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 본사에서 문정희(가운데)와 시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김현자(왼쪽), 그 시집을펴낸 브뤼노 두세(오른쪽) 세 사람이 대화하고 있다. 사진 오종찬 기자
10월 22일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 본사에서 문정희(가운데)와 시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김현자(왼쪽), 그 시집을펴낸 브뤼노 두세(오른쪽) 세 사람이 대화하고 있다. 사진 오종찬 기자

지금 장미를 따라
문정희 지음|민음사|1만3000원|324쪽

한국적 여성의 삶을 노래해 온 문정희(71) 시인이 프랑스에서 낸 시집 ‘찬밥을 먹던 사람(Celle qui mangeait le riz froid)’이 최근 재판을 찍었다. 문 시인이 40여년간 펴낸 13권의 시집 중 대표작을 골라 엮은 시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를 주로 불역한 시집이다.

프랑스는 유럽 시문학의 새 지평을 연 시인들을 숱하게 배출했기에 문화 교육 차원에서 시인을 대접한다. 하지만 실제 출판 시장에서 판매 측면으로만 따진다면 시인의 위상은 한국에 비해 열악하다. 한국의 유명 문학출판사들은 시인에게 인세를 주고 경쟁적으로 시집 총서를 내고 있고, 시집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프랑스에선 대부분 시인이 자비로 시집을 내고, 평균 700~800부 찍는다. 대형 서점엔 동시대 시인의 시집 코너가 없다. 시인들은 낭독회를 열어 독자에게 시집을 판다.

문정희 시집은 2012년 초판 1200부 찍은 게 다 팔려서 최근 2쇄 800부를 더 찍었다고 한다. 문정희 시집을 출간한 프랑스 시인 브뤼노 두세는 “프랑스에선 시집 2쇄를 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공”이라며 “문 시인은 프랑스 라디오 방송이나 대중 낭독회에서 특히 젊은 여성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받았다”고 전했다.

프랑스 독자들 사이에 인기가 좋은 문정희 시를 알아본 뒤 우리말 시집을 뒤져봤다. 우선 부엌을 배경으로 여성의 왜소한 삶을 기괴하게 그린 시가 주목을 받았다. 시 ‘작은 부엌의 노래’가 대표적이다.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 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가는 냄새/(중략)/부엌에 서서/ 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 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나요”


풍자와 해학으로 사회적 메시지

여성이 고교 졸업 후 사회에서 사라지는 현실을 지적한 시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역시 프랑스 젊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었다고 한다. 문정희 시집은 평범한 여성의 일상을 다루면서 사회적 메시지도 던지는데, 풍자와 해학이 담긴 발상의 전환으로 시적(詩的) 이야기를 빚어내기 때문에 평이하면서도 재미있게 읽힌다는 것.

시 ‘찬밥’은 프랑스어로 번역되면서 ‘찬밥을 먹던 사람’으로 변형됐지만, 그로 인해 구체적 인물과 행동을 떠올리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한다.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는 사람”이라고 시작하는 시는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라며 끝난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한국적 어머니의 초상을 그렸지만, 프랑스에서도 모성의 삶은 부엌에 갇혀있기 때문에 ‘뜨거운 밥’이 아닌 ‘찬밥’을 홀로 먹는 사람의 이미지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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