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는 대표적인 소비재 기업이다. 청소 도구계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브랜드 ‘스위퍼’의 대성공 이후 지금까지 총 380억달러 이상의 자금을 R&D에 투자해왔지만, 이렇다 할 혁신 브랜드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P&G는 대표적인 소비재 기업이다. 청소 도구계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브랜드 ‘스위퍼’의 대성공 이후 지금까지 총 380억달러 이상의 자금을 R&D에 투자해왔지만, 이렇다 할 혁신 브랜드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기업들의 세계화가 한창 화두였던 2009년 영국에 작은 증류주 회사 ‘십스미스(Sipsmith)’가 새로 생겼다. 인수·합병으로 기존의 기업들이 더욱 몸집을 불리던 상황에서 작은 증류주 브랜드의 탄생은 당시 소비재 유통 업계 흐름과 반대되는 움직임이었다.

게다가 이 회사가 판매한 드라이 진은 병당 30파운드로 대기업 디아지오, 탄카레이가 파는 같은 제품군의 판매가보다 적게는 3분의 1, 많게는 두배 이상 비쌌다. 그런데도 ‘프리미엄 진’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십스미스의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덕분에 회사의 매출은 2014~2016년 60~70% 증가했고, 결국 2016년 매출 기준 세계 3위 주류회사인 일본의 빔산토리에 인수됐다.

십스미스의 주류 시장 공략 성공은 세계 소비재 업계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기류 변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아침으로 (플레인 요구르트 대신) 초바니 요구르트를 먹고, (질레트 대신) 달러 셰이브 클럽의 면도날로 면도를 하고, (타이드 대신) 세븐스제너레이션의 세제로 세탁한다”며 “대기업들이 장악했던 소비재 시장 점유율을 소기업들이 빼앗아 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2011~2016년 사이 소비재 시장에서는 220억달러(약 25조원) 규모의 매출이 대기업에서 소규모 기업으로 넘어갔다. 같은 기간 전체 소비재 시장에서 소규모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23%에서 26%로 늘어났다. 매튜 미참 베인앤드컴퍼니 소비재 부문 글로벌 헤드는 “대규모 마케팅과 세일즈 인력, 대형 제조 공장에 대한 대량 투자 방식만 추구하던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매출 기준 상위 50대 소비재 기업 중 34개 기업들은 매출 둔화와 수익성 악화에 따른 실적 부진에 빠져 있다. 이들의 매출 증가율은 2006~2011년 7.7%에서 2011~2016년 0.7%까지 떨어졌다. 네슬레를 비롯해 캠벨스프, 제너럴밀즈, 요플레, 치리오스, 켈로그, 크래프트 하인즈 등 유명 소비재 브랜드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십스미스 같은 소기업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디지털 채널을 통해 소비자에게 빠르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십스미스는 초창기 소셜미디어 활동을 통해 강력한 팬층을 확보했다. 대기업에 비해 적은 마케팅 예산을 디지털에 투자해 효과를 본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소기업의 득세에 대기업들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으로 “R&D를 이용한 혁신을 통해 다양한 신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인시아드(INSEAD) 경영대의 마르셀 코스트젠스 교수와 미국 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의 그레고리 카펜터스 교수팀은 소비재 기업들이 효과적으로 혁신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연구팀은 먼저 소비재 기업을 R&D 지출 규모에 따라 ‘뉴토니안’과 ‘로렌지안’으로 분류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이름을 딴 뉴토니안 기업은 덩치가 큰 만큼 R&D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대기업이다. 반대로 로렌지안은 나비의 날갯짓이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카오스 이론의 창시자 에드워드 로렌즈의 이름에서 따왔다. 작은 혁신을 추구하는 소비재 기업들을 말한다.


‘뉴토니안’ P&G vs ‘로렌지안’ 레킷벤키저

영국의 작은 증류주 회사 십스미스는 2009년 출범 이후 빠르게 진 시장을 장악해갔다. 소비재 업계에서 작은 기업들이 큰 기업들의 시장 점유율을 빼앗은 대표적인 사례다. 사진 십스미스
영국의 작은 증류주 회사 십스미스는 2009년 출범 이후 빠르게 진 시장을 장악해갔다. 소비재 업계에서 작은 기업들이 큰 기업들의 시장 점유율을 빼앗은 대표적인 사례다. 사진 십스미스

세계 최대 소비재 기업 P&G는 대표적인 ‘뉴토니안’ 기업이다. 보유하고 있는 브랜드만 해도 질레트(면도기)를 비롯해 오랄비(칫솔), 타이드(세탁 세제), 헤드앤드숄더(샴푸), 페브리즈(섬유탈취제), 위스퍼(생리대) 등 48개에 달한다. 대부분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 친 메가브랜드들이다. 그만큼 제품 연구·개발에 투입하는 비용도 막대하다. 지난 10년간 P&G가 R&D에 쓴 돈은 연평균 20억달러(2조3000억원)에 달한다.

그런데 1999년 P&G가 대표적인 혁신 상품인 일회용 걸레 ‘스위퍼’를 내놓은 이후 회사는 이렇다 할 히트 상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특히 스위퍼 출시 이후 지난해까지 R&D에 투자한 비용만 380억달러(약 43조원)에 이른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출시된 브랜드는 여성 생리대 ‘내츄렐라’ 하나뿐이다.

기술 혁신 침체는 바로 매출 부진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조사기관 OC&C 스트래티지 컨설턴트에 따르면 2017년 기준 P&G의 매출 규모는 네슬레(약 912억달러)에 이어 세계 2위(약 646억달러)였지만, 전년 대비 매출 증가율은 0%에 그쳤다.

반면 영국의 소비재 그룹 레킷벤키저는 P&G의 규모에는 못미치지만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 연구팀은 이 회사를 ‘로렌지안’ 기업으로 분류했다. 레킷벤키저의 2017년 매출 규모는 149억달러로 세계 50대 소비재 기업 중 26위였지만, 매출 증가율은 16%에 달했다.

두 기업은 R&D 지출과 매출 규모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마르셀 교수와 그의 연구팀에 따르면 1998~2017년 기준 레킷벤키저 전체 매출에서 R&D가 차지한 비중은 1.53%로 P&G(3.17%)에 크게 못미쳤다. 하지만 연간 매출 증가율 평균은 9%로 오히려 P&G(3.35%)를 크게 앞섰다.

두 기업의 사례를 보면 소비재 분야에서는 막대한 R&D 지출이 무조건적인 혁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대형 소비재 기업들은 나비 효과를 기대하며 R&D 투자를 급격히 줄여야 할까. MIT 슬론 매니지먼트 리뷰에 소개된 소비재 기업들을 위한 ‘핀셋 R&D 투자 원칙’ 세가지를 정리했다.


원칙 1│
‘나비 효과’ 일으킬 작은 부분에 더 많이 투자

12년 전 처음 세상에 나온 애플의 아이폰은 혁신의 대명사가 됐다. 휴대전화가 노트북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면서 산업 지도가 완전히 바뀐 ‘파괴적 혁신’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파괴적 혁신을 추구하기 위해서 R&D에 자원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에 대해 마르셀 교수는 “소비재 기업의 경우 파괴적인 혁신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제품이 가진 작은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방식으로 혁신을 추구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마르셀 교수는 대표적으로 레킷벤키저의 식기세척기용 세제 브랜드 ‘피니시’를 꼽았다. 회사의 베스트셀러가 된 피니시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성공한 케이스다. 피니시는 식기세척기에 넣는 고체 혹은 액체로 된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정제(錠劑)인데, 정제 한가운데 헹굼 보조제가 추가돼 얹혀 있다. 출시 초기 피니시에는 헹굼 보조제가 없었다. 하지만 회사는 몇년간의 연구‧개발을 통해 방식을 바꿔가며 보조제를 추가했다. 소금을 추가해 물을 부드럽게 하고 얼룩과 물때를 방지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그릇 겉면을 보호해주는 새로운 성분도 추가했다.

연구진은 이런 식의 변화를 ‘버저닝(Versioning‧수정하기 전까지 여러 버전의 변화를 주는 것)’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는 “아주 작은 변화지만, 이 모든 시도는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부분에 대한 고객 연구를 통해 나온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는 버저닝에 새로운 사이즈를 추가하거나 모델의 모양이나 기능 등을 살짝 변형하는 등의 시도가 있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다만 버저닝을 여러 차례 거칠수록 제품이 복잡해질 수 있다는 점은 경계해야 한다. 고객 혼동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셀 교수는 “일부를 정리하면서 변형을 취하는 방식을 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업이 작은 것들에 투자하기 전 고려해야 할 요소는 세 가지다. ①소비자들의 열망이 충분한가 ②작은 혁신이 기업의 미래에 상당한 수준의 가치를 추가할 수 있는가 ③혁신이 도입됐을 때 경쟁사와 유통업계가 이를 소화할 수 있는가 등을 확인해야 한다.


피니시는 첫 제품 출시 이후 성분을 추가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지금의 베스트셀러 세제로 자리잡았다.
피니시는 첫 제품 출시 이후 성분을 추가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지금의 베스트셀러 세제로 자리잡았다.

원칙 2│
새로운 아이디어를 여럿 사들이라

지난해 2월 세계 초콜릿 마니아들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 전해졌다. 네슬레의 초콜릿 브랜드 킷캣이 진분홍빛의 초콜릿인 ‘루비 초콜릿’을 한국과 일본 시장에 세계 최초로 출시한 것이다. 다크, 밀크, 화이트 세가지 색상만 있던 단조로운 초콜릿 업계에 네번째 색상이 등장했다는 수식어가 따랐다.

첨가물 없이 순수하게 천연의 분홍빛 초콜릿을 내놓으며 업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온 네슬레의 시도는 자체 기술 개발을 통해 나온 게 아니다. 스위스의 초콜릿 회사 ‘배리 칼리보’가 카카오 열매에서 분홍빛 색상을 추출해내 초콜릿을 만드는 원천기술을 갖고 있다. 배리 칼리보의 기술은 10년간 자체적으로 연구‧개발한 결과다. ‘루비 초콜릿’은 이후 킷캣의 다양한 제품군에 적용돼 세계에서 팔리고 있다.

네슬레의 사례처럼 대형 소비재 기업들이 혁신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조직 밖 아이디어를 사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마르셀 교수는 주장했다. 이 방법을 쓰면 조직 입장에서 당장 시도하기 위험한 R&D를 아웃소싱할 수 있다.

이 원칙은 소비재 기업뿐만 아니라 IT, 제약, 의류 등 여러 산업계들도 적용해볼 만하다. 실제로 R&D가 핵심 요소인 제약사들은 최근 초기 단계의 제약 연구를 작은 회사나 대학 연구실에 맡기다가,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면 이를 사들이는 방식을 쓰고 있다. 또 R&D 아웃소싱을 전문으로 하는 글로벌 기업들도 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컨설턴트는 세계 800명이 넘는 직원이 고객사를 위해 R&D를 진행하고 있다.

한편 산토리가 십스미스를 인수했던 것처럼 아예 회사를 사들이는 것도 대형 소비재 기업들이 고려해볼 만한 방법이다. 실제로 유니레버는 2016~2017년 총 19개의 소기업들을 사들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달러셰이브클럽 인수다. 일주일에 1달러만 내면 면도날을 정기 배송해주는 획기적인 서비스에 미국 소비자들은 열광했고, 2016년 시장점유율을 10%까지 끌어올린 스타트업이다. 유니레버는 이 회사를 10억달러(약 1조원)에 사들였다.

펩시코도 지난해 8월 탄산음료 시장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탄산수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소다스트림을 32억달러에 인수했다. 소다스트림은 탄산수를 제조하는 기계를 만든다.

전문가들이 대기업에 R&D 아웃소싱을 권유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입장에서 섣불리 움직이기보다는 점유율을 사수하는 편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파괴적 혁신’ 이론을 처음 들고 나온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경영대학원 교수는 논문에서 “업계의 리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현상태 유지를 선호한다”고 주장했다.


네슬레는 천연으로 색을 낸 분홍빛 초콜릿 ‘루비 초콜릿’을 내놨다. 카카오 열매에서 자연적으로 색을 추출하는 이 기술은 스위스의 초콜릿 회사 ‘배리 칼리보’가 10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내놓았다.
네슬레는 천연으로 색을 낸 분홍빛 초콜릿 ‘루비 초콜릿’을 내놨다. 카카오 열매에서 자연적으로 색을 추출하는 이 기술은 스위스의 초콜릿 회사 ‘배리 칼리보’가 10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내놓았다.

원칙 3│
마케팅과 R&D의 환상적인 컬래버레이션

기술 혁신이 잘 이뤄졌더라도 마케팅이 부족하면 시장에서 성공할 수 없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혁신과 마케팅이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르셀 교수는 ‘뉴토니안’의 혁신과 마케팅의 협력이 필수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마르셀 교수는 IT 기업인 인텔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보통 IT 기업들은 R&D에 막대한 돈을 투자해 혁신을 추구한다. 인텔이 대표작 CPU ‘386’을 출시했던 1980년대, 경쟁사들은 비슷한 이름의 제품을 출시하며 인텔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인텔은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라는 마케팅 캠페인을 시작했다. 컴퓨터 본체에만 관심을 갖고 CPU 브랜드에 관심이 없었던 당시 소비자들은 인텔의 CPU가 내장됐는지 여부를 따지기 시작했다. 또 인텔은 인텔 인사이드 스티커를 본체에 붙여 파는 회사에는 CPU 구입 대금을 10% 깎아주는 등의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 캠페인은 전 세계에서 효과를 거뒀다.

특히 소비재 기업들은 R&D보다 마케팅에 더 힘을 쏟는 경향이 있다. 유독 소비재 기업들이 성공적인 마케팅을 통해 브랜드 힘을 강화하고 가치를 창출해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셀 교수는 두 가지를 함께 끌어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외부 파트너십이나 인수에 나설 후보자들을 적극적으로 물색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마구 나올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새로운 혁신을 발견했다면, 이를 경영진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정치적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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