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 기사단이 2005년 몰타에서 16세기 군사 훈련을 재연하고 있다. <사진 : 위키피디아>

1565년 5월 18일 3만명의 병사를 태운 오스만 함대가 몰타에 상륙했다. 오스만의 최정예인 예니체리도 7000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공격 목표는 오스만의 숙적인 몰타 기사단이었다. 몰타에는 3개의 성채가 있었는데, 오스만 군대는 즉시 땅에 포대를 설치하고, 포대 주변으로 도로와 방어벽을 둘러 강력한 육상 진지를 구축했다. 몰타 기사단의 병력은 기사 500명, 스페인군 1300명, 선원 4000명 그리고 몰타 주민이었다. 오스만과 몰타 기사단은 벌써 300년째 싸워오고 있었다. 오스만의 술탄 술레이만 대제는 이 긴 악연을 이번에는 반드시 끝내겠다는 각오였다.

몰타 기사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력한 전투력과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다. 16세기의 바다는 잔혹했다. 이때의 상선은 유럽, 오스만을 가릴 것 없이 반은 해적이거나 언제나 해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상태였다. 선원들은 무장했고, 공격이든 방어든 전투를 벌일 각오가 돼 있어야 했다. 패배하면 노예로 팔리거나 산 채로 바다에 던져졌다. 몰타 기사단은 무장상선 정도는 10 대 1, 20 대 1의 전투력으로 제압했다. 정규군과 맞붙어도 그 정도 승리를 거두곤 했다. 전투는 상황에 좌우되므로 이들도 패할 때가 있었지만, 작심하고 붙으면 비슷한 전력에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 자신감과 모험심에 충만한 이들은 소수의 전대로 겁 없이 지중해를 왕래하며 오스만 선박을 약탈하고, 해안 마을과 섬을 습격했다. 오스만인들은 몰타 기사단의 근거지를 뱀 소굴이라고 부르며 혐오했는데, 이 뱀이 보통 강력한 뱀이 아니었다.

이들의 전투력과 모험심의 근원을 종교적 신앙심에서 찾기도 하고, 탐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사실 십자군 시대의 종교적 정열은 퇴색된 지 오래였다. 오스만의 상선에는 유럽인 선장이나 항해사도 많았다. 반면 탐욕은 너무 근원적이다. 인간은 모두 탐욕을 가지고 있지만, 탐욕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목숨을 걸고 성벽에 달려들거나 미지의 세계로 항해해 나가지 않는다.


기사회 조직해 구성원 간 갈등 조정

탐욕이든 정열이든 그것이 조직화되고 실체화되기 위해서는 합당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몰타 기사단은 독특한 조직과 구성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기사단은 다국적군이었는데, 상층조직은 기사단장과 원로원 비슷한 기사회로 구성됐다. 기사들은 본국에서 인정받는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구성원 간에 갈등이 생기면 기사회에서 조정하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절대적이었고, 그만큼 공정하게 운영하고 신뢰를 얻어야 했다. 기사단은 출동할 때나 방어할 때나 국적별로 편성해서 움직였다. 구성원 간에 갈등이 생기거나 약탈물의 분배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을 때 불공정한 판결을 하면 이 갈등은 즉시 국가 간의 갈등으로 비화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복무하던 기사 중에는 고국으로 돌아가 고위직에 오른 사람도 많았다. 몰타 기사단에 이것은 다국적 인맥, 네트워크로 작용해서 개인에게나 기사단에 상당한 영예와 이익이 됐다. 그래서 이들은 더더욱 기사단에서 명성을 얻으려고 했고, 규율과 전통·명예를 고수하려고 했다. 이런 분위기가 지도층의 용기·솔선수범·신뢰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 중에서 선발되는 기사단장은 깊은 존경을 받았고, 오스만의 침공 같은 위기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기사단의 전투력이 강력하다고 해도 1565년의 대결은 병력과 화력에서 절대적 열세였다. 오스만은 거대한 청동대포와 10만발의 포탄을 가져왔다. 성벽을 향해 끊임없는 포격을 가했다. 집요한 공격으로 마침내 성 엘모가 함락되고 수비대는 전멸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나중에 오스만군의 실수로 밝혀진다. 성 엘모는 전초기지였다. 그보다는 본성인 성 미카엘에 공격을 집중해야 했다. 왜냐하면 스페인과 베네치아, 교황군이 주축이 된 구원함대가 결성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기사단이 이처럼 강력하게 저항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오스만군은 성 엘모를 구하기 위해 나머지 병력이 출동할 것을 예상했을 수도 있는데, 기사단장 라발렛은 단호하고 냉정했다. 성 엘모의 수비대가 지원을 요청하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병력이 없다. 어떤 성이든 스스로 지키고 죽을 때까지 싸운다.”

성 엘모가 함락되자 비로소 성 미카엘에 공격이 집중됐다. 마침내 성벽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틈이 생겼다. 60대 노인이었던 기사단장은 스스로 창을 들고 기사들의 선봉에 서서 방어에 나섰다.

그래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됐을 때, 연합함대가 등장했다. 이미 절반 이상의 병력을 상실한 오스만군은 구원함대를 보고 즉시 철수했다. 이것이 마지막 대전이었다. 그 이후 오스만은 몰타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성장하려는 조직원의 노력과 희망

몰타 공방전에서 기사단의 전술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라발렛의 냉정한 전술은 곧잘 사기를 떨어뜨리고 내부 분열을 야기한다. 기사단처럼 다국적군에 주민까지 합세한 부대는 더욱이 위험하다. 그럼에도 기사단은 강력한 단결력을 유지했고, 최후까지 사기를 잃지 않았다. 몰타 기사단의 병사들은 강력한 규율을 받아들이고, 늘 실전을 경험하며 언제나 소수로 다수를 상대하고, 패전하면 피할 곳이 없는 전투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리고 능력을 발휘하면 보상과 신분 상승의 길도 확실했다.

모든 기업은 헌신적이고, 진취적인 구성원을 원한다. 그러나 진취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내기는 쉽지 않다. 인재 선발을 엄격하게 하거나 스펙이 뛰어난 인재로 채운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한때는 성과급을 최선의 수단으로 생각했지만 그리고 성과급이 어느 정도 기능을 하기는 하지만, 전부가 될 수는 없다. 헨리 포드는 자동화된 생산관리와 높은 보수, 성과급으로 포드자동차를 혁신적인 기업으로 키웠고, 포드이즘이란 개념까지 탄생시켰다. 그런데 포드이즘의 성공에서 간과되는 요소가 있다. 20세기 대중민주주의와 산업화가 만들어 준 강력한 성장욕구, 신분과 가문, 고학력이 아니어도 개인의 노력과 노동에 의해서 삶의 질을 크게 바꿀 수도 있다는 희망이다. 더욱이 자동차는 이런 희망의 아이콘 같은 존재였다.

우리 사회뿐 아니라 온 세계가 잃어버린 것이 이것이다. 정보기술(IT), 첨단기술이 주는 삶의 변화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개개인이 그곳에 도달할 수단은 제시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분노와 좌절로 나타난다. 임금 인상과 복지도 잠깐의 희망을 줄 수 있지만 진정한 연결고리가 되지는 못한다. 개인 기업에 세계가 공감할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를 인지한다면 기업의 분위기에 맞는 다양한 방식을 모색할 수는 있다. 몰타 기사단의 방식도 세계가 채용할 수 있는 표준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그들의 역사·전통·목표에 맞는 대안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적어도 몰타 기사단에는 수백년간 유용했다. 몰타 기사단은 지금도 로마에 근거지를 두고 존속하고 있다.


▒ 임용한
경희대 대학원 사학 박사, 경희대·공군사관학교 한국사·군제사 강사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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