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노예들은 전문직종으로도 진출할 수 있었는데, 그 직업군 중 하나가 ‘검투사’였다. 이들은 전투 중 여섯 번 싸우면 한번꼴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사진 플리커
고대 로마의 노예들은 전문직종으로도 진출할 수 있었는데, 그 직업군 중 하나가 ‘검투사’였다. 이들은 전투 중 여섯 번 싸우면 한번꼴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사진 플리커

현대인들은 로마에서 ‘놀라운 문명’을 발견한다. 콘크리트를 사용해 지하에서 지상까지 활용하는 거대한 건축물은 대부분 허물어져 본 모습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형태와 구조를 복원해 보면 현대에도 쉽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디자인과 실용적인 기능성이 감탄스럽다. 로마의 궁전에는 전기장치 없이도 작동하는 에어컨, 목욕탕, 정원, 옥상의 야외카페, 서재, 응접실, 나만의 골방 등 필요한 것은 다 있다. 현대인이 지금 그대로 들어가 살아도 아쉬운 것 없이 안락하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겠다.

그런데 로마식 저택생활을 정말로 만끽하려면 노예가 반드시 필요하다.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고 로마가 지중해 제국으로 변모하면서 노예가 대거 공급됐다. 노예들은 처음에는 농장으로 갔다. 이내 노예들은 다양한 직군으로 퍼져갔다. 하녀, 주방노예, 막노동꾼 같은 단순 노동 시장으로만 간 것도 아니다. 기술자, 집사, 재무담당, 점원, 상인, 가정교사와 같은 기능직과 전문직에도 노예들이 대거 진출했다. 그런 전문 직종 중 하나가 검투사다.

검투사와 검투 경기는 지금껏 우리가 상상했던 로마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검투는 ‘고대인의 야만과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로마 사람들은 검투경기를 너무 좋아했다. 로마는 도시마다 시장을 선거로 뽑았는데, 그때 당시 “시장에 선출되는 사람은 1년에 며칠 이상 검투경기를 제공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을 정도였다.

검투사들은 처음에는 대개 전쟁포로 출신들이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자유민들도 검투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처럼 검투사가 쇠사슬을 차고 지하 감옥에서 생활하지도 않았다. 검투 경기가 매번 생사를 걸고 싸우고, 패배한 자에게 관중들이 엄지손가락을 꺾어 죽음을 내리는 그런 수준의 살인극도 아니었다. 사람과 싸우는 검투경기보다는 동물과 싸우는 경기가 더 많았다. 액션 영화처럼 시나리오를 가지고 퍼포먼스를 펼치는 무대도 있었다.

포에니 전쟁 후 로마가 ‘영광의 제국’으로 진입하기 시작하던 시기, 검투사들이 주도하는 반란이 터졌다. 로마 당국은 처음에는 이를 폭동, 떼강도 수준의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역에서 파견한 군대가 검투사 출신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패배했다. 검투사들은 빼앗은 로마군의 장비로 무장하고 군대로 변신했다. 소문이 퍼지자 주변의 노예들이 탈주해 이들에게 가세했다.

노예들의 지도자는 ‘스파르타쿠스’였다. 트라키아 유목민 부족의 지도자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세력이 불어난 스파르타쿠스는 지방 군단을 격파하고, 로마에서 파견한 정규 로마군 군단마저 무너뜨렸다. 하지만 노예군단은 이탈리아 반도를 탈출하기 직전, 머뭇거리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이탈리아 남부로 방향을 틀었다.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도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남아 있지 않고, 비록 노예 상태라고 해도 로마에서 맛본 문명 세계의 유혹을 떨쳐버리기도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방향을 전환한 그들은 이탈리아 반도를 닥치는 대로 약탈하며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자신들보다 앞서 노예들이 대규모로 봉기했던 시칠리아였다. 게다가 시칠리아는 로마 제국에 편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들은 시칠리아의 노예 운동가들과 합세해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노예 군단은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의 반도 끝 발가락 부분에 도착했지만, 바다 건너 시칠리아로 데려다 주기로 했던 해적들이 배신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 뒤로 로마가 새로 임명한 토벌군 사령관이자 훗날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이루는 대부호 크라수스가 추격해 왔다. 크라수스는 오도가도 못하는 스파르타쿠스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 넣고 장벽을 쌓아 가뒀다. 팽팽한 대치상태가 계속됐다.

이때 또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이탈리아 반도가 노예 반군에 유린당하자 로마는 해외에 나가 있는 로마 정예 군단을 국내로 소환했다. 이 정예 군단은 직업 군인 수준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로마의 폼페이우스의 군단이 이탈리아로 상륙해 노예 군단을 압박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양면에서 포위될 위험에 처하자 방벽을 뚫고 나가 크라수스에게 도전했다. 최후의 전투에서 노예 군단은 패배한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쫓기고 있었다.

전투에서 밀린 노예군단은 하필 폼페이우스가 오는 쪽으로 도주했다. 폼페이우스는 신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들을 쳐부쉈다. 결국 지도자 스파르타쿠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노예 군단의 반란은 로마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국내 주둔 병력의 형편없는 실력도 충격거니와, 로마의 경제 성장에 따른 그늘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소득이 증가할수록 소득 격차는 커지는데, 빈민들의 절대 소득이나 생활 수준은 높아져도 상대적인 박탈감의 확대를 무시할 수 없다. 이는 기득권과 사회제도에 대한 불만을 남긴다.


제도 개선 후 중산층으로 도약한 노예들

로마는 문제를 깨닫고 노예들이 열심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동기 부여’에 중점을 두고 제도적 보완을 시작했다. 노예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지 않으면 노예제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해방 노예에서 자유민으로 가는 길을 확실하게 보장하도록 제도를 개선했다. 이 사건 이후 로마의 노예들은 중산층으로 도약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지역의 의원, 시장직, 사령관에 이어 황제가 되기도 했다. 검투사들에 대한 대우와 운영 방식도 개선됐고, 검투사의 반란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도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법과 제도로서 평등을 달성하고자 하는 시도가 눈에 띈다. 제도로 만들어 낸 인위적인 평등은 얼핏 권위의식을 제거하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직원의 의욕을 경직시키고 극도의 비효율을 초래한다.

조직원에게 성취 욕구를 부여하는 데 제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문화다. 조직이 숙련자와 중간급 리더들을 인정해야 한다. 누군가를 지나치게 따라다니며 의전을 강조하거나, 직위, 학벌 등 전형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줄 세우기보다는 구성원의 존경을 받는 인격과 미덕을 소리 높여 칭찬해야 한다.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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