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최근 120조원짜리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조성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SK하이닉스 공장. 사진 조선일보 DB
SK하이닉스가 최근 120조원짜리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조성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SK하이닉스 공장. 사진 조선일보 DB

2018년에만 반도체 사업에 10조원 이상 쏟아부었던 최태원 SK 회장이 또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정부가 주도하는 120조원짜리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조성 사업에 SK하이닉스가 참여키로 한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클러스터 조성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경기가 2018년 정점을 친 뒤 2019년부터 하향세로 접어든다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에서도 SK하이닉스는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 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18년 12월 18일 ‘2019년 업무 보고’를 통해 2028년까지 향후 10년간 반도체 팹(생산 라인) 4개와 50여 개 중소 협력업체가 동반 입주하는 클러스터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올해 상반기 중 입지를 선정하고, 단지 기초 공사 등에 1조6000억원을 투입한다. 총 120조원을 2028년까지 단계적으로 투자할 예정이다. 반도체 산업에 특화된 클러스터를 정부 등이 나서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이번이 처음이다.

업계에서는 선발 주자 지위를 굳힌 SK하이닉스가 후발 주자와의 격차를 더 벌리기 위해 투자에 가속도를 붙이는 것으로 분석한다. 반도체는 첨단 기술 산업인 동시에 대규모 설비가 수반돼야 하는 장치 산업이다. 막대한 투자로 신규 라인을 건설하며 생산성을 높여야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 때문에 SK하이닉스는 위기 상황에서도 투자를 지속해왔다. 2010년까지만 해도 2조9660억원에 달했던 영업이익이 3691억원으로 대폭 하락했던 2011년이 대표적이다. 이때 SK하이닉스는 3조5000억원을 투자했다. 다음 해엔 상황이 더욱 악화돼 영업이익이 마이너스 2273억원을 기록했는데도 투자 규모를 3조9000억원으로 늘렸다. 그 결과 지난해 3분기 SK하이닉스는 D램(기기의 전원이 꺼지면 저장된 데이터도 사라지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2위(29.1%)를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SK하이닉스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D램 시장에서 큰 성과를 냈지만,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시장 점유율이 10.8%로 세계 5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한 종류인 낸드플래시는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를 계속 저장하기 때문에 스마트폰·PC 등 IT 기기의 주(主) 저장 장치로 쓰인다. SK하이닉스로서는 낸드플래시 기술력과 생산력 확보가 시급하지만, 기존 공장에서는 확장을 위한 가용 부지를 모두 써버린 상황이다. 2020년 완공될 5만3000㎡(약 1만6000평) 규모의 M16 공장이 SK하이닉스가 보유한 부지에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공장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경기 용인, 화성에 이어 평택까지 신규 부지를 확보한 상태다. 평택에 총 4개 라인을 건설할 수 있어 아직 여유가 있는 편인데도 추가 부지를 물색 중이다. SK하이닉스가 부지 확보에 열을 올리는 이유다.

SK하이닉스의 클러스터 참여에 대해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은 “반도체 사업 전략은 기술력과 생산력 확보 두 가지로 나뉘는데, SK하이닉스의 기술력은 이제 상당 수준으로 올라섰다”며 “향후 반도체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이 됐을 때 기술력을 확보해 놓고도 생산 시설이 부족하면, 성장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가 이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장기적으로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WSTS)는 “2019년 세계 반도체 시장은 작년보다 2.6% 성장하는 데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도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경우 0.3% 줄어들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2019년 반도체 업황이 악화될 것이란 전망의 기준점은 2018년”이라며 “2018년은 2016년보다 이미 두 배 가까이 성장한 상태라 2018년을 기준으로 보면 시장 정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여전히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11일 취임한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 역시 취임사를 통해 “시장의 단기적 부침은 있겠지만 메모리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산업의 꾸준한 성장은 명확한 사실”이라며 “당장의 추위에 대비하되 더욱 멀리 보고 준비하자”고 강조했다.


용인 등 지자체, 유치전에 총력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수십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서울대 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15년 가동을 시작한 M14 공장이 55조원어치 생산을 유발하고 21만 명의 고용 창출 효과를 낼 것으로 분석된 바 있다. 지난해 10월 준공된 M15 공장 역시 2023년까지 70조9000억원의 생산을 유발하고 21만8000명의 고용 창출 효과를 낼 것으로 전망됐다.

한태희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의 경우 단일 공장을 짓는 것보다 훨씬 큰 경제적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며 “공장 자체는 자동화될 가능성이 커 정규직 일자리가 대폭 늘어난다고 보기 어렵지만,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 수십조원 이상의 경제적 가치를 낼 것이라는 계산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이종호 소장 역시 “금액으로 산출하기는 어렵지만, 중소장비·제조 업체들까지 활로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가치”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현재 후보지로 거론되는 지역의 자치단체들은 SK하이닉스 잡기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가장 유력한 곳은 경기도 용인이다. 서울과 가까운 데다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 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M15 공장이 있는 충청북도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반대 성명’을 내는 등 반발하고 있는 데다, M14 공장이 있는 이천시 역시 반도체 클러스터가 이천에 건립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아직 결론 내기는 이르다는 관측이다.


plus point

총성 없는 전쟁, 반도체 치킨게임의 역사

최근 반도체 업계는 ‘수퍼사이클(초호황)’을 보내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치열한 치킨게임(서로가 양보하지 않고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으로 업계에 피가 낭자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D램의 역사에서 두 차례 치킨게임으로 시장 판도가 바뀌었다.

첫 번째 치킨게임은 2007년 대만 D램 업체들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작됐다. 이를 시작으로 반도체 업체들은 극단적인 가격 인하 경쟁에 나섰는데,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겹치면서 당시 주력 제품이던 512MB(메가비트) DDR2 D램 가격이 곤두박질쳤다. 반도체 기업들은 2년 가까이 출혈 경쟁을 펼쳤는데, 그 결과 2006년만 해도 7달러에 가까웠던 512MB D램 가격이 2009년 0.5달러까지 떨어졌다. 1차 치킨게임은 2009년 독일 ‘키몬다’ 파산으로 막을 내렸다. 2006년 출범 당시만 해도 세계 2위 D램 생산업체였지만, 2008년 4분기 누적 적자가 25억유로에 달했다.

이후 반도체 시장이 진정되면서 기업들도 조금씩 이익을 내기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2010년 대만과 일본 기업들이 설비 투자와 증산을 선언하면서 치킨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또다시 출혈 경쟁이 극단으로 치달았고 결국 2012년에 일본 ‘엘피다’가 파산했다. 엘피다는 당시 일본 유일의 D램 업체였다. 1차 치킨게임 때 2000억엔 적자를 냈지만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살아난 곳이다. 그러나 2차 치킨게임까지는 견디지 못했다. 엘피다 경영권은 현재 D램 시장 점유율 3위인 미국 마이크론이 가져갔다.

이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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