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19 CES에서 길 프랫 TRI(Toyota Research Institute) 최고경영자가 자율주행 시스템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19 CES에서 길 프랫 TRI(Toyota Research Institute) 최고경영자가 자율주행 시스템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1월 7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19 CES’ 행사장. 190㎝ 장신에 푸른 눈의 미국인이 일본 도요타자동차 행사의 메인 발표자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도요타의 인공지능(AI)·자율주행기술 자회사 TRI(Toyota Research Institute)의 길 프랫 최고경영자(CEO)였다. 도요타는 2015년 1조원을 투자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TRI를 설립했고, 미국의 AI·로봇기술 권위자인 프랫 CEO를 비롯해 최고 인력들을 스카웃했다.

작년 CES 행사는 도요타의 수장인 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63) 사장이 주재했다. 하지만 이번엔 아키오 사장이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를 대신해 도요타를 대표했던 이는 TRI의 리더 프랫 CEO였다. 그는 도요타그룹 내에서 ‘펠로우(fellow)’라는 임원 직책도 맡고 있다. 34만명이나 되는 도요타에서 임원은 단 23명뿐인데, 그중 펠로우는 단 한 명이다.

CES에서 도요타가 AI 개발 자회사의 사장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다가올 AI 시대에 대한 일본 거대기업들의 위기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동차산업의 최강자 도요타로서도 AI 시대는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도 예측 불가한 AI 시대에 명확한 생존 전략을 제시하지 못 하고 난관에 봉착한 모습이 역력하다.

조성배 연세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는 “AI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이 방향을 못 잡으면서 ‘일단 투자부터 하자’는 ‘투자 버블’을 조성했다”고 했다. 그는 또 “재원이 충분한 구글, 소프트뱅크 같은 기업들은 이렇게 해도 위험이 덜하지만, 네이버 등 한국 기업은 그만큼의 투자를 할 순 없어 언젠간 밀릴 수 있다. 전략적 접근이 글로벌 기업보다 더 절실하다”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들의 AI 시대 헤게모니 싸움 속에서 한국 기업 중 △투자와 인력의 투입 △데이터 축적 전략 △플랫폼 전략 등에서 확실한 그림을 가진 주체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AI시대 한국 기업의 위기 그리고 생존을 위해 이들이 택해야 할 대안 3가지를 짚어봤다.


위기 1│글로벌 기업보다 데이터 양 절대적으로 부족
대안 1│한국 기업, 데이터 모으려면 진입장벽부터 깨야

한달 이용자가 19억명에 달하는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에는 1분마다 300시간 길이의 영상들이 전 세계에서 등록된다. 영상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갖춰야 할 자격 요건 등 제약 요소도 없다. 이렇게 올라온 영상들에 댓글은 매일 약 800억개가 달린다.

유튜브는 이런 방대한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한다. 데이터를 AI로 분석해 맞춤형 추천 서비스를 제공, 더 많은 사용자들이 더 오랫동안 체류하도록 유도한다. 유튜브가 이유 없이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유튜브는 대신 어마어마한 양의 영상 이용 기록을 얻게 된다. AI는 확보한 데이터의 양이 많을수록 더 좋은 성능을 얻을 수 있다.

반면 한국 최대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영상 플랫폼 네이버TV의 현주소는 참담하다. 모바일 앱 분석 업체 와이즈앱에 따르면 2018년 7월 국내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사용자 기준 네이버TV의 사용자 수는 월 387만명으로, 유튜브(3047만명)의 8분의 1 수준이다.

네이버TV가 유튜브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콘텐츠는 각 방송사들로부터 확보한 방송 프로그램의 독점 클립이다. 이마저도 달갑게 소비하는 이용자들은 많지 않다.

게다가 네이버TV에 개인 채널을 개설하려면 △네이버 블로그의 이웃 수 △카페의 회원 수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 셋 중 하나가 300명을 넘어야 한다. 구글 계정을 만들면 바로 콘텐츠를 올릴 수 있는 유튜브와 비교하면 네이버TV는 콘텐츠 생산자에게 진입 장벽을 쳐놓은 셈이다.

한국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조차 활용하지 못 하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조 교수는 “한국 기업들은 선뜻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다른 회사와 공유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데다, 데이터를 보여주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위기 2│각자도생에 놓인 한국의 ‘리딩 컴퍼니’들
대안 2│이종기업 간 협업, 한시가 급하다

지난해 일본 산업계를 뒤흔든 소식은 도요타와 소프트뱅크가 손을 잡은 것이다. 이들은 AI를 활용한 미래차 사업을 함께할 합작회사를 설립한다. 일본 제조업을 대표하는 도요타가 통신사 소프트뱅크에 먼저 협력을 제안한 것이 전해지면서 더욱 충격은 컸다. 콧대 높은 자동차 명가조차도 AI 시대에 IT 업체와 협력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분석이다.

도요타와 소프트뱅크의 만남은 일본 경제를 이끄는 기업들의 통 큰 만남으로 더욱 주목받았다. 도요타는 일본 제조업에서 압도적 1위, 소프트뱅크는 통신업에서 선두권을 달리는 일본의 ‘리딩 컴퍼니’들이다. 지금 당장은 각자도생해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지만, 미래를 위해 하나가 되기로 한 셈이다.

반면 한국의 ‘리딩 컴퍼니’들 간 파격적인 협업의 사례는 아직이다. 한국의 주요 대기업들은 외국기업 혹은 스타트업과 협업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네이버는 미국 반도체업체 퀄컴의 자회사 퀄컴테크놀로지와 자율주행 등 첨단기술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이번 CES에서 LG전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AI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고 발표했다.

현대자동차는 인공지능 관련 해외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자사 스마트 TV에 구글·아마존과 클라우드를 연동해 AI 생태계를 확대했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네이버 등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리딩 컴퍼니들의 통 큰 협력이 절실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위기 3│다가오는 승자독식 시대…패스트팔로어의 자리 없다
대안 3│장악하든지, 올라 타든지 명확한 플랫폼 전략 세워야

AI가 플랫폼 사업의 성격이 강한 분야라는 점은 한국 기업에 기회이자 위기이다. 플랫폼 비즈니스는 다른 서비스들과 고객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AI 플랫폼을 지배하는 기업은 쇼핑부터 자동차 운행, 음악 감상 등 사용자의 실생활에 긴밀하게 녹아들 수 있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쌓이는 행동 데이터로 사용자의 생활 양식을 분석해 맞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애플의 시리를 시작으로 아마존의 에코, 구글의 어시스턴트 등 글로벌 기업들의 AI 비서 서비스가 출시돼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이와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네이버가 클로바를, 카카오가 카카오아이를, 삼성이 빅스비를 선보이고 있으나 딱히 선두 기업은 없다.

전문가들은 후방에서 AI 기술 개발을 하고 있는 부문들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IBM 왓슨을 몇 년 안에 따라잡겠다’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과 같은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인식이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조성배 교수는 “애국심 때문에 성능이 떨어지는 제품을 쓰는 시대는 지났다”면서 “아직 기술 개발 초기 단계라 여러 서비스가 경쟁하고 있지만, 결국 성능 좋은 AI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 하나의 승자가 시장을 독식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우수한’ AI를 제공하는 전략과는 별개로 ‘틈새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조 교수는 “도토리 키재기 차원의 경쟁보다는 ‘어떤 플랫폼에 얼마나 제대로 올라탈 것인가’에 관한 전략적 연합을 고려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민아 기자, 이정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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