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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 19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 기술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대통령과 팀 쿡 애플 CEO. 사진 블룸버그

“해외 보유 현금을 미국으로 들여오면서 세금 380억달러(약 41조원)를 내겠다.”

애플은 지난 1월 공식 성명을 내고 이같이 밝혔다. 미국 CNBC 방송은 “애플이 해외에 보유한 현금을 가져오면서 내야 하는 세율이 15.5%라는 점을 감안하면 애플이 해외에서 가져올 현금은 총 2450억달러(약 265조원)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애플이 해외에 쌓아 둔 현금을 거의 전부 가져오는 셈이다. 또 향후 5년간 제2 사옥과 데이터센터 건설 등으로 미국에서 2만 명을 추가로 고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애플은 미국에 고율의 법인세를 내지 않기 위해 해외에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애플은 미국에서 고용을 창출하지 않고, 엄청난 규모의 현금을 해외에 쌓아 두고 법인세를 제대로 내지 않는다고 비난받았다. 하지만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서명한 세법 개정안엔 기업이 해외에 보유한 현금을 들여올 경우 한시적으로 세율을 15.5%로 낮추는 내용이 포함됐다. 법인세율은 21%로 낮췄다. 트럼프 대통령의 파격적인 감세안이 시행되자 애플이 태도를 바꿔 해외에 둔 현금을 미국으로 가져오겠다고 밝힌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내 정책이 애플 같은 기업들의 현금을 미국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약속한 바 있다”며 “미국 노동자와 미국이 크게 이긴 것”이라면서 애플의 결정을 환영했다.

해외 보유 현금을 둘러싼 미국계 글로벌 기업과 트럼프 대통령의 다툼은 트럼프의 승리로 끝난 것 같았지만, 얼마 전 분위기가 반전됐다. 알파벳(구글의 지주회사), 오라클, 넷플릭스가 제출한 보고서에서 해외 보유 현금 항목이 사라진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해 말 이 항목을 뺐고, 애플은 이보다 더 빨리 작년 9월 결산부터 제외했다. 그전까진 매 분기 발표하던 정보였다. 블룸버그는 “분기 보고서에서 해외 보유 현금을 공시하지 않아도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고 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 항목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 보고서에서 애플은 2523억달러(약 272조원), MS는 1321억달러(약 143조원), 알파벳은 628억달러(약 68조원), 오라클은 585억달러(약 63조원)를 해외에 쌓아두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 기업이 해외 보유 현금을 공시하지 않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해외에 쌓아 둔 돈을 미국으로 가져 오라고 압박하는 상황에서 아예 정보를 노출시키지 않는 편이 기업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빌라노바대 로스쿨의 리처드 하비 교수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해외 보유 현금 공시를 중단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결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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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언론과 전문가들이 이들 기업이 해외에 쌓아 둔 현금이 얼마인지 알 수 없게 돼 비판도 어렵게 된다. 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입수해 작년 11월 공개한 조세 회피 기록 ‘파라다이스 페이퍼스’를 보면, 애플은 아일랜드가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국제적 압박을 받아 세법을 개정할 움직임을 보이자 자회사를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저지섬으로 옮겼다. 애플이 소재지를 옮긴 자회사는 당시 해외 보유 현금 2520억달러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애플 오퍼레이션스 인터내셔널’과 지식재산권 일부를 소유한 ‘애플 세일즈 인터내셔널’이다. 그전까지는 애플이 해외에 얼마나 현금을 쌓아 두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어 비판하기도 쉬웠다. 이젠 대외비 내부 문서를 파헤치는 정도의 심층 탐사 보도가 아니면 애플의 편법적 세금 회피의 진상을 알기 어려워졌다.

다만 애플·구글 등이 해외 보유 현금 항목을 공시하지 않더라도, 해외 자회사에 쌓아 둔 현금을 본국으로 가져올 때 세금은 제대로 내야 한다. 안종석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해외 자산을 본국으로 이동시키려면 당국에 신고하는 것이 필수”라며 “공시는 하지 않는다 해도 세금은 다 내야 한다”고 했다.


트럼프 진짜 승리했나?

트럼프 행정부의 세제 개편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보유한 현금이 더 많아진 기업도 있다. 페이스북이 해외에 쌓아 둔 현금은 지난해 말 159억달러(약 17조원)에서 올해 3월 말 201억달러(약 22조원)로 26.4% 늘었다.

애플에 이어 현금을 미국으로 반입하려는 기업이 있기는 하다. 시스코는 현금 자산 670억달러를 가져와 향후 2년간 440억달러를 주주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쓰고 미국 내 인수·합병(M&A)과 시설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지난 2월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계 글로벌 기업들이 애플과 시스코를 제외하면 해외 보유 현금의 본국 송금을 서두르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2월 알파벳·MS·아마존 등은 세제 개편 법안이 발효된 후 처음 열린 실적 발표회에서 해외 보유 자금 사용이 예전보다 자유로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투자 계획엔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에이미 후드 MS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투자를 위한 기회를 포착했다면 세제 개혁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고, 루스 포랏 알파벳 최고재무책임자는 “자본 배치에 대한 우리의 방식엔 변화가 없다”고 했다. 페이스북은 아예 관련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다.


plus point

미국 법인세율 낮춰도 아일랜드에 현금 두는 게 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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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과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정보기술) 기업이 전 세계에서 이익을 내고도 조세회피처를 이용해 각국에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이용하는 방법이 ‘더블 아이리시 위드 어 더치 샌드위치(Double Irish With a Dutch Sandwich)’다.

이 방법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먼저 미국의 IT 기업 A사가 아일랜드에 법인 B사를 세우는데, 이 B사의 관리 회사를 조세회피처에 세운다. 아일랜드의 세법은 관리 회사가 있는 곳에 조세 관할권을 주기 때문에 B사는 조세회피처의 법률에 따라 법인세를 전혀 내지 않는다. B사는 아일랜드에 해외 영업용 자회사 C사를 세우고, 네덜란드에 D사를 세운다. A사는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C사에 몰아준다. C사가 D사에 로열티 명목으로 송금했다가 다시 B사에 건네면 아일랜드와 네덜란드의 조세 협약상 세금이 전혀 없다. B사가 이익을 아일랜드에 두면 미국이 세금을 매길 수 없다.

아일랜드는 세법을 개정해 2015년부터 이 방법으로 세금을 회피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이미 아일랜드에 자회사를 두고 있는 회사는 이 조세 회피 방법을 2020년까지 사용할 수 있다. 또 아일랜드의 법인세율은 최고 12.5%로 미국이 낮춘 법인세율 21%보다 더 낮아 이익을 미국에 보내지 않고 아일랜드에 두는 편이 유리하다.

 

손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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