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재벌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사진은 지난해 5월 일본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연설하는 두테르테 대통령. 사진 블룸버그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재벌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사진은 지난해 5월 일본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연설하는 두테르테 대통령. 사진 블룸버그

“만약 아얄라와 판길리난을 친구로 둔 사람이 있다면 가서 전해주길 바란다. 나와 마주치는 날엔 보디가드가 몇 명이든 상관없이 얼굴을 뭉개버리겠다고, 이 개XX야.” (2019년 12월 4일)

“전부 도둑들이야, 개XX들.” (2020년 1월 23일)

‘재벌과의 전쟁’을 선포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하 두테르테)의 공격 강도가 거세지고 있다. 아얄라는 필리핀 최대 재벌 아얄라그룹의 총수 하이메 아우구스토 조벨 데 아얄라, 판길리난은 또 다른 재벌 퍼스트 퍼시픽그룹의 마누엘 판길리난을 말한다. 집권과 동시에 ‘마약과의 전쟁’을 벌여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던 두테르테가 이번에는 재벌을 겨누고 전쟁을 선포했다.

갈등은 지난해 3월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벌어진 물 부족 사태에서 시작됐다. 당시 가뭄으로 물 부족 현상이 심각해져 6~18일씩 단수되자 수백만 명의 주민이 제한 급수를 받았다. 비난의 화살은 이 지역 물 공급을 담당하는 아얄라그룹 계열사(마닐라 워터)와 퍼스트 퍼시픽그룹 계열사(매이니라드 워터)로 향했다. 두 기업은 1997년 정부와 체결한 계약에 따라 1600만 명에게 수돗물 공급 서비스를 하고 있다. 두테르테는 이를 “납세자들에게 불리한 계약”이라고 주장하며 법정 싸움을 벌였는데 모두 패소했다.

두테르테의 표적이 된 곳은 또 있다. 현지 최대 방송사 ABS-CBN이다. 2016년 대선 전날 두테르테 당시 후보의 선거 캠페인을 내보내지 않았던 것과 취임 후 그의 업적인 ‘마약과의 전쟁’을 인권 학대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보도했다는 점이 문제 됐다.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이 단순히 마약과의 전쟁 2탄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인권 단체 추정 1만2000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범죄 소탕 작전보다 타깃층이 좁고 명확하지만, 필리핀에서 이들의 위치는 매우 높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면 두테르테의 정치·경제적 입지가 강화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월 24일 “2016년 두테르테의 집권 이후 가장 규모가 크면서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두테르테가 조준하는 대상은 모두 전(前) 정권, 즉, 세계 최초 모자(母子) 대통령으로 유명한 고(故)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과 베니그노 아키노 전 대통령과 연결된다. 코라손 전 대통령은 시민의 힘으로 민주 정권을 탈환한 ‘필리핀 민주화의 상징’으로, 아들 베니그노 전 대통령은 취약했던 경제 성장세를 6%대로 올려놓은 업적으로 유명하다.

아키노 정권의 흔적은 두테르테 집권 이후 모두 개혁의 대상이 됐다. 실제로 두테르테는 1800억달러(약 219조원) 규모의 인프라 투자 정책 ‘빌드, 빌드, 빌드(Build, Build, Build)’에 주력했는데, 이 과정에서 전 정권의 많은 제도가 뒤집혔다.

윌리엄 페섹 동아시아 전문 칼럼니스트는 ‘포브스’에 “정부의 효율적인 공공 정책과 지속 가능성 보호책 등이 사라졌고, 아키노 정권이 만들어놓은 민관 협력 전략도 정부 주도 거래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이번에 타깃이 된 아얄라그룹과 퍼스트 퍼시픽그룹, ABS-CBN 모두 아키노 정권을 지지해왔다.


베니그노 아키노 전(前) 대통령과 그의 모친 고(故)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사진 블룸버그
베니그노 아키노 전(前) 대통령과 그의 모친 고(故)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사진 블룸버그

연결 포인트 1
두테르테 지지율 87%

필리핀에서 가족·족벌 정치는 새삼스럽지 않다. 지역별 유력 가문이 막대한 재산을 기반으로 선거에서 승리해 정치권 요직을 세습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마르코스·아키노·아로요·로페즈 가문 등을 중심으로 100개 이상의 족벌이 필리핀 정치를 장악하고 있다. ‘나라를 움직이는 10개 가문’이라는 말도 따로 있을 정도다. 이들은 파벌을 이뤄 국가 경제, 사회 정책 전반에 깊숙이 관여해왔고, 그 결과 소수 재벌이 부를 독점하게 됐다.

대표적인 전통 부호가 아얄라 가문이다. 1834년 스페인 식민 지배 시절 설립돼 필리핀 최대이자 최고(最古) 기업으로 큰 아얄라그룹은 부동산으로 막대한 부를 형성했다. 이후 수자원, 금융, 통신, 제조, 헬스케어, 리조트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ABS-CBN의 대주주인 금융·미디어 재벌 로페즈 가문도 있다. 이런 배경 탓에 정치·경제 권력을 독점한 소수 집단에 대한 공격은 정치적 의도에도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 막말 이후 두테르테의 지지율은 87%까지 상승,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연결 포인트 2
경제에는 악재

주요 기업에 대한 두테르테의 공격은 필리핀 경제에 악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족벌 가문이라는 오명에도 아얄라, SM투자, JG서밋 등은 제조 기반이 없는 필리핀 경제에 성장 동력이 돼왔다. 회복세를 보이던 필리핀 경제 상황도 최근엔 좋지 않다. 지난해 필리핀의 경제 성장률은 5.8%를 기록했다. 6%대 성장을 보였던 앞선 기록보다 둔화했다. 외국인의 직접 투자 규모도 2017년 정점을 찍은 이후 둔화하고 있다. 집권 2년 차, 100억달러를 넘겼던 외국인 순투자금은 지난해 1~11월 기준 60억달러를 겨우 넘어섰다.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달 초 압박에 못 이긴 아얄라그룹은 필리핀의 항구 재벌 엔리케 라손에게 수자원 사업권을 팔겠다고 발표했는데, 엔리케는 친(親)두테르테파로 분류된다. 대통령 입김에 따라 경영이 흔들리자 주가는 급락했다. 아얄라그룹의 마닐라 워터 주가는 33% 이상 급락했고, 계열사 주가도 모두 떨어졌다. 퍼스트 퍼시픽그룹 주가도 같은 기간 16% 이상 하락, 투자 심리 악화를 반영했다.


2015년 미 해군과 필리핀 해군이 USS포트워스호에서 합동 훈련(CARAT)을 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2015년 미 해군과 필리핀 해군이 USS포트워스호에서 합동 훈련(CARAT)을 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연결 포인트 3
정치 가문 꿈꾸며 신흥 재벌 띄워

임기를 2년 남짓 남긴 두테르테는 대내외 지지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 6년 단임제인 필리핀 헌법상 두테르테의 임기는 2022년까지이지만, 아들과 딸이 정계 주요 요직을 꿰차면서 정치 유력 가문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필리핀 중간선거에서는 장녀 사라 두테르테 다바오시 시장이 압승을 거두며 차기 대선 후보 반열에 올랐다.

경제적으로는 신흥 재벌 띄우기에 나섰다. 이른바 ‘두테르테가르히’다. 러시아 신흥 부호를 뜻하는 ‘올리가르히(oligarchi)’에서 나온 말이다. 대표적인 두테르테가르히는 데니스 유이. 그는 2016년 대선 캠프에서 두테르테를 지원한 공을 인정받아 올해 그가 이끄는 컨소시엄이 통신망 운영권을 따냈다.

외교·국방 분야에서는 친중 노선을 강화하고 있다. 2월 12일 필리핀 정부가 미국 측에 통보한 VFA(방문군 협정·Visiting Forces Agreement) 종료가 대표적이다. 미국과 필리핀 합동 군사훈련의 근거가 되는 12년 된 협정 VFA가 깨지면 남중국해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는 미군의 행보에 차질이 생긴다.

송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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