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섬유·필터 전문회사인 웅진케미칼(옛 새한)은 원래 옛 새한그룹의 대표기업이었다. 새한그룹은 1995년에 삼성그룹에서 분가한 그룹으로, 주력기업인 새한의 본명은 제일합섬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거치며 새한그룹은 무너졌다. 화학섬유 경기 악화에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계열사 지원 부담이 급증하면서 결국 새한그룹의 얼굴이던 새한은 채권단 손에 넘어갔고, 2000년 10월 워크아웃(부도 위기에 몰린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작업)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새한은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후 2008년에 웅진그룹으로 인수되며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웅진케미칼로 간판을 바꿔단 후 재기의 신호를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작년 매출은 8032억원, 영업이익은 217억원, 순이익 102억원을 기록했다. 워크아웃을 졸업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글로벌 경기 침체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비교적 양호한 수준의 성적표라 할 수 있다. 워크아웃에 들어갔던 2000년의 매출은 9094억원이었지만 영업적자가 1208억원, 당기순적자가 무려 7062억원에 이르렀음을 떠올리면 엄청난 회복이다. 그 동안 웅진케미칼에서는 워크아웃 이후 정상화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워크아웃이 한창이던 2003년부터 지금까지 웅진케미칼을 이끌고 있는 박광업 웅진케미칼 사장을 만나 웅진케미칼의 드라마틱한 회생 뒷얘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

“워크아웃 후유증요? 다 회복됐죠…

  세계적인 화학 소재기업 될 겁니다”

박광업 사장이 새한의 워크아웃 회생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게 된 것은 2003년에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되면서부터다. 워크아웃 2년째까지 새한의 경영은 외부에서 온 전문경영인이 맡고 있었는데, 구조조정이 잘 진척되지 않아 채권단은 애를 태우고 있었다. 영입한 전문경영인이 새한 내부 사정에 어두워 일처리가 더뎠던 것이다.

결국 당시 대표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고, 채권단은 다음 대표의 공개 모집에 나섰다. 새한 내부에서는 “우리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이것이 경영지원본부장이던 그가 후보로 추대된 이유다.

“처음에는 고사했죠. 하지만 새한은 저의 청춘을 묻은 회사였어요. 26년이나 열심히 일했던 회사를 살려서 더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얌전히 경영지원본부장으로 있으면 5~6년 정도 임원 생활을 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일 공모에서 떨어지면 사표를 내야 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회사를 위해서 누군가는 나서야 했다. 결국 그는 고민 끝에 지원했다. 어렵게 결단을 내렸지만 채권단의 면접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시작부터 가시밭길이었다. 7~8명의 지원자 가운데 박 사장은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면접을 보는 채권단 측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이어진 면접에 지쳐있었다. 그의 순서가 왔을 때는 대충 빨리 끝내자는 분위기였다. 그가 면접장에 들어서자 사방에서 비난에 찬 공격이 쏟아졌다. “워크아웃에 들어간 데에는 당신들 잘못도 큰데, 내부인사가 무슨 마음으로 지원했느냐”면서.

“한 말씀 드리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박 사장은 손을 번쩍 들고 비난 일색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잘못하다가는 새한 임직원들의 희망을 안고 애써 지원한 보람도 없이 그대로 아웃될 판이었다.

사표 쓸 각오로 CEO 공모 지원

“어차피 잃을 것이 없어 적극적으로 나갔죠. 한 7분쯤 강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다른 지원자들은 새 직장을 구하러 온 사람이지만, 나는 잘 다니던 직장을 버릴 각오로 온 사람이다. 가만히 있으면 5년쯤은 문제없이 갈 수 있는 내가 왜 왔겠느냐, 회사가 너무 안타깝고 해서 재건하고 싶어 절실한 마음으로 왔다. 외부인사였던 전 대표가 구조조정을 제대로 못했는데, 또 그렇게 갈 수는 없지 않으냐, 진심으로 회사를 살릴 사람이 누구겠느냐, 기회를 달라’고 했지요.”

면접이 끝나자 8명쯤 되던 채권단 인사들이 그 자리에서 바로 투표를 했다. 박 사장에게 압도적인 표가 몰렸다. 보통 의견이 갈리기 마련이라 1차 투표에서 거른 1, 2위 후보로 결선 투표를 하는 것이 관례인데, 굳이 2차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채권단 입장에서는 꽁꽁 묶인 채권을 빠른 시일 내에 회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열의를 갖고 뛸 사람에게 표를 던졌던 것이다. 주주총회의 승인을 거쳐 박 사장은 본격적인 회생 업무에 나섰다. 한데, 당장 넘어야할 커다란 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경기도 용인 공세지구의 52만9000평방미터 규모 부지 매각 문제였다.

조 단위가 넘는 빚을 갚으려면 하루빨리 팔아서 현금을 마련해야 했다. 공세지구 부지는 경기도에서 미니 신도시 개발용으로 새한에 허가를 내준 곳이었다. 당시 새한의 얼굴을 보고 허가를 내준 만큼 개발권은 새한이 팔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부지를 매각하려면 땅만 따로 팔고, 그 땅의 인수자와 새한이 함께 개발해야 하는 구조였다. 게다가 신도시 개발을 위한 부지여서 가치 평가 기준도 불명확해 이래저래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시만 해도 보통은 수의계약을 해서 매각했는데, 고민 끝에 공개입찰로 처리했어요. 그 부지에 걸려 있는 복잡한 문제를 다 수용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죠.”

매각 가격으로 500억원 정도로 얘기됐었던 공세지구 부지는 위치가 괜찮아서 새한이 내건 조건을 감수하겠다는 입찰 응시자들이 여럿 나섰다. 2003년 3월, 그 중 963억원을 써낸 주빌디벨로먼트(시공사: 대주건설)에 낙찰됐다. 오랫동안 회사와 채권단을 머리 아프게 했던 공세지구 부지가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익까지 높게 매각됐던 것이다.

첫 번째 산을 무사히 넘었지만, 이번에는 경상북도 경산의 66만1200평방미터 규모 공장부지 매각 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산 부지는 새한이 허허벌판을 개발해 공장을 지어 운영하던 곳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에 주거지, 상업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시내 한복판에 공장이 위치한 형국이 되고 말았다. 공장을 옮길 필요를 느낀 새한은 경산시에 고등학교를 하나 지어 기증하고, 세수의 감소를 원치 않는 경산시 입장을 감안해 경산시 내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것을 조건으로 기존 공장부지를 상업용지로 변경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워크아웃 상태가 되면서 개발은 더 진행할 수가 없게 됐다. 개발은커녕 급히 매각해 채권단의 빚 상환에 보태야 했다.

멀고도 험했던 자산 매각 여정

문제는 경산 부지 역시 용인 공세지구 부지처럼 매각의 발목을 잡는 요소가 많았다는 것이다. 공장을 경산 시내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는데, 당시 경산시에는 새한 공장이 갈 만한 마땅한 후보지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구미시로 공장을 이전했더니, 경산시가 새한에 괘씸죄를 적용, 공장이 떠난 부지에 개발사업 승인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돈이 급했던 새한은 이미 부지를 부동산개발회사 중산도시개발에 매각하기로 한 상태였다. 그러나 중산도시개발에 개발사업 승인을 못 받는 땅은 필요 없었다. 중산도시개발은 새한에 소송까지 걸어왔다. 진퇴양난이었다.

박 사장은 승부수를 걸었다. 무작정 매수자인 중산도시개발의 오너 회장을 찾아갔다. 독대를 하며 눈물로 호소했다.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해 죄송합니다. 워크아웃 기업이라 한계가 있었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중산도시개발에서 경산시에 금전적인 보상을 하고 부지의 개발사업 승인을 받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도와주십시오.”

박 사장의 간절한 설득에 결국 중산도시개발 회장의 마음이 움직였고, 2005년 5월에 경산 부지는 2560억원에 무사히 매각됐다.

용인 공세지구 부지와 경산 부지 문제가 해결되면서 매각자금이 들어오자 상당한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회사의 숨통도 트였다. 정상화 작업도 속도가 붙었다. 새한의 새 주인을 찾는 작업까지 비교적 순조롭게 흘러갔다. 웅진그룹에서 채권단이 보유한 새한 지분을 주당 4300원에 인수하기로 결정됐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지뢰가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채권단이 문제였다. 채권은행들은 산업은행에 모든 매각 협상을 일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들은 매각 가격이 너무 낮다면서 결정된 사안에 딴죽을 걸고 나섰다. 웅진그룹 입장에서는 이미 인수가격이 결정된 마당에 채권은행들의 주장을 수용할 이유가 없었다. 양측의 입장은 좁혀지지 않았다.

박 사장은 답답했다. 새 주인을 찾게 되면 그 즉시 워크아웃을 마치게 되어 ‘고난의 행군’도 끝난다. 그러나 자칫하면 눈앞에 다가온 워크아웃 졸업이 무산될 판이었다. 박 사장은 또다시 승부수를 걸었다. 양측의 입장을 절충한 풋옵션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채권단에서 출자전환해 보유 중이던 새한의 지분이 68.9%였어요. 이 중 50%는 처음 낙찰가대로 웅진이 인수하고, 채권단에 남은 지분들은 매각 후 1년이 지나서 웅진에 낙찰 가격 대비 20%쯤 높은 가격으로 매수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지요.”   

박 사장의 제안에 웅진그룹은 동의했지만 은행들은 시큰둥했다. 1년 후 회사의 가치가 매각 시점보다 오를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박 사장은 채권단을 찾아다니며 “우리가 살아날 수 있게 제발 좀 도와 달라”고 설득에 나섰다. 결국 양측은 새 안에 합의했다.

새한 노조도 막판까지 박 사장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

“새한 노조가 처음엔 웅진에 매각되는 것을 많이 반대했어요. 웅진이 필터 수요가 많은 정수기 회사 웅진코웨이로 필터 부문만 넘기고, 나머지 섬유 사업을 다시 매각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거죠.”

노조 문제의 해결사는 웅진그룹 오너인 윤석금 회장이었다. 윤 회장은 새한 구미 공장에 내려가 500여 명의 노조원들을 직접 만났다. 지하 강당에서 3시간 넘게 대화하면서 ‘절대 사업 부문을 떼어내 매각하지 않고 모두 살리겠다’고 약속, 매각에 대한 노조의 동의를 끌어냈던 것이다.

매각 당시보다 기업가치 두 배 이상 올라

새한은 2008년 1월에 웅진그룹에 편입된 후 웅진케미칼이라는 새 이름을 얻으며 정상화됐다. 참으로 지난한 과정의 결과였다.

매각 2년이 넘은 현재 웅진케미칼의 주가는 1030원이다(2010년 4월19일 종가 기준). 작년에 주식의 액면가격을 10대1로 분할하지 않았다면 1만300원이 된다. 웅진의 새한 인수가격이 주당 4300원이었으니, 웅진케미칼의 현 기업가치는 매각 당시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박 사장은 작년 7월 대대적으로 인력 구조조정 및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앞으로 회사가 새로운 청사진에 따라 성장할 수 있도록 몸을 만든 것이다. 고생스럽던 워크아웃의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온 만큼, 이제는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위해 한 단계 올라서야 할 때라는 판단 때문이다.

“웅진케미칼은 앞으로 전망이 좋은 필터 부문(수처리필터, 에어필터 등), IT 소재(백라이트유닛용 고휘도 필름 등), 에너지 관련 소재 부문 등 세 가지를 중심축에 두고, 여기에 스마트 섬유 부문(아라미드·탄소섬유 등)을 추가하는 형태로 가려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제 세계적인 화학 소재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프로필

1951년생.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삼성그룹 공채 17기로, 1976년 웅진케미칼의 전신인 제일합섬(새한)에 신입사원으로 입사. 단섬유사업부장, 직물사업본부장, 경영지원본부장 역임. 2003년부터 워크아웃 상태였던 새한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기업 정상화 진두지휘. 2008년 웅진그룹에 편입되며 새한에서 웅진케미칼로 사명이 변경된 현재까지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이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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