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본 정부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에 대한 대책 논의를 위해 7일 밤 서울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본 정부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에 대한 대책 논의를 위해 7일 밤 서울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일요일인 7월 7일 밤 일본으로 출국했다. 짙은 남색 정장에 푸른 와이셔츠를 입고 수행원 한 명 없이 작은 짐가방 하나만 챙겨 급히 나온 모습이었다. 이 부회장이 휴일 밤 급히 출장길에 오른 것은 일본 정부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핵심 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를 발표해 해결책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하네다 공항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부회장이 공항에 도착한 직후 입국장에서부터 한·일 취재진은 방일 목적과 수출 규제의 영향을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 부회장은 일본어로 짧게 “바이우데스네(梅雨ですね·장마네요)”라고 답했다. 국내 최대 그룹이자 글로벌 기업인 삼성의 총수는 준비된 차를 타고 어둠에 싸인 공항을 빠져나갔다.

삼성은 현재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바이오로직스 기업 가치를 부풀리는 분식회계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내부적 문제보다 일본 정부가 1일 기습적으로 발표한 반도체 등 첨단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가 삼성에는 더 급한 ‘발등의 불’이 됐다. 일본 정부가 수개월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온 규제조치에 삼성 등 국내 대기업들이 직격탄을 맞게 됐기 때문이다. 일본은 국내 기반 산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핵심 소재를 수출 규제 대상에 포함시켜 ‘공격 목표’를 명확히 설정했다. 또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 한국 정부의 대응방안에 대한 대비책도 갖춘 상태다. 1000여 종이 넘는 전략물자(무기로 전용할 수 있는 화학물질)를 수출할 때 절차를 생략하도록 특혜를 주는 ‘화이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2단계 수출 규제 카드도 이미 검토에 들어갔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시장을 석권한 한국 기업들을 제대로 손보기 위해 작정을 하고 총공세에 들어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국가 간 전략의 기본은 상대국의 공격으로 자국에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반격을 위해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을지 빠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삼성과 같은 글로벌 기업은 물론 중견기업 등 일반 조직의 경영에서도 통용되는 기본 원칙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이런 구체적인 전략 없이 일본의 수출 규제가 발표되자 “일본의 수출 규제 품목 리스트를 알고 있었는데 가장 아픈 소재들을 규제했다(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일본이 예의가 없다. WTO에 제소를 검토하고 있다(강경화 외교부 장관)” 등의 발언을 쏟아내며 감정적 대응만 하고 있다. 국가 위기상황에서 위기를 해결할 전략 없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다.


1│한국 정부 퇴로 끊고 반도체 미래 먹을거리 공격

일본 정부가 반도체 첨단 소재 3종의 수출 규제를 발효한 것은 6월 30일 산케이 신문을 통해서였다(공식 발표는 7월 1일). 하지만 두 달 전인 4월부터 경제산업성은 별도의 부서를 신설해 일본이 보유한 첨단 소재의 현황정보를 파악했다. 이런 분석을 통해 한국 수출 규제 품목으로 선정된 소재는 반도체 회로를 그리고 원하는 형태로 깎아내는 데 쓰는 불화수소, 반도체 원판 위에 회로를 인쇄할 때 쓰는 감광액인 포토레지스트, 접히는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불화폴리이미드 등 3종이다. 일본은 3종의 핵심 소재를 수출 규제하면서 세부 규제 항목을 정해 D램이나 낸드플래시 등 한국 기업들이 현재 대량생산하는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사용되는 소재는 규제하지 않았다.

대신 파장이 짧은 극자외선(EUV)으로 차세대 반도체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소재에는 규제를 적용했다. 당장 글로벌 시장 공급에 차질을 주지는 않지만 미래 먹을거리를 만들지 못하게 해 국내 기업을 장기적으로 고사시키기 위해 정밀 타격한 것이다. 국내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당장 차질을 주면 일본의 전자제품 제조사들도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한 조치다.

일본은 한국인들이 북한과 관련된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고, 한·일 과거사에 쉽게 흥분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한다는 약점도 치밀하게 이용하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수출 규제의 원인으로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을 꼽았다. 또 하기우다 고이치 자민당 간사장 대행 등은 한국으로 수입되는 소재가 북한, 시리아 등 적성국가로 넘어가 화학무기로 전용되고 있다며 일본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제징용 문제로 한국 내 반일 감정에 불을 붙이면 한국 정부는 외교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크게 줄어든다. 일본에 굴복하는 정부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북한에 화학무기용 소재가 유입된다는 주장은 북한에 보수적인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실제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이 일본의 이런 주장과 비슷한 자료를 발표해 국내 여론은 혼란으로 빠져든 상태다.


2│화이트 국가 제외 카드도 검토 중

일본이 2단계 수출 규제로 검토하고 있는 것은 화이트 국가 지정 제외다. 화이트 국가는 일본이 정한 조건을 충족시켜 대량살상무기 등을 확산할 우려가 없다고 인정한 국가로 화이트 국가에 지정되면 1000여 종의 전략 물자를 수출할 때 심사가 생략된다. 일본이 그동안 화이트 국가 혜택을 줬던 곳은 한국,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영국, 프랑스 등 27개국이다. 문제는 이런 혜택을 줄지 여부는 국가별 고유의 재량권에 속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현재 유럽연합(EU)도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일본을 제외하고는 전략 물자를 수출할 때 수출 심사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EU가 한국 정부에 수출 심사를 생략하는 혜택을 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일본의 화이트 국가 제외를 불공평하다고 EU에 호소해도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 셈이다. 마이크론 등 자국 기업이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경쟁하고 있는 미국도 한국 정부의 편이 되어주기는 쉽지 않은 상태다.


3│WTO만 믿는 한국 정부

반면 한국 정부는 WTO 제소를 유일한 대응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WTO이사회에 안건을 상정해 일본의 조치가 불공평하다고 주장하는 한편 인사혁신처는 유튜브 방송을 통해 산업부 과장급 공무원을 출현시켜 WTO 제소에서 승리하겠다는 대국민 선전도 했다.

WTO는 1심과 최종심, 두 번의 판결을 받아야 하는데 최종심까지는 4~5년이 걸린다. 현재는 WTO 상소기구 재판관이 7명 정원 중 3명만 남아있는 상태고 오는 12월이면 3명 중 2명도 임기만료로 퇴임한다. 4년 임기 후 후임자를 선임해야 하는데 미국 등 일부 회원국에서 반대해 7년째 상소기구 재판관을 뽑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WTO에 제소해 1심에서 승소한다고 해도 일본이 상소하면 최종심을 진행할 재판관이 없다.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금 일본 정부의 행동을 보면 지난 30여 년간 한국을 대하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꿨다는 생각이 든다”며 “오랜 시간 한국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가 (적대적으로) 변함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방국으로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이제는 적성국가나 다름없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국내 기업들을 한 번 제대로 손을 봐야겠다는 일본의 의중이 이번 규제에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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