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트로닉의 브랜드 ‘밀워키’ 드릴을 사용하는 작업자. 사진 밀워키
테크트로닉의 브랜드 ‘밀워키’ 드릴을 사용하는 작업자. 사진 밀워키
이필상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아시아리서치 본부장 서울대 경제학, ‘아시아 투자의 미래’ 저자
이필상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아시아리서치 본부장 서울대 경제학, ‘아시아 투자의 미래’ 저자

요즘은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관련 뉴스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런데 배터리가 전기차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전기차용 배터리가 내연기관을 능가할 수준에 이르렀다면 다른 분야에서도 혁신을 만들고 있지 않을까? 필자는 아시아 기업이 배터리 혁신을 산업과 상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다. 배터리 기술이 적용되면 획기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산업이 뜻밖에 많았다. 배터리 덕분에 모바일폰이 대중화된 것은 우리가 매우 잘 아는 사례다. 하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영역인 전동공구(power tool), 전자담배, 무선이어폰, 에너지 저장장치(ESS) 등도 배터리 덕분에 큰 변화를 맞고 있다.

대부분의 기술 혁신이 그러하듯, 기술 혁신기엔 두 가지 부류의 기업이 있다. 첫 번째는 기술의 혁신, 그 자체에 이바지하는 기업이다. 두 번째는 혁신 기술을 빠르게 흡수해서 개선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경쟁사보다 먼저 내놓는 부류의 기업이다. 첫 번째 부류의 기업으로 필자는 배터리 장비 업체를 꼽고 싶다. 배터리 셀 제조사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국내 기업인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과 중국의 CATL, 비야디(BYD), 일본의 파나소닉 같은 회사는 연일 언론에 오르내린다. 그런데 이들 배터리 제조사들에 생산 장비를 공급해주는 기업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실 배터리 장비는 매우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다.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를 압도하고 시장을 넓히기 위해서는 배터리 원가를 더욱 낮춰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배터리 장비가 기여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배터리 셀 생산 비용 측면에서 보자. 리튬과 코발트같이 글로벌 단일 가격이 적용되는 원자재 부문은 경쟁사보다 원가를 낮추기 어렵다. 하지만 장비 원가를 낮추면 배터리 셀 원가도 절감할 수 있다. 배터리 셀 생산 원가에서 장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30~40%에 이른다. 여기에 장비를 통한 배터리 성능 개선 효과까지 감안하면, 장비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실제로 CATL이 글로벌 1위 배터리 업체로 등극한 데에는 배터리 용량 단위당 장치 비용을 중국 내 혹은 글로벌 경쟁사 대비 최대 30%까지 낮췄기 때문이다. 배터리 장비 부문에서 글로벌 점유율 1위 기업은 중국 장쑤성에 있는 우시 리드(Wuxi Lead)다. 2020년 매출 9억달러(약 1조원), 당기순이익 1억5000만달러(약 1700억원)를 거둔 기업이다. 2위 기업은 광둥성에 있는 선전 잉허(Shenzhen Yinghe)다. 이 부문에서 중국 기업들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산업이 형성되는 초기에 산업 허브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비 사업은 장비를 이용하는 회사와 긴밀한 협력이 중요하다. 이용하는 회사마다 장비에 대해 요구하는 스펙이 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업이 형성되는 초창기 상황이므로, 고객사와 협력해 새로운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장비를 공동으로 개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시 리드가 CATL과 오랫동안 장비를 공동 개발해왔고, 2020년에는 CATL로부터 지분 투자를 받기까지 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어떻게 보면 배터리 생산 설비의 70%가 중국에 있는데 중국에서 배터리 장비 기업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 같다.

둘째, 중국 배터리 장비들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이유는 이들의 원가 경쟁력이다. 배터리용 장비의 특징은 기술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대신 원가 절감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있다는 점이다. 배터리용 장비는 크게 프런트 엔드(Front-end) 장비, 미드 엔드(mid-end) 장비, 백 엔드(back-end) 장비 등 세 가지로 나뉜다. 이 중에서 프런트 엔드 장비는 다른 산업에서도 오랫동안 사용돼 기술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다. 반면, 미드 엔드 장비는 배터리 산업에 쓰이기 시작한 장비들이 많아 진입 장벽이 높다. 그럼에도 배터리 장비의 기술 장벽이 반도체와 같은 첨단산업 장비와 비교해 높다고는 할 수 없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객사들이 원하는 장비 스펙을 공동 개발하고 실행할 능력을 갖춘 엔지니어가 많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시 리드의 경우 엔지니어만 2500명으로 글로벌 경쟁사를 압도한다. 독일의 배터리 장비 업체인 만츠(Manz)의 경우 관련 엔지니어를 700명 정도 보유하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획기적인 수준의 배터리 혁신은 완성차나 배터리 셀 업체가 주도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 아이디어들이 현실화되려면 결국 장비가 필요하다. 보통 장비 산업은 자본재 산업의 하나로 취급돼, 시황에 의해 매출이 크게 좌우되는 산업으로 폄하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배터리는 이제 막 성장 국면으로 들어선 성장 산업이니 사이클(시황)의 영향은 크지 않다.

배터리 장비 부문에서 한국 산업계와 관련된 이슈는 다음과 같다. 현재까지는 초기 시장 선점 때문에 중국의 배터리 장비 업체들이 약진했다. 이들은 주로 중국계 배터리 셀 기업에만 납품하고 있다. 반면, 한국이나 일본 장비 업체들은 주로 한국, 일본 기업들과 매칭돼 있다. 한국이나 일본 배터리 셀 기업 입장에서는 퀄리티 측면에서 선진국 기업들로부터 장비를 공급받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이런 경쟁 환경과 협력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중국은 전 세계 배터리 셀 생산 설비의 70%를 넘게 보유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배터리 생산 설비를 더할 경우 전 세계 배터리 생산 설비의 90%가 동북아시아 지역에 몰려 있다. 동북아시아가 배터리 혁신을 주도하고 또 이 생태계 안에서 글로벌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나올 것이라는 추정이 자연스럽다.


전자담배 제조 기업 스무어는 지난해 7월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사진 베이퍼라운드
전자담배 제조 기업 스무어는 지난해 7월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사진 베이퍼라운드

배터리 혁신이 촉발시킨 전동공구와 전자담배 산업 성장

배터리 혁신을 응용해 최근 성장한 기업 사례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전동공구, 무선이어폰, 전자담배 산업이다. 전동공구야말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배터리 기술 혁신을 가장 스마트하게 활용한 영역이 아닐까 한다. 오랫동안 전동공구는 건설용, 건물 수리용, 목공용 등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최대 단점이 있었다. 전원에 코드를 연결해야 하므로 작업이 상당히 불편했다. 그럼에도 배터리를 사용하지 못했던 건 출력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5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다. 출력 강력한 제품들이 연달아 나오면서 이제는 코드리스(선 없는) 전동공구가 널리 쓰이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배터리 기술을 적극적으로 채택한 기업과 그러지 않은 기업 간에 격차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세계 시장에서 전동공구의 배터리화를 주도한 곳은 유대인계 홍콩 소재 기업 테크트로닉(Techtronic)이다. 이들은 배터리의 혁신성을 일찍이 깨닫고 상품 개발과 관련 특허 출원에 몰두했다. 뛰어난 배터리 성능과 편의성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아 글로벌 점유율을 높였다. 전동공구를 주력으로 하는 이 회사는 2010년 33억달러의 매출액(약 3조7000억원)과 1억2000만달러(약 130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하지만 2020년에는 89억달러(약 10조원)의 매출액과 7억5000만달러(약 800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거뒀다. 참고로 테크트로닉이 전동공구용 배터리를 공동 개발하고 협력을 구했던 기업은 삼성SDI, LG화학과 같은 한국 배터리 회사였다.

반면, 글로벌 전동공구 시장을 주도했던 미국 기업 스탠리 블랙앤드데커(이하 스탠리), 일본 기업 마끼다(Makita) 등은 배터리화 대응이 늦었다. 스탠리는 수많은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리는 데 집중하면서 배터리 기술을 적용한 제품을 개발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마끼다는 일본 기업답게 전동공구의 견고함과 내구성을 내세워 일본 시장에서의 편안한 독점 상태를 누리고 있다. 주요 경쟁 기업들이 다른 데 관심을 둘 때 변방의 이류 기업이었던 테크트로닉은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배터리로 대체될 제품은 전동공구뿐만이 아니다. 목공용 톱이나 잔디깎이 장비는 아직 소형 엔진을 동력으로 한다. 단독주택이 일반적인 미국의 경우 잔디 깎이 장비를 집집마다 갖춘 경우가 많다. 이들 장비도 언젠가 배터리 탑재 제품으로 바뀔 것 같다. 테크트로닉은 배터리 기술을 이런 부문으로 확대하고자 한다. 혁신 기술의 초기 변화를 주도하는 기업들은 대체로 점유율 향상, 브랜드 이미지 상승처럼 오래 지속될 장점을 누린다. 테크트로닉이 그 재미있는 사례가 될 것 같다.

전자담배 시장 역시 매우 흥미로운 배터리 응용 사례다. 전자담배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진행 중이다. 태우는 궐련 담배에 비한다면 태우지 않는 전자담배가 훨씬 덜 해롭기 때문에 ‘공공보건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는 긍정론에서부터 전자담배가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흡연의 길로 이끌 것이라는 비판론까지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는 대신 산업적으로 흥미로운 측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담배 시장은 10억 명의 소비자, 연간 매출 900조원이 넘는 초대형 산업 중 하나다. 이런 담배 산업에서 일어나는 혁신은 반드시 눈여겨봐야 한다. 담배 산업에서 전자담배가 강력한 대안 상품으로 떠오르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혁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우지 않고도 니코틴을 빠른 속도로 체내에 흡수시킬 수 있는 기술(니코틴솔트)이 개발됐다는 점, 세라믹 기화 기술의 발전으로 균일한 목 넘김이 크게 개선됐다는 점, 무엇보다도 USB만 한 크기의 소형 제품에서도 충분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소형 배터리가 개발된 것이 중요했다.

초기의 전자담배 제품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충전을 해줘야 했고, 더욱이 손가락으로 들고 있기에는 비교적 무거웠다. 하지만 지금은 헤비 스모커가 아니라면 며칠에 한 번만 충전하면 되며, 무게도 수십 그램 수준으로 가벼워졌다. 인상적인 부분은 글로벌 전자담배 생산 설비의 90%가 중국에 있으며, 심지어 80%가 선전 인근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다. 요즈음 한국이나 미국에서 인기를 끄는 전자담배 대부분은 선전에서 개발되고 제조되었다.

전자담배에 들어가는 소형 배터리를 만드는 회사로는 이브에너지(EVE Energy)가 유명하다. 이 회사는 무선이어폰에 들어가는 소형 배터리 부문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높은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자 담배를 개발하고 제조하는 기업으로는 스무어(Smoore)가 유명하다. 기화기 부분에서 세라믹을 기반으로 한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으면서 전자담배 개화에 이바지한 기업이다. 이 두 회사 역시 선전 인근에 있다. 배터리 생태계가 없었다면, 중국이 전자담배 제조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한국이 배터리 산업 경쟁력을 글로벌 수준까지 키운 것은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미국, 유럽 등 대부분의 선진국도 배터리 혁신을 주도하는 기업들을 육성하거나 갖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앞으로 배터리 산업을 주도하는 데 있어서 중국과 어떻게 경쟁할지, 혹은 중국 배터리 생태계와 어떻게 협력할지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이필상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아시아리서치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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