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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쯤 전 사회 초년병들은 회식(會食) 자리에서 기업 문화와 직장 분위기 등을 배웠다.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의 스타일을 눈치껏 따라잡고, 과장·대리들의 모습을 곁눈질하면서 사회생활의 ABC를 배우기도 했다. 가끔은 술잔과 육두문자가 날아다니는 활극으로 끝을 맺기도 했지만 회사 문화에 녹아들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물론 과음은 피할 길이 없었다. 최악 가운데 최악은 ‘충성주(忠誠酒)’였다. 큰 그릇(때때로 대야가 등장했다)을 가져다 놓고 양주‧맥주‧소주를 멋대로 부었다. 이걸 좌중이 돌아가면서 마시는 것이다. 맨 마지막 순서가 과장님 또는 부장님이었다. 말단 직원들이 충성을 증명하는 길은 되도록 많이 마셔서 부장님이 술을 덜 마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옛 회식 문화

대야 같은 대접을 두 손으로 들고 들이붓는 모습을 맨 정신에 보면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일 것이 분명했다. 그쯤 되면 넥타이는 목에 매달려 있지 않고 머리띠 역할을 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노래 몇 곡(노래방에서 부장님이 좋아하는 노래를 빨리 입력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면 자정이 넘기 일쑤였다. 회식 자리를 앞둔 오후에는 소련 시절 비밀경찰 KGB 요원들에게 지급한 비밀 약품을 토대로 만들었다는 술 덜 취하는 약, 술 빨리 깨는 약 등을 먹기도 했다.

외환위기가 터진 뒤로 이런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사회도 달라졌고, 회사도 바뀌었다. 업무추진비라는 이름으로 부어라 마셔라 하던 자리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몇 해 전부터는 신입사원들이 회식을 줄이자고 건의할 정도로 옛 회식 문화는 사라지고 있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의 시대가 왔다. ‘술 마시지 않는 회식’이 유행한다. 한 대기업은 ‘1주일 전 공지하고, 1차에서 끝내고, 9시 전에 마무리하자’는 ‘회식 119’라는 캠페인을 벌인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부담스러운 것이 회식이다. 얼마 전 한 취업전문 포털사이트가 직장인 약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10명 중 6명이 회식이 부담스럽다고 했다(56.6%). 가장 큰 이유는 퇴근 후 개인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63.8%)이었다. 상사와의 술자리가 불편하고, 과음하기 쉽고, 다음 날 출근·업무에 지장을 준다는 점 등을 꼽았다. 6월 중순 한국무역협회 상하이지부가 한국 기업 취업을 원하는 중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음주·회식 문화(29.1%)와 경직된 상하관계(28.7%)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엊그제 고용노동부가 “회식은 근무시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다. 7월부터 시행된 근로시간 단축을 앞두고 공개한 ‘가이드 라인’에 들어 있는 유권 해석이다. 주 52시간의 근무시간을 산정할 때 회식은 포함하지 않기로 했다. “사기 진작, 조직 결속, 친목 도모 차원이어서 근로시간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직장인들 입장에서는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나 마찬가지다. “드디어 회식이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말도 나온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현대자동차 이야기인 ‘가보지 않은 길’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산업화 초기에 대부분의 기업이 ‘직장을 가족같이’라는 사훈을 내걸었다. 노동자를 이념적으로 세뇌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구호였다.” 술잔과 노래로 뒤범벅된 회식은 ‘가족이 되자’는 통과 의례였던 측면이 있다. 물론 권위주의적이고 강압적이어서 이제는 외면받고 있다.

일본의 ‘회사형 인간’도 유명하지만, 한국 넥타이 부대의 직장 충성도와 헌신도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그렇게 뭉칠 수 있게 만든 접착제 중 하나가 회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 날 아침 쓰린 속을 부여잡게 만든 충성주는 사라져야겠지만, 같은 길을 걷는 동료들과 신뢰를 쌓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찾아 봐야 할 듯싶다. 혼밥·혼술족(族)만 늘어간다면 샐러리맨의 길이 너무 외롭지 않을까?

이진석 조선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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