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현대자동차·LG전자·포스코 등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이들 기업은 당당히 강자로 대접받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세계적 브랜드컨설팅 업체인 인터브랜드가 발표하는 글로벌 브랜드 가치 순위(2009년 기준)에서 각각 19위와 69위를 기록해 세계 100대 기업의 위상을 자랑한다. 이들 토종 글로벌 기업들의 브랜드 가치는 한국의 국가 브랜드 가치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들 기업 덕택에 한국을 바라보는 지구촌의 평가가 높아지는 것이다.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와 만나 ‘기업들의 글로벌화와 국격(國格)’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 봤다.

“토종 글로벌 기업들

 한국 국격 제고에 큰 힘”

정부·국민·NGO 등 나머지 주체도 국격 높이는 데 동참해야

21세기 글로벌 기업은 지속가능성 등 새로운 스탠더드가 중요

 “1994년 당시 YS(김영삼 대통령)가 호주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세계화’라는 기치를 처음 내세웠죠. 대통령의 말씀이니까 조명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어요. 말하자면 ‘국제화’도 안 됐는데, ‘세계화’가 되겠느냐 하는 것이었지요. 국제화나 세계화는 계단 올라가듯이 변하는 게 아니라 패러다임과 인식의 틀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치 않은 문제입니다.”

조동성 교수는 YS 정부의 주요 정책 담론 중 하나였던 ‘세계화’를 먼저 언급했다. 아닌 게 아니라 YS 시절 내내 ‘세계화’는 국민들의 뇌리를 자극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으니 이제 세계로 나아가자는 화두는 자못 매혹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세계화 슬로건의 끝자락에 한국은 불행히도 IMF 외환위기라는 참사를 맞았다. 구호와 현실은 흔히 배반하기 마련이다.

과거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었던 국제화는 1990년대 이후 세계화에 자리를 내줬다. 요즘은 국제화라는 말을 좀체 듣지 못하게 된 듯하다. 그런데 국제화와 세계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조동성 교수는 이렇게 구분한다.

“국제화는 정부와 기업의 주도로 해외에서 더 많은 부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국제화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던 시대부터 500년 이상 이어져 온 겁니다. 반면 세계화는 기업의 기반 혹은 중심점이 본국에서 해외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세계화 단계에는 더 이상 정부와 기업이 공동운명체가 아닙니다. ‘세계기업(조 교수는 글로벌 기업을 세계기업이라고 지칭했다)’은 본국을 떠나 어느 나라든 갈 수 있습니다. 실제 로열더치셸이나 네슬레 같은 기업들에게 이제 본토나 본사의 의미는 없습니다. 가령 국내 기업들도 싱가포르나 미국의 여건이 더 좋으면 그리로 본사를 옮길 수도 있는 겁니다. 그게 기업 활동하기에 효율적이라면 말입니다.”

조동성 교수는 문득 고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과 1993~1994년 무렵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고 최종현 회장은 1960년대 직물, 1970년대 합섬, 1980년대 정유, 1990년대 이동통신 등으로 주력사업을 전환하면서 SK그룹을 성공적으로 키워낸 기업가다. “제가 최 회장께 ‘다음 단계는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주저 없이 ‘세계화’라고 답하시더군요. 최 회장은 그룹 본사를 뉴욕에 둘 수도 있다는 말까지 하더군요. 실제 최 회장은 당시 모 부사장을 미국에 보내 스터디까지 시킨 걸로 기억합니다.”

오늘날 글로벌 시장에서 기업들은 경영 유형에 따라 네 가지 국면으로 나뉜다는 게 조 교수의 설명이다. 각각의 국면은 수출입(International)·다국적(Multinational)·범국적(Transnational)·초국적(Supernational)으로 구분할 수 있다. 수출입 기업은 말 그대로 거점을 본국에 두고 교역만 하는 형태를 말한다. 다국적 기업은 해외 여러 곳에 현지 생산·판매 체제를 갖추고 사업을 전개하는 기업이다. 범국적 기업은 해외 거점과 해외 거점 또는 해외 거점과 글로벌 시장 사이에 거래가 일어나는 기업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초국적 기업은 국가를 떠난, 나아가 국가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닌 진정한 세계기업(글로벌 기업)을 의미한다.

초국적기업은 국가를 떠난 진정한 세계기업

만약 삼성이나 LG가 세계기업이 된다면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삼성과 LG를 붙잡기 위해 ‘마케팅’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국가가 세계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계기업은 정부가 아양을 떨어서라도 모셔야 하는 ‘고객’이 되는 셈이다. 조 교수는 “이런 것이 바로 세계화 내지는 글로벌화”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기업의 글로벌화는 반드시 바람직한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게 조 교수의 분석이다. “글로벌화는 기업의 토대가 ‘풋루스(footloose)’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죠. 비유하자면 공중에 발이 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글쎄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가령 소니를 예로 들어봅시다. 도쿄와 뉴욕에 ‘듀얼(dual) 헤드쿼터’를 두고 외국인인 하워드 스트링거 회장이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는 소니가 성공적이냐고 하면 그건 좀 회의적이지 않습니까?”

이런 점을 주목하면 글로벌화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기업들은 처한 상황이나 추구하는 목표가 제각각이다. 고객이나 시장의 성격도 다르다. 당연히 각자 실정에 맞는 경영전략이 필요하다. 조 교수는 삼성전자(반도체사업부)와 하이닉스를 비교하며 한 가지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시했다.

“삼성전자는 기술 유출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기흥에 반도체 공장을 집결시켜 놓고 해외로 공장 이전을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독점적 기술력을 지키려는 거죠. 반면 하이닉스는 원천기술보다는 생산 효율성과 노하우에 강점이 있는 기업입니다. 따라서 원가절감을 위해 해외 진출을 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하이닉스가 삼성전자보다 더 세계화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참 고민스러운 난제입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사례를 보면, 기술 발전에 따라 오히려 세계화 정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글로벌화 평가 지표는 시대정신 반영해야

사실 글로벌화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라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를 내포한다. 1970~1980년대만 하더라도 해외 공장 수, 해외 매출 비중, 현지법인 대표자의 국적, 본사 이사회의 외국인 참여 여부 등이 글로벌화의 잣대로 통용됐다. 하지만 이런 지표들만으로 오늘날의 기업 글로벌화를 따지는 것은 부적절하다. 최근 트렌드나 시대환경을 반영한 새로운 지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 교수의 말이다. “30년 전 미스코리아 선정 기준을 지금 미인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쓸 수는 없지 않겠어요. 기업을 평가하는 것도 시대정신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요즘 시대에 맞는 글로벌화 지표들이 될 수 있을까? 조 교수는 기업의 소프트웨어적인 측면, 인적인 토대, 의사결정의 기본전제나 방향성, 나아가 기업철학이 얼마나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느냐 등을 예로 들었다.

“20세기는 이익 창출의 극대화가 기업의 목표였던 시대입니다. 반면 21세기에는 이른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 기업들의 새로운 도그마가 되고 있어요. 지속가능 기업은 달리 말하면 ‘사회 구성원의 사랑을 받는 장수기업’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아직은 20세기와 21세기의 도그마가 충돌하고 있는 시기예요. 한 20~30년이 지나면 이 두 가지를 초월하는 새로운 기준(조 교수는 헤겔 변증법의 정반합(正反合) 이론을 들어 ‘진테제(synthese)’라고 표현했다)이 나타날 겁니다.”

올 초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을 ‘국격 제고 원년’으로 선포한 바 있다. 또한 정운찬 총리는 ‘국격 제고 민간자문단’을 구성해 국격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의견을 수집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위로부터 국격 바람이 불고 있는 셈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한국의 국격이 그만큼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조 교수는 국격에 대해 묻자 3년 전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 참석했을 때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그는 그곳에서 우연히 국격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기조발표를 하던 클라우스 슈왑 다보스포럼 의장이 ‘향후 세계는 5개의 슈퍼스테이트(Super-state)가 이끌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미국·EU·중국·러시아·인도 등 다섯 나라를 지목했어요. 경제규모 2위의 일본을 배제하는 것이 좀 놀랍고 의아하더군요. 나중에 슈왑 의장과 마주쳤을 때 일본을 뺀 이유를 물었죠. 그랬더니 ‘Japan is not up to the class(일본은 그만한 수준이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더군요. 그때는 그 말의 진의를 잘 몰랐어요.”

슈왑 의장의 말은 과연 무슨 뜻이었을까? 조 교수는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개발도상국의 문맹 퇴치 문제를 논의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문득 해답을 얻었다. 당시 다보스포럼에서 진행된 240여 개 세션은 크게 경제·무역·투자·기업문제 등을 논의하는 세션과 질병·기아·교육·기후변화 이슈 등을 다루는 세션으로 나눌 수 있었다. 조 교수는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아 각종 세미나를 두루 참석하고 있던 터였다.

“인도의 락시미 미탈 회장(세계적인 철강 회사 아르셀로미탈의 오너)이 개발도상국의 문맹 퇴치를 주제로 발표하는데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가 제 옆자리에 앉더군요. 잠깐 뒤에는 요르단 왕비도 우리 테이블에 앉았어요. 주변에는 러시아, 중국에서 온 참석자들도 제법 많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일본인, 한국인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더군요. 반면 경제 세션에는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우글우글했거든요. 그때 속으로 탄식이 나왔습니다. 일본이든 우리나라든 아직은 ‘경제동물’을 못 벗어났구나 하고 말이죠. 동시에 국격이 뭔지도 깨달았습니다. 지구촌 사람들과 보편적인 가치를 나누고 공동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자신의 삶의 일부를 그런 데 쓸 수 있는 자세, 그게 바로 ‘한 나라의 수준’ 곧 국격이라는 거죠. 우리나라도 국격을 높이려면 정치·경제 분야의 지도자들이 다보스포럼 같은 곳에서 교육이나 질병 문제를 주제로 연설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일본은 아직 ‘경제동물’ 못 벗어나

국격은 학술용어가 아니다. 아직 명확한 정의가 확립돼 있지도 않다. 사람마다 그 의미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흔히 ‘국가 브랜드’ 혹은 ‘국가 이미지’라는 용어와 거의 같은 뜻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반면 조 교수는 국격을 ‘The Class of State’, 즉 ‘국가의 수준’이라고 정의했다. 그에게는 다보스포럼에서의 경험이 깊이 각인된 듯했다.

국격 제고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오는 11월 한국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과연 G20 정상회의는 우리나라 국격에 어떤 영향을 줄까? 나아가 한국 기업들의 위상 제고에도 보탬을 줄 수 있을까? 조 교수의 말이다.

“그 동안 우리 기업들은 세계시장에서 국가 브랜드를 쓰지 않았습니다. 한국 하면 핵·분단·북한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에 장사에 도움이 안 되거든요. 국가 브랜드가 오히려 기업 활동에 부담이 되는 존재였던 셈이죠. 특히 선진국 시장에서 그런 현상이 심했습니다. 정부가 할 역할은 기업들이 국가 브랜드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G20 정상회의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가령 해외시장에서 ‘G20 정상회의를 개최한 나라인 한국이 만든 제품’이라고 하면 좋은 이미지를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조 교수는 국격 제고를 위해서는 정부·기업·국민·NGO 등 4개 주체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국격 제고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설명이다. 지금까지는 4개 주체 가운데 기업만 홀로 뛰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한국은 국격 제고 같은 과제를 너무 기업에만 의존하는 게 문제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기업들은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G20 정상회의를 유치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삼성이나 LG, 현대차 같은 기업의 덕을 본 게 많습니다. 이제는 모든 주체가 각자 할 수 있는 몫을 다해야만 제대로 국격을 높일 수 있을 겁니다. 국민은 국민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정부의 역할이 큰데, 공적개발원조(ODA)를 적극적으로 늘려가는 것도 중요한 방법이에요.”

김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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