혜수·가운데)은 무너지는 경제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한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속에서 주인공 한시현(김혜수·가운데)은 무너지는 경제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한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국가 부도의 날’은 게으른 영화다. 사실관계에 대한 고증이 부족하거나 팩트체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이 영화가 게으른 이유는 선과 악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1997년 한국 경제는 위기에 빠졌다.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대기업의 방만한 차입 경영에 과도한 경상수지 적자가 이어졌고, 경제의 리스크(위험 요인)를 분산해야 할 금융 시스템은 오히려 기업과 가계에 무분별하게 신용을 제공하며 리스크를 키우기만 했다.

때마침 태국,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했고 홍콩, 대만을 거쳐 한국에까지 위기가 전파됐다. 한국 경제가 자립하기 힘들다고 본 해외 투자자는 한국 시장에서 한꺼번에 돈을 뺐고, 대기업·중소기업·은행까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결국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고 그 대가로 경제 체질을 바꾸기 위한 혹독한 구조조정을 진행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실직, 파산 등으로 고통받은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은 IMF 구제금융을 받기 직전의 상황을 돌아본다. 위기 상황을 감지한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원인을 따지고 묻는다. 지금껏 한국 영화계에서 보지 못한 시도다. 이 영화에 붙는 ‘경제 스릴러’라는 표현부터가 새롭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미국 금융 중심지인 월가의 속사정을 다룬 영화 ‘빅쇼트’에 대해 “한국 영화에서 가장 찾기 힘든 종류의 재능”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개봉 전까지만 해도 ‘국가 부도의 날’은 이런 세간의 평가에 대한 당찬 도전처럼 보였다. 딱 개봉하기 전까지만 말이다.


너무 명확해 현실성 떨어지는 선악 구분

‘국가 부도의 날’의 고증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고증을 해놓고 일부러 사실과 반대로 영화를 만들었나 싶을 정도니 말 다했다. 영화 속 장면이 IMF 외환위기 당시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이미 팩트체크를 한 기사가 많으니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어떻게 보면 이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며 일축하면 될 일이니까.

사실관계에 대한 오류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던 부분은 선과 악에 대한 이 영화의 게으른 태도였다. ‘국가 부도의 날’은 근래 본 어떤 영화보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했다. 재정국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고위 관료 집단과 대기업, 미국 그리고 IMF까지를 영화는 악의 세력으로 지목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한시현(김혜수)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재정국 차관(조우진)은 그야말로 부당·부정·불의의 총집합체처럼 보인다. 건방진 눈빛과 껄렁한 태도, 아랫사람에 대한 폭언과 빈정거림, 여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까지. 영화를 보다 보면 저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악랄하다.

그 반대편에 악의 세력에 맞서는 선한 사람이 있다. 도대체 어쩌다 한국은행이 선한 사람의 근거지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으로 등장하는 한시현과 그 팀원은 어떻게든 무너지는 경제를 살려보려고 애쓴다. 한편으로는 재정국 차관과 싸우고 다른 한편에서는 IMF 협상단과 맞서면서 말이다. 그리고 IMF 사태로 가정이 무너지고 삶이 고단해진 서민이 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갑수와 그의 가족이 그렇다.

영화가 진행되는 두 시간 내내 악한 사람은 시종일관 악하고 선한 사람은 시종일관 선하다. 만화에서도 이런 식으로 이분법적인 선악 구분을 하지는 않는다. 일본 애니메이션인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악당들인 로켓단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일지언정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한 명 한 명의 사람이다(물론 고양이 한 마리도 빼놓을 수 없다).

‘국가 부도의 날’은 선과 악 사이에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어놓고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악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게끔 한다. IMF 외환위기를 직접 몸으로 겪은 사람은 이 영화를 보고 분노하고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지금껏 이렇게 쉽고 간명하게 “이 사람이 나쁜 놈입니다. 이 사람들이 잘못했습니다”라고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사람들이 손쉽게 욕할 수 있도록 악인으로 묘사한 이들에게서 이름마저 지워버렸다. 이 영화에서 경제를 망가뜨리고 서민을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사람은 하나같이 이름이 없다. 재정국 차관, 금융실장, 경제수석, 새 경제수석같이 직책으로만 불릴 뿐이다. 이름이 소거된 악당에게 돌을 던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로지 사람을 분노하게만 해

영화의 목적이 사람을 화나게 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성공이다. 하지만 21년 전의 환란을 지금 이 시점에 소환한 게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위기는 재발한다’는 명제에서 이 영화를 만든 이유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영화 말미에 가계 부채 문제를 언급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위기가 재발할 수 있으니 경계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 부도의 날’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인가. 그건 선과 악에 대한 이 영화의 게으른 태도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선과 악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는 서사는 선과 악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선한 우리는 악해질 수가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 영화를 보는 거의 모든 관객은 자신을 선의 편에 둘 것이다. 그리고 안심할 것이다. 21년 전 위기를 불러온 악의 세력을 밝혀냈으니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위기는 우리가 돌멩이를 던지는 악의 세력에서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위기는 언제나 선과 악의 피아 구분이 모호한 지점에서 시작된다. 달과 해가 공존하는 동틀 녘이 하루 중 가장 추운 것처럼 말이다. ‘국가 부도의 날’이 말해주지 않는 진실이 여기에 있다. 팩트나 사실관계는 100개가 틀려도 된다. 하지만 우리는 무조건 선하고 그들은 무조건 악하다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는 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 영화의 게으름에 화가 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말을 곱씹어 보자.

“진정으로 윤리적인 태도는, 선의 기반이 사실상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악의 본질이 보기보다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선의 악’과 ‘악의 선’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태도일 것이다.”


이 영화엔 이 술

일품진로 1924

IMF 외환위기는 많은 기업을 사라지게 했다. 중소기업뿐 아니라 아직까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굵직한 대기업도 여럿 문을 닫았다. 그중 하나가 지금도 소주의 대명사 같은 진로를 주력으로 한 진로그룹이다. 1924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진천양주상회로 시작한 진로그룹은 한때 재계 서열 2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무리한 사세 확장 탓에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해체됐고, 지금은 주류 업계 여기저기에 진로라는 이름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위기가 찾아오기 직전인 1996년 진로그룹은 ‘참나무통 맑은소주’를 출시했다. 고급 소주 시장을 겨냥하고 야심 차게 내놓은 증류식 소주였다. 이 소주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이듬해 외환위기의 여파로 판매가 급감했고 결국 판매가 중단됐다. 이후 진로를 인수한 하이트진로는 참나무통 맑은소주를 리뉴얼한 일품진로를 출시했다. 일품진로는 초기에 판매가 부진했지만 결국 반등에 성공했다. 일품진로 1924는 하이트진로가 2014년 창립 90주년 기념주로 출시했던 ‘진로 1924’를 재출시한 술이다. IMF로 쓰러진 진로그룹의 역사가 담긴 이 술을 한잔 마시며 저마다 할 말 많을 IMF 시기를 곱씹어 보는 건 어떨까.

이종현 조선비즈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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