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현지시각) 저녁, 뉴욕 맨해튼.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외출 금지 조치 탓에 자동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4월 말까지 6주 동안 직장을 잃은 이가 3000만 명을 넘어섰다. 사진 AFP연합
4월 23일(현지시각) 저녁, 뉴욕 맨해튼.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외출 금지 조치 탓에 자동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4월 말까지 6주 동안 직장을 잃은 이가 3000만 명을 넘어섰다. 사진 AFP연합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선진국에 디플레이션(deflation·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이하 디플레) 공포가 드리워지고 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2020년 선진국 물가 상승률을 5년 만의 최저인 0.5%로 전망했다. 외출 제한 등 경제 활동이 세계적으로 위축되면서 수요가 단숨에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올해 3월의 전년 동월 대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미국이 1.5%로, 2월보다 0.8%포인트 떨어졌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국)도 0.7%로 0.5%포인트 하락했다. 모두 코로나19 사태로 수요가 급감한 것이 발목을 잡았다. 일본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도 2019년 4월의 0.9%를 정점으로 현재 0%대다. BNP파리바증권은 올해 일본의 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했다.

선진국이 전부 디플레에 빠진다면 코로나19 이후의 경제 회복이 늦어질 수 있다. 회복을 이끌 주체의 동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2020년 신흥국 평균 물가 상승률은 2019년 5%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은 4.6%로 전망된다. 그러나 신흥국은 통화 불안과 채무 불이행 위험이 커지고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1930년 전후 대공황 때와 같은 세계 경제의 역사적 수축이 단기적으로는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코로나19 종식 후에도 선진국들이 디플레에 빠져 세계 경제 회복이 어려울 수 있는 이유 세 가지를 분석했다.


이유 1│일본의 잃어버린 30년…한 번 디플레 빠지면 탈출 어렵다

일본 유통 전문지 닛케이MJ는 4월 29일 자에서 “슈퍼마켓에서 숙주나물(모야시)과 저가 맥주(제3 맥주)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고 전했다. 숙주나물과 저가 맥주는 일본의 디플레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상품이다. 값싸게 배를 불리고 취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3월 말 일본 내 슈퍼마켓 이용객의 숙주나물 구입액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60% 증가했다. 맥주 가격의 절반 이하인 저가 맥주 판매도 같은 기간 20% 증가했다.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의 나가하마 도시히로 수석이코노미스트는 “IMF의 올해 일본 성장률 예측(-5.2%)대로라면 일본의 개인 소비는 15조엔(약 170조원) 이상 감소할 것”이라며 “코로나19 종식 후에도 디플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사례는 한 번 발생한 디플레에서 탈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2013년 시작된 아베노믹스의 요체는 인플레이션을 일부러 유발하는 것이었다. 물가 상승률 2%를 달성해 현금을 들고 있는 것보다 값이 오르기 전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일본은 물가 상승률 목표를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고, 코로나19 사태로 오히려 확실한 디플레 상태에 빠질 위기에 처했다.

일본에서 지난 30년 가까이 물가가 오르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기 때문이었다. 수요가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요가 늘어나려면 개인 구매력이 향상돼야 하는데, 그러려면 임금이 늘어야 한다. 하지만 일본인 평균 임금 수준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돈 많이 받던 베이비부머가 은퇴하고, 돈 적게 받는 젊은이들로 고용 시장이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로금리라 해도 매출이 늘어날 전망이 보이지 않으면 기업은 투자를 늘리지 않는다. 개인도 소득이 없는 한 제로금리라고 대출받아 집을 사려 하지 않는다. 오바타 세키 게이오대 교수는 “일본은행이 제로금리와 무제한 양적 완화 정책을 쓰고도 디플레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역으로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유 2│ILO “2분기 정규직 3억 개 소멸”…한 번 줄어든 고용, 소비·고용 감소 악순환

국제노동기구(ILO)는 4월 29일(현지시각) 펴낸 ‘코로나와 세계 일자리’ 보고서에서 올해 2분기(4~6월)의 세계 노동 시간이 위기 이전인 지난해 4분기보다 10.5%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해 4분기 대비 정규직 3억500만 개(주 48시간 노동 기준)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일자리가 줄어들면 그만큼 수입이 떨어져 소비가 줄어든다. 소비가 줄면 기업은 투자를 줄이고, 그 결과 고용은 더 줄어, 다시 소비 감소, 기업 투자 감소, 고용 감소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일시적 재난일 수 있지만, 이로 인해 발생한 고용 감소가 디플레의 장기화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다는 얘기다.

ILO의 이번 전망치는 올해 1분기의 노동 시간 감소 폭(지난해 4분기 대비) 4.5%보다도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4월 7일 ILO는 올해 2분기 노동 시간이 지난해 4분기보다 6.7%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었지만, 코로나19 사태 수습이 늦어지면서 불과 3주 만에 전망이 크게 악화했다. 그러나 이번 전망치 역시 코로나19 사태가 2분기를 정점으로 수습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2분기 이후에도 수습이 안 될 경우, 노동 시간 감소는 최근 전망치인 10.5% 감소보다 더 악화할 수 있다.


이유 3│저유가…미국 제일주의 안 바뀌면 오래갈 수도

저유가는 연료와 원자재 가격 하락이라는 긍정적 요인도 있지만, 물가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압력을 가해 안 그래도 디플레 우려에 빠진 선진국 경제를 더 침체시킬 수 있다. 저유가는 당분간 해결이 어렵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러시아 등 비회원국이 5월 이후 감산에 합의했지만, 원유 수요 위축이 너무 심하다. 원유 가격이 오르려면 수요 감소보다 더 많은 감산이 이뤄져야 하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제일주의와 에너지 안보 전략이 결부돼 해결이 쉽지 않다는 전망이다. 셰일 혁명의 발원지인 미국은 지난 10년간 원유 생산 증가분의 73%, 2018년 증가분의 98%를 차지할 만큼 생산을 늘려 왔다. 셰일 산업을 무기 삼아 외교·안보 지형을 바꾸고 미국 산업을 부흥시키려던 게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자국 셰일 산업은 보호한 채 다른 주요 산유국에만 감산을 요구하면서, 주요 산유국인 사우디·러시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생산 비용이 배럴당 30~50달러인 미국 셰일 기업들은 현재의 20달러 전후 유가에서 계속 버티는 게 불가능하다. 러시아 등은 의도적으로 저유가를 방치해 미국의 급소인 에너지 산업을 공격하려는 심산도 있다. 미국이 에너지 패권주의를 고집하는 한, 저유가 상황의 빠른 해결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최원석 조선일보 국제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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