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데어 터너(Adair Turner) 前 영국 금융감독청장, 영국산업연맹(CBI) 대표, 메릴린치 유럽법인 부회장
아데어 터너(Adair Turner)
前 영국 금융감독청장, 영국산업연맹(CBI) 대표, 메릴린치 유럽법인 부회장

거의 모든 사람이 일본 경제 모델이 붕괴했다고들 말한다. 1991년 이후 일본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0.9%였다. 이는 이전 20년 경제성장률 평균치 4.5%를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대규모 재정 적자, 제로에 가까운 인플레이션에 성장률 둔화세가 결합하면서 일본 정부의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50% 수준에서 236%까지 확대됐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2년 정권 재탈환과 함께 ‘아베노믹스(Abenomics)’를 들고나오면서 인플레이션을 2%대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후 5년간의 제로 금리 정책과 대규모 양적완화에도 정부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합계 출산율 1.4명’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일본의 노동력이 향후 50년간 28% 감소한다는 것, 노인 의료 서비스 수요가 감당 못할 수준까지 증가할 수 있다는 것, 이미 GDP의 4%에 달하는 재정 적자 규모가 더 극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부채 위기를 피하려면 세수 증대와 공공 지출 삭감이 필수다. 구조적 개혁 역시 빈약한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 중 하나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 모델이 실패했다는 통념은 잘못됐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인구 감소 추세가 위협 요인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일본의 부채는 드러난 것보다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다른 선진국보다 뒤처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급속한 인구 감소세에 따라 앞으로도 지속할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국민 복지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인 1인당 국내총생산은 일본의 경우 0.65%(지난 2007년 이후 연평균)로 같은 기간 미국과 같거나 영국(0.39%), 프랑스(0.34%)보다 높다. 물가가 높은 선진국 특성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또 미국의 경우 지난 25년간 1인당 국내총생산이 (일본보다) 빠르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기간 미국의 불평등이 심화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미국은 불평등 탓에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 증가율이 정체됐다. 일본의 실업률은 현재 3% 미만이다(미국 3.9%).

많은 국민이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도구’로서 일본 경제는 그 어떤 나라보다 잘해나가고 있다. 또 일본 범죄율이 세계 최저 수준인 것으로 미뤄볼 때, 일본의 사회 시스템에 뭔가 긍정적인 부분이 있을 것이다. 관광산업 붐도 일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수는 15년 전 600만명에서 최근 2000만명까지 증가했다.

물론 인구통계학적으로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은 악재다. 또 출산율이 1.4명을 기록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인구 급감에 따른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 정부 정책대로라면 퇴직자 대비 노동자 비율이 2.1에서 1.3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근로 연령이 일괄적으로 65세에 고정돼있는 데다, 퇴직자 증가 추세를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퇴직 연령을 평균 70세까지 올리면 퇴직자 대비 노동자 비율은 2050년 기준 1.8로 (지금보다는 떨어지지만) 적당히 하락할 것이다.

일본은 노인들의 경제 활동을 연장할 수 있는 기술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특히 로봇 공학 발전으로 적은 인원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일본의 국가적 논쟁거리에서는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우려는 빠져있다. 실제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오른 ‘100세 인생(The 100-Year Life·한국에서는 부제로 ‘저주가 아닌 선물’이 붙었다)’은 고령화의 장단점을 함께 찬양한 책이다.

급진적으로 자동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의 세계에서는 인구 급증보다는 기대수명 상승과 인구 감소가 직면하기 수월한 문제일 수 있다. 실제로 일부 신흥국의 경우 인구 급증이 일자리 창출 속도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 전체 부채, GDP의 60% 수준

이제 정부 부채와 지속 불가능한 재정 적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위기를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비관론자들은 실망할 내용이다. 현재 일본 정부의 총부채는 GDP의 236%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은 일본 정부의 순부채(정부 소유 금융 자산을 차감한 것)를 이보다 훨씬 낮은 GDP의 152% 수준으로 추산하고 있다.

또 일본은행이 보유한 일본 정부 국채는 GDP의 90%에 달하는 수준인 데다, 궁극적으로 정부로부터 받는 국채 이자도 다시 배당 형식으로 국가에 반환된다. 정부 소유의 금융 자산에다 정부·가계 부채를 제외하면 일본 전체의 부채는 GDP의 60% 수준으로 조정된다. 이 정도의 부채 규모는 (정부의 재정 적자가 수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수준이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한 나라의 총부채 수준이 GDP의 250%, 순부채가 GDP의 150%라고 가정해보자. 이 나라 중앙은행은 GDP의 100%에 달하는 국채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제외한 순부채는 50% 수준이라고 치자. 또 인플레이션과 실질 성장률이 각각 1%씩을 기록, 그 결과 명목 GDP 증가율이 2%대를 유지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국채 금리가 2%(일본 국채 금리의 경우 0.1%)일 때 부채비율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이다. 매년 정부 근본적자(세입에서 세출을 뺀 것)가 GDP의 4%, 전체 적자가 5%를 넘어서더라도 말이다.

이게 바로 일본 정부가 하는 일들이다. 그리고 세계 국채 매입자들은 이런 명백히 지속불가능한 행동에 두려움으로 반응하는 대신 제로를 조금 넘는 금리의 일본 국채를 사들이기 위해 줄을 서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상황들이 여러 단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 관리 비용 급증으로 일본의 재정 적자는 더 확대될 것이다. 또 경제 이론에 따르면 어느 한 시점이 되면 국채 금리가 명목 GDP 증가율을 웃도는 상황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정부는 재정 상황을 통합하는 중기적인 정책을 내놔야 할 것이다. 또 출산율 상승 가능성이 적은 상황에서 고령화 사회에 대응하려면 일본 정부는 필수적으로 기술 발전을 꾀해야 한다.

하지만 흔히들 말하는 일본의 미래에 대한 우려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많은 나라가 일본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면 그게 차라리 운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데어 터너 신경제사고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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