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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 하이원슬로프에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 사진 이우석

봄은 언 땅을 녹이고 땡볕은 늙은 봄을 고사시킨다. 어느덧 에어컨을 켜는 데 망설임이 없어졌다.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가 어딘가 숨어 있을 마지막 봄을 찾아 떠났다. 아마도 태백이나 정선 정도에 숨어 있지 않을까? 해발 500~1000m 고원에 2018년 봄이 은둔해 있단 소릴 어디선가 들었다.

인디애나존스 박사처럼 떠나가는 봄을 추격하는 6월의 여행지로 딱이다. 봄처녀는 야생화 옷자락 길게 드리운 채 뒷모습만 보이고 있다. 서둘러야 한다. 놓치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자연은 어김없다. 계절이 저물고 돌아오는 이치란 한치도 그릇됨이 없다. 아주 늦게 찾아온 태백고원 금대봉(해발 1418m)은 야생화 천지다. ‘하늘 아래 첫 정원’은 천금을 쏟아부은 외국의 화려한 왕가의 화원과는 느낌이 다르다. 새끼손톱만 한 꽃들부터 아기 주먹만 한 꽃망울이 길가에 융단을 깔아놓았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그리 고울 수가 없다.

이른 아침 길을 나서면 안개까지 피어올라 몽환적인 분위를 연출한다. 완연한 봄, 신록의 숲 속에서 한껏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비밀의 정원을 찾아가는 여행은 여태껏 즐겼던 ‘꽃놀이’와는 또 다른 감동으로 남는다.

출발 지점이 해발 1000m가 훌쩍 넘으니 그야말로 ‘하늘 정원’이다. 강원도 태백시 대덕산 금대봉에는 매년 5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 오색의 야생화들이 정원을 이룬다. 평지에선 보기 힘든 고산식물로 저마다 재미난 이름과 사연을 지니고 있다.

두문동재로부터 시작하는 산길을 걸으면 금세 금대봉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발길을 붙드는 야생화들의 매력에 날 저무는 줄 모른다. 두문동재~금대봉~용연동굴은 3시간이 걸리는 코스이지만 꽃구경을 하다 보면 보통 4시간이 넘게 걸린다. 구불구불한 S자 산행로 가에는 고운 보라색의 얼레지꽃, 흰 태백제비꽃, 샛노란 양지꽃, 보랏빛 나팔 모양 현호색, 하얀 별 모양 별꽃, 흰색과 노란색의 앙상블이 아름다운 멸종위기종 노랑무늬붓꽃, 개불알꽃, 산괴불주머니 등 이름도 생소한 산꽃들이 손님맞이 중이다.

5월 중순까지는 한계령풀, 금강제비꽃, 나도바람꽃, 덩굴용담 등 태백의 토착 식물을 만날 수 있다.

오르는 도중 만나는 두 곳의 헬리콥터 착륙장도 정원으로 변해 있다. “이 꽃이름이 뭐더라…” 사람도 그렇지만 꽃을 만나서 정작 이름을 모르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산행의 재미도 덜하다. 그래서 미리 공부를 하든지 야생화 도감을 챙겨가면 좋다.

금대봉 정상에 오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상쾌한 공기가 백두대간 너머로 밀려온다. 백두대간 준령들이 360도 펼쳐지는 정상에서 잠시 쉬었다가 내려오는 길엔 또 다른 비밀의 화원이 기다리고 있다.

금대봉에 가려면 미리 예약해야 한다. 태백산국립공원사무소는 9월 말까지 태백산 내 대덕산~금대봉 구간을 한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탐방예약제를 운영 중이다.

탐방예약제는 사전에 예약한 인원으로 제한하는 방식이다. 생태자원의 피로도를 낮추고 탐방객들도 쾌적한 환경에서 자연을 둘러볼 수 있다. 방문 3~30일 전 오후 5시까지 국립공원 예약통합 시스템(https://reservation.knps.or.kr)을 통해 예약할 수 있다. 자연환경해설사와 동행하는 ‘꽃 바닷길, 금대봉 해설 프로그램’도 좋다.

정선 백운산(1345m)에도 야생화들이 아름답게 무리 지어 피어난다. 6월 중순부터다. 겨우내 스키어들로 북적였을 초여름의 스키장. 눈 대신 신록이 깔린 산등성이 슬로프를 따라 수염패랭이, 하얀색 데이지, 붉은 루핀, 벌노랑이 떼가 색색비단처럼 펼쳐진다. 누군가 가꿔놓은 평지의 화원보다 고원 야생화(비록 빈 슬로프에 야생화 씨를 뿌리듯 심어놓은 것이지만)가 더욱 보기 좋은 이유는 언뜻 무질서해 보이는 모습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백운산 인근 자생식물  600여 종 서식

좀 더 지나 6월 하순이면 만항재 정상도 화원이 된다. 3개 시·군(태백시·영월군·정선군)이 만나는 만항재 정상은 늘 이때쯤 하늘정원으로 불린다. 정상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2~3시간은 쉬다 갈 수 있는 하얀 야생화 꽃밭이 펼쳐진다.

정선과 태백은 숲이 내뿜는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이다. 꽃으로 눈과 마음을 채웠다면 숲으로부터 몸을 보하는 기운까지 얻어갈 수 있다. 그저 걷거나 앉아서 쉬는 것만으로도 절로 휴식이 된다.

식물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백운산 인근 고원지대에는 약 600여 종의 자생식물이 살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지리산 지역에 약 1200종의 식물이 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규모의 수목원이 아닐 수 없다.

숲은 이미 노령기로 접어든 상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숲의 기운이 묻어난다. 생명의 숲은 휴가차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도 강인한 기운을 나눠준다. 도시의 삶 속에서 숨 가쁘도록 뛰어만 다녔던 도시 여행객들에게 상큼한 박하향 호흡을 권하고 있다.

쏟아지는 피톤치드의 소독효과까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코끝으로 파고드는 상쾌함은 비닐봉지라도 펴서 싸오고 싶을 정도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5년째 여행·맛집 전문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둘러 볼 만한 곳
태백고원자연휴양림도 산행길과 트래킹 코스가 멋지다. 융단처럼 폭신폭신한 길을 따라 오르는 3시간짜리 코스는 여행객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MTB(산악자전거)를 즐기는 이들도 종종 눈에 띈다. ‘바람의 언덕’이라 불리는 매봉산 태백풍력발전단지도 좋다. 가파른 비탈의 배추밭 꼭대기 능선에 자리했다.

정선 노추산의 비경과 송천계곡, 오장폭포 등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철로 위를 달리는 레일바이크는 최근 최고 히트 상품. 2·4인용 2종의 바이크를 이용해 구절리역~아우라지역(7.2㎞) 구간을 시속 10~30㎞로 주행한다.

맛집
태백은 고원에서 자란 한우로 유명하다. 곳곳에서 질 좋은 한우고기를 맛볼 수 있다. 태백한우골은 정육식당처럼 태백 한우 쇠고기를 바로 발라내어 내는 집. 육즙이 풍부한 고기맛이 일품이며 나중에 내오는 된장도 입맛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국물이 많아 마치 전골처럼 보이는 태백 닭갈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먹을거리. 태백시에는 닭갈비 명소가 몇 군데 있는데 중앙로 김서방네닭갈비는 20년째 태백닭갈비를 고집하고 있는 곳이다. 두툼한 다리살과 가슴살 등 푸짐하게 한솥 끓여낸다. 값싸고 다양한 사리(떡·라면 등)를 넣어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033)553-6378.

 

이우석 스포츠서울 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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