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정신과 단돈 40달러의 이민자 38년 후 캐나다 기업인 명예의 전당에 올라



“나는 운을 믿는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 사람에겐 운이 더 쏟아진다고 믿는다” 프랭크 스트로나크(73) 마그나그룹(Magna International Inc.) 회장은 최근 캐나다의 국영 방송인 CBC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51년 전 캐나다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수중에 단돈 40달러뿐이었던 평범한 이민자 스트로나크 회장이 자신의 성공 비결을 이렇게 요약한 것이다.





 고난 근면성과 승부 근성, 그리고 그가 언급한 운이 합쳐지면서 스트로나크 회장은 반세기만에 전세계에 종업원 8만여명을 두고 2004년말 현재 매출액 206억달러(약 20조원), 순익 6억9200만달러(약 7000억원)의 실적을 올린 다국적기업의 최고경영자로 변신했다. 50여년 전 시간당 1달러 미만의 임금을 받으며 접시를 닦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 청년은 이제 한 시간에 5000달러(약 500만원)를 버는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캐나다의 경제주간지 <캐너디언 비즈니스>가 추정한 그의 재산은 2004년말 현재 약 7억2300만달러(약 8000억원)다.

 프랭크 스트로나크 회장이 세우고 발전시킨 마그나그룹은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포함겮㉬횁플라스틱 차체겿均?등 자동차의 거의 모든 주요 부품 및 외장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창업 40여년만인 지난 2000년에는 경마와 카지노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마그나엔터테인먼트(Magna Entertainment Corp.; MEC)를 설립, 레저산업에도 진출했다.

 그가 일군 마그나는 생산 제품의 70% 이상을 이른바 ‘빅3 자동차 메이커’, 즉 제너럴모터스(GM)·포드·다임러 크라이슬러 등에 납품하는 한편 폴크스바겐·BMW 등 유럽의 자동차 제조업체에도 유럽 자회사를 통해 일부 공급한다. 또 북미를 포함, 전세계 22개국에 215개의 공장과 48개의 연구소 등을 두고 있다. 마그나그룹은 한국에도 진출, 지난 2003년 5월 동광기연과 합작으로 자동차 시트 제조업체인 ‘DK인테리어’를 설립했으며, 이에 앞서 1997년 한화기계를 인수해 ‘HAC’라는 부품업체도 출범시켰다.

 미국의 경제 격주간지 <포브스>는 지난 2002년 기사에서 프랭크 스트로나크 회장을 ‘자동차 부품업계의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으로 마그나그룹을 범세계적인 자동차 부품산업의 발전소로 만든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캐나다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유명한 그는 ‘꼼꼼하게 장단기 계획을 세우는’ 지장(智將)이라기보다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도전과 응전’형 맹장(猛將)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프랭크 스트로나크 회장은 평생의 업적을 인정받아 지난 1995년 ‘캐나다 기업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영예를 얻었다. 또한 1999년 캐나다 정부가 주는 ‘자랑스런 캐너디언(Order of Canada)’에 뽑힌 데 이어 2000년에는 ‘캐나다 창업가 평생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공구 제조업에서 자동차 부품업으로 눈돌려

 프랭크 스트로나크는 1932년 오스트리아 알프스산맥의 바이츠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이츠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변신한 영화배우 아놀드 슈워츠제네거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을 2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낸 그는 14세 때 학교도 그만두고 기술자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수력 발전 설비를 생산하던 엘린사에 들어간 소년 프랭크는 타고난 손재주로 기술도 빨리 습득했지만 발군의 축구 실력을 발휘, 한 구단으로부터 축구선수 영입을 제의받기도 한다.

 하지만 2차대전으로 피폐해진 유럽을 한시바삐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한 그는 22세가 되던 1954년 조국을 떠나 ‘무작정 상경’ 하듯 20시간 이상 걸리는 여객선을 타고 캐나다 몬트리올에 도착한다. 언제 돌아갈지 기약도 없이 편도 승선권만 끊었던 길이었다. 일자리를 찾으러 온타리오주 키치너라는 작은 도시까지 흘러 들어간 그에게 떨어진 일은 병원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일이었다. 여유 시간이 좀 생기면 근처 골프연습장에서 골프공을 줍는 아르바이트도 겸해야 했다.

 몇달 뒤 토론토로 이사를 간 청년 스트로나크는 자그마한 주물공장에 취직한다. 거기서 공구 만드는 실력을 인정받아 몇년 뒤 동업자 제안도 받지만 그는 독립의 길을 택한다. 그동안 한 푼 두 푼 모은 자금과 은행 대출 1000달러로 1957년 토론토에 멀티매틱(Multimatic)이라는 자신의 공장을 연 것이다. ‘오너’는 됐지만 재정적 여유가 없었던 그는 토론토의 오래 된 공단에 있는 차고 한쪽을 빌려 중고 선반 기계를 들여놓고 구석에 마련해 놓은 간이 침대에서 새우잠을 청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에 뛰어든다. 하지만 그는 차근차근 사업을 키워 나가  처음에는 혼자서 시작했던 공장을 그해 말 종업원 10명을 거느리는 규모로 발전시켰다.

 이때 스트로나크 회장은 黴탔?미래를 바꾼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공구 제조업에서 벗어나 자동차부품업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 스트로나크 회장은 40여년 뒤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설명했다. “노사 갈등과 생산성 향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자동차산업은 자체 제작에서 점차 탈피, 납품받은 부품을 조립하는 단계로 넘어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행히 그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자동차 부품업으로 방향을 전환한 뒤 1년여만에 그는 굴지의 자동차메이커 GM으로부터 드디어 첫 계약을 따낸다. 자동차 햇빛가리개에 쓰이는 경첩 30만개가 최초의 주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숙련공 하나가 회사를 떠나겠다는 바람에 첫 고비를 맞게 된다. GM의 주문을 감당하려면 이 기술자가 꼭 필요한데 독립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때 스트로나크 회장은 이 기술자에게 수입의 일정 부분을 성과급으로 줄 것을 약속하고 붙들 수 있었다. 당시 이 기술자에게 제안한 성과급은 ‘세전 수입의 3분의 1’이라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기본급만 매달 지급하고 초과근무 수당은 없애는 대신 세전 수익의 일정 부분을 몰아서 지급할 것을 미리 약속한 이 아이디어는 훗날 그룹의 ‘기업 헌법’에 반영돼 마그나그룹 노사 안정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기술자 우선 정책과 노사 안정 꾀해

 스트로나크 회장은 일찍부터 ‘기술자 우선 정책’이 옳다는 것을 실감하고 계속 이 원칙을 밀고 나간 인물이다. 그는 이와 관련, 2003년 토론토 무역위원회 초청 연설에서 “마그나그룹의 핵심은 기술자들”이라며 “기술자들의 지위를 강화시켜 각 작업장을 독립적인 이익 창출의 중심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뒀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지금도 마그나그룹 219개 작업장 중 노조가 결성된 곳은 12곳뿐이고, 그나마도 사회주의 전통이 강한 유럽 현지법인 계열의 공장 중 일부다. 노조 결성을 일부러 막은 게 아니라 근로자들이 노조 설립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찍부터 노동자들과 노사 안정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 자신 기술자 출신이었던 데다 단순히 ‘기술자를 이용해 먹겠다’기보다는 장기적인 파트너로 대하겠다는 기업 철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로나크 회장의 기술자 사랑, 노사 화합의 마인드를 읽을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70년대 온타리오주 뉴마켓이란 곳에 공장을 지을 때의 일이다. 당시 이 공장에 근무할 종업원이 100명에 불과한 데도 스트로나크 회장은 보육 시설과 병원 등 복지와 관련된 시설을 먼저 건설토록 했다. 마치 스스로를 일종의 ‘가부장(家父長)’ 으로 간주하고 종업원(가족)들의 복지를 챙겼던 것이다. 이후 오로라시에 대규모 플랜트를 조성할 때는 그가 직접 시므온공원(Simeon Park)이란 이름의 편의시설을 설계해 인공호수, 바비큐용 시설, 실외 수영장 및 운동 시설 등을 갖추도록 했다.

 이같은 노사 화합 분위기 덕분에 그의 기업은 창업 이후 단 한 차례도 위축되지 않고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1957년 설립 당시 1만3000달러(이하 캐나다달러)에 불과했던 매출액은 10여년 뒤인 1969년에 1000만달러, 20여년 뒤인 1979년엔 1억5000만달러를 기록한다. 설립 29년만인 1986년 드디어 10억달러를 돌파한 마그나그룹의 매출액은 증가에 가속도가 붙어 이후 20억달러를 달성하는 데 불과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후 13년만에 매출액은 10배로 불어났다. 마그나그룹 출범 이후 매출액과 순익 신장률은 각각 연평균 29%와 17%를 기록하고 있다. 북미의 어느 제조업체도 달성치 못한 경이로운 기록이다.

 마그나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지적대로 운도 따랐다. 1965년 캐나다와 미국 정부가 자동차협약(Auto Pact)을 맺으면서 캐나다의 관련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양국이 맺은 이 협약에 따라 부품산업의 관세가 면제됐고, 캐나다에서 생산된 제품이 미국에서 생산된 것과 차별을 받지 않게 됐다. 1990년대 세계무역기구(WTO)가 문제를 제기할 때까지 효력을 발휘했던 이 협약은 스트로나크 성공의 또다른 기둥이었다.

 이런 주변 상황의 호전에 힘입어 프랭크 스트로나크의 회사도 확장 일로를 걷는다. 드디어 1960년대 그의 회사는 상장회사인 마그나전기(Magna Electronics)와 합병한다. 이때 비로소 ‘마그나’란 회사 이름을 얻은 것은 물론, 그의 기업 철학이 담긴 ‘공정한 기업(Fair Enterprise)’ 정신이 태동한다.

 1970년대 프랭크 스트로나크와 마그나는 다시 한 번 도약의 전기를 마련했다. 인수·합병과 확장에 시동이 걸린 것이다. 70년대 10년 동안 공장은 40개로 늘었고, 매출액은 1000만달러에서 18배 이상 늘어 1억8000만달러를 웃돌았다. 얼마나 빨리 사업이 확장됐던지 1980년대까지 10년 동안 마그나그룹은 새 공장을 평균 8주만에 하나씩 열었으며, 나중에는 5000종이 넘는 부품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인수·합병 행진은 최근까지 이어져 지난 1998년 오스트리아 150년 전통의 엔진시스템 업체인 스타이어-다임러(Steyr-Daimler)를 인수, 유럽 공략을 본격화했다. 스트로나크 회장은 유럽에 현지 공장을 세우면서 동시에 오스트리아 축구단을 인수하고 축구 아카데미도 만들었다. 한때 축구선수 제의까지 받았던 그가 구단주로 금의환향한 셈이다.



 한때 한눈 팔아 최대 위기 맞기도

 하지만 그가 늘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다. 1980년대말 세계 자동차 경기가 피크를 치고 꺾이기 직전 현금이 넘쳐나자 한눈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창업 이후 줄곧 “제조업이 유일한 산업”이라며 서비스업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가 갑자기 건설업에 관심을 갖는가 하면 딸 이름을 딴 레스토랑 체인을 설립하는 등 다소 심한 ‘곁눈질’을 했던 것이다. 이 한눈 팔기는 자유당 의원으로 정치에 진출할 계획으로까지 확대돼 외부에서 보기엔 ‘회사 말아 먹을 일’만 한다는 평가까지 듣게 된다. 이런 와중에 은행 빚을 마구 끌어 쓰게 되자 회사는 창업 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한다.

 때마침 불어닥친 자동차 경기 위축으로 인해 급기야 공장을 담보로 1억5000만달러의 급전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진다. 당시 무역 분쟁으로 일본 자동차 제조업체가 북미에 현지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고, 스트로나크 회장은 이쪽으로 공급 업체 다변화를 시도하면서 과도한 저가 정책을 펴는 가운데 외부 사정이 나빠진 것이다. 그러자 은행권에서 압력이 슬슬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장 절반을 폐쇄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라”는 말을 반공개적으로 해댄 것이다. 또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주요 납품 업체는 “임금이 더 싼 멕시코나 제3의 지역으로 공장을 옮겨 보라”는 훈수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압력에 굴하지 않고 빈손으로 캐나다에 왔던 초심으로 돌아가 그의 ‘도전과 응전’ 근성을 발휘한다.

 그는 퇴진 압력을 일단 무시한 채 구조 조정에 돌입한다. 우선 20여개 작업장을 매각하고 일부 생산플랜트는 합병하는 등 3000여명의 노동자들과 중간관리자 500여명을 해고한다. 회사 자가용 비행기와 업무용 자동차도 매각하는 등 큰 줄기에서부터 작은 부분까지 직접 나서서 정리하는 한편, 대출 위주의 자금 조달에서 탈피해 증시로 방향을 튼다. 결국 그는 1991년말 1억달러의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데 성공한다. 금융시장에서 마그나의 재기를 인정한 것이다. 이후 매출액, 수익, 그리고 주가는 큰 폭으로 뛰어오르며 새로운 기록 경신에 들어간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마침내 마그나는 1992년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도 상장된다. 한편 구조 조정 과정에서 정리해고한 노동자 3000여명에 대해 스트로나크 회장이 공장을 매각하면서 새로운 오너가 모두 고용 승계를 보장토록 요구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와 관련, 1990년대말 스트로나크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은행에서 사퇴 압력이 들어왔지만 워낙 부채가 많아 날 강제로 밀어내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다”며 “빅3들도 우리가 부품 공급을 끊으면 곤란을 겪을 것이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대마 불사를 배수진으로 치고 승부수를 던져 당시 위기를 마그나그룹은 물론 스트로나크 회장 자신의 위상을 확고하게 굳히는 기회로 만든 셈이다.



 이익을 환원하는 경영 실천

 단돈 40달러를 들고 이민와 50여년만에 억만장자로 자수성가한 스트로나크 회장은 그의 부를 사회에 돌리고 번영을 확산시키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그의 부와 기업에 대한 시각은 ‘공정한 기업’이란 용어로 정리된다.

 그가 주장하는 공정한 기업이란 ‘이익을 추구하되 궁극적으로 그 이익을 종업원을 포함한 사회에 어떻게 환원할 것인지에 경영의 초점을 맞춘 기업’이다. 스트로나크 회장은 1970년대 시작했던 ‘종업원 수익 보장 및 참여 제도’가 바로 공정한 기업으로 가는 전제 조건이라고 밝힌 바 있다. 종업원들에게 그 성과를 적절히 보장하고 주주들에겐 최대의 배당금을 약속하는 한편, 이익을 사회에 재투자하는 기업이야말로 사회의 부를 확대시키는 공로자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지난 1997년 <캐나다 경제기술 개발 저널>에 실린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방안>에서 스트로나크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든 개인이 두 가지 기본적인 자유를 찾는 욕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행복으로 가는 길(방법)을 선택하는 자유요, 다른 하나는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경제적인 자유다. 그런데 현재 이런 자유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이러한 두 가지 자유를 실현하는 길은 자유기업(Free Enterprise)을 이 땅에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유기업이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개인의 이익을 침해하고 사회를 파괴하는 암적인 존재로 될 것이다. 자유기업이 종업원의 복지와 사회 기여 등 베푸는 데 주력할 때 이를 비로소 공정한 기업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취지로 설립한 공정기업재단(Fair Enterprise Institute)의 인사말에서 스트로나크 회장은 “공정 기업이 되고자 한다면 모든 기업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종업원들에게 이익과 소유권의 일정 부분을 양도하는 것은 물론 대부분의 회사 이익을 사회에 재투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스트로나크 회장은 기술자 우대와 종업원 존중 사상을 실천했다. 일종의 종업원 지주제인 ‘종업원 수익 보장 및 참여 제도(Employee Profit and Equity Participation)’를 도입한 것이다. 단순히 종업원에게 주식을 나눠줘 주주로 승격시키는 데 머물지 않고 당기 결산 때 납세 전 이익에서 일정 부분을 종업원들에게 나눠주는 제도다. 이는 종업원들에게 배당금과 이익을 동시에 매년 함께 나누겠다는 취지였다. 더구나 배분율은 결산이 끝난 뒤가 아니라 회계연도가 시작할 때 미리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먼저 주요 간부들에게 이 제도를 실시한 뒤 점차 아래로 확산시켰다. 이후 스트로나크 회장은 마그나의 회사 규정인 ‘기업헌법(Corporate Constitution)’에 이러한 내용을 명문화했다.

  마그나의 기업헌법은 1215년 공표된 영국의 권리장전을 본따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로도 불린다. 당시 왕권에 대응, 국민들의 권리를 보장받은 헌장의 명칭과 회사 이름이 유사한 데다 내용 역시 종업원들의 권익 보장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각종 후진 양성 프로그램 가동

 스트로나크 회장은 후진 양성에도 주력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1995년 100만달러(약 90억원)를 출자해 설립한 ‘마그나장학회(Magna for Canada Scholarship Fund)’다. 이 장학회에서 벌이는 주요 사업 가운데 ‘내가 총리라면(As Prime Minister Awards)’이란 상이 있다. 캐나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국가 경영에 대한 비전과 참신한 경영 아이디어를 모은다는 취지로 제정된 이 상은 선정 방식이 최근 부동산재벌 도날드 트럼프가 출연해 미국에서 화제를 모은 ‘백수 탈출 대작전(Apprentice)’과 비슷하다. 매년 초 작문 심사를 통해 1차로 전국 대학생 가운데 50명의 후보자를 선발한 뒤 이 중 10명을 걸러 2박3일의 일정에 집어넣는다. 합숙 기간중 각계 전문가들과 캐나다 총리 등 정치인 앞에서 자신의 비전을 발표하는 과정을 거쳐 이들 10명 가운데 최종적으로 한명의 장학생을 선발, 5만달러의 장학금을 수여한다. 1등뿐 아니라 두번째 단계를 통과한 10명의 후보자들 전원에게 장학금 1만달러와 마그나그룹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도 부여한다. 장학회는 이들이 발표하고 토론한 내용을 책으로 출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스트로나크 회장은 ‘내가 총리라면’상의 설립 취지에서 창업가 정신과 국가의 미래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우리나라를 구성하는 여러 주역들, 정부, 기업, 노조, 학계, 언론계 등은 서로 협력해 실업률을 낮추고 일자리를 창출, 캐나다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나서야 한다. 교육은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라 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캐나다의 인재들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국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진 젊은이로 성장시킬 때 캐나다의 앞날도 밝아질 수 있다. 이 상은 단순히 지식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과 이상을 보유한 젊은이들을 평생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스트로나크 회장이 후원하는 후진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은 이밖에도 많다. 캐나다의 젊은 창업가들 모임인 ACE(Advancing Canadian Entrepreneurship)의 주요 자금 지원자이기도 하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창업가 정신’을 강조한다. 그 자신이 단돈 40달러를 들고 낯선 땅에서 성공한 사람인 만큼 창업가 정신이 더욱 각별할 터이다.

 그는 고향 오스트리아에서도 후진 양성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대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 지난해 10월 ‘프랭크 스트로나크 공과대’를 출범시켰다. 스트로나크 회장은 이 학교에 4년 전 2천400만유로(약 300억원)를 기부했고, 학교는 이 자금을 바탕으로 새 단과대학을 만들고 건물을 지은 것이다. 학교측은 “이 단과대학에선 기술과 경영학을 접목시킨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학생들에게 자동차에 관한 실용적인 학문을 가르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는 마그나그룹의 기술력이 없었으면 시작되지도 못할 일이었다. 창업자인 스트로나크 회 장 자신이 기술자였던 만큼 마그나그룹에서는 창업 이후 지금까지 신기술 개발에 전력투구하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부터 ‘매출액의 최소한 7%를 기술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두었기에 마그나의 기술력은 세계에서 알아 주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지금이야 흔히 볼 수 있지만 자동차가 후진할 때 멜로디가 들리게 한 장치도 마그나가 1980년대 최초로 개발했다. 초경량 좌석 프레임, 접혀서 바닥에 들어가는 미니밴 좌석 등도 마그나의 히트 상품들이다.



 2000년 숙원 사업인 서비스업에 진출

 마그나의 기술력은 지난 1998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트럭용 새 플랜트를 건설하면서 공장 전체를 컴퓨터 기반의 지능형 플랜트로 구축, 새롭게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때 구축된 시스템은 미세 부품의 정밀 절삭 등 생산 과정에서부터 급여 계산까지의 모든 업무를 총연장 350km의 광케이블 인트라넷을 통해 운용, 미국 스미소니언 재단으로부터 ‘세계 최초로 전자동화된 부품공장’이란 칭호를 얻었다. 이 공장은 특히 트럭 부품을 생산해 캐나다 온타리오주, 미국 미시간·위스콘신·인디애나주 및 멕시코 등 6개 GM 공장에 단독 납품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만약 마그나가 고의든, 부주의든 부품 공급을 중단할 경우 북미 대륙 6개 공장의 생산이 중단된다. 그만큼 마그나를 GM이 신뢰하고 있다는 얘기다.

 스트로나크 회장은 현재 마그나그룹 이사회 회장으로 생산 현장에서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기술과 마케팅, 생산성 향상 등과 관련된 국제 전략 수립을 지휘하는 한편, 중요한 경영상 결정에 조언을 하고 있다. 지난 1999년 ‘제2의 마그나그룹’이란 기치 아래 시작된 사업다각화와 최근 공격적으로 펼치고 있는 아시아 시장 확대도 그의 구상에 따른 것이다.

 마그나그룹 스티브 로저스 부사장은 지난해 5월 한국을 방문, “동광기연과 합작으로 만든 자동차 시트 제조업체 DK인테리어에 올 하반기까지 7000만달러를 투자하는 한편 HAC에도 5000만달러를 투자, 엔진용 오일펌프를 생산하는 등 앞으로 2억2000만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GM 본사에서 국제 담당 부사장으로 일하다가 지난해 8월 그룹의 신임 대표이사로 영입된 마크 호건 사장은 “북미에서 영업을 공고히 하는 한편, 신흥 시장으로 부상하는 한국·중국·호주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마그나의 사업을 확장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1년 이후 마그나그룹의 CEO 자리는 스트로나크 회장의 딸인 벨린다가 맡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1월 연방 보수당 당권 경쟁에 나서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호건 사장이 부임할 때까지 7개월째 공석이었다. 벨린다는 비록 당수에는 뽑히지 못했지만, 2004년 6월 연방 총선에서 보수당 후보로 당선됐다. 이로써 소속 정당은 다르지만 지난 1988년 자유당 공천을 통해 정계에 진출하려다 무산된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었다.

 스트로나크 회장은 아울러 ‘제2의 마그나’를 선포하면서 지난 1980년대말 유보했던 서비스업 진출의 숙원을 이뤘다. 지난 2000년 레저산업을 주축으로 하는 MEC를 설립, 자신의 평생 취미였던 승마와 미래의 유망 산업이란 소위 콘텐츠산업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1998년 개인 자금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산타 애니타 경마장을 인수, ‘취미를 사업으로’ 승화시킨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록 완전히 적자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북미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경마업체인 만큼 향후 발전 가능성은 크다는 게 분석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51년 전 청운의 꿈을 품고 캐나다로 왔던 오스트리아 청년 프랭크 스트로나크의 창업가 정신은 칠순을 넘기며 펼쳐지는 ‘인생 2막’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박형진 미주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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