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5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역 인근 한 가게 앞에 전날 KT아현지사 화재로 발생한 통신 장애로 ‘카드결제 불가’를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사진 연합뉴스
11월 25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역 인근 한 가게 앞에 전날 KT아현지사 화재로 발생한 통신 장애로 ‘카드결제 불가’를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사진 연합뉴스

11월 24일 토요일은 직장인 김준우(29)씨에게 악몽과도 같은 날이었다. 아침부터 인터넷, 휴대전화 통화·문자는 물론 유선 전화까지 끊겼다. 이날 오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KT아현지사에서 화재가 나는 바람에 김씨가 사는 용산구까지 통신장애가 발생한 탓이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김씨는 집 주변 카페에서 책이라도 읽으려 했지만, 이마저도 불가능했다. 김씨는 평소 현금보다 카드를 사용하는 편인데, 통신 장애로 카페의 카드 결제기가 먹통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집에 꼼짝없이 갇혀있었다는 김씨는 “내 생활이 통신에 이토록 많이 의존하고 있는 줄 몰랐다”며 “통신이 끊기니 흡사 원시시대에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아현지사 건물 6m 아래에 위치한 ‘통신구(통신용 회선들이 지나가는 공간)’에는 16만8000개의 전화선과 광케이블 220세트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24~25일 이틀간 중구·용산구·서대문구·마포구 일대와 은평구·경기 고양시 일부 지역에 통신장애가 발생했다. 해당 지역에서는 KT가 제공하는 휴대전화, 유선전화, 초고속인터넷, IPTV 서비스가 모두 끊겼다. KT 통신망을 사용하는 카드결제 단말기는 물론 은행 ATM(현금자동입출금기), 일부 경찰서의 112 신고 시스템까지 멈췄다.

화재 원인은 아직 조사 중이지만, 지금까지 나온 결과만으로도 아현지사의 사고는 예견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먼저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통신장애를 방지할 수 있는 백업 설비가 돼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통신지사는 방향이 다른 두 개 이상의 통신구를 갖고 있다. 한 통신구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다른 통신구를 이용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아현지사 통신구는 한 방향으로만 설계돼 있었다. 게다가 이곳엔 스프링클러도 없이 소화기 1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KT가 규정을 어긴 것은 아니다. 국가 통신망 시설은 재난 발생 시 피해 범위에 따라 A~D 4개 등급으로 나뉘는데, 아현지사는 백업 설비와 스프링클러 설치 등의 의무에서 자유로운 ‘D등급’이었다. 문제는 아현지사 같은 D등급 통신지사가 전국에 835곳이나 된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비슷한 사고가 더 자주, 더 크게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A~C 등급으로 분류된 통신시설은 정부가 직접 안전 실태 등을 점검하지만, D등급은 통신사업자가 자체적으로 관리하게 돼 있다. 즉 KT의 재난 예방 의지만 있었다면 이번 화재의 발생 자체는 막을 수 없더라도 피해 규모가 커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KT가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KT가 주인 없는 회사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KT는 1982년 정부가 100% 출자해 ‘한국전기통신공사’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2002년 민영화됐다. 현재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KT 지분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KT의 회장직은 정부가 임명하고 있다. 이 같은 기업 구조에서는 통신구 안전과 같은 기본에 신경 쓸 여력이 줄어든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학과 교수는 “민영화를 할 거면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아줬어야 했는데, KT는 그러지 못했다”며 “주인의식을 가진 리더보다 정치권에 잘 보이는 리더가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이다 보니 조직을 세세하게 관리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KT 내부사정을 잘 아는 익명의 관계자는 “현재 KT 경영진은 모두 황창규 KT 회장의 측근이고, 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황 회장을 보위하는 것”이라며 “통신은 KT가 오랫동안 해온 분야인 만큼 ‘가만히 둬도 알아서 잘 굴러갈 것’이라는 안일한 인식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이어 “KT에서 오랫동안 일한 통신 전문가들의 발언권은 외부 인사에 밀려 점차 약해지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통신구 안전 등에 투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안전 투자는 후순위

KT가 단기적 성과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점도 전문가들이 이번 사고를 두고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황 회장의 연봉에서 성과급 비율은 75%에 달한다. 단기적 성과를 중시하다 보면 안전 관련 분야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 빠른 기간 내에 경영 성과를 내기 위함이다. 특히 2010년까지만 해도 매년 2조원대의 영업이익을 내다 최근 1조원 초반대로 떨어진 KT의 상황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강홍렬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재난 대비 관련 설비를 갖추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하는데, 이 같은 투자의 특징은 사고가 나기 전까진 성과가 아닌 지출로만 보인다는 것”이라며 “단기적 성과에 치중하는 기업이라면 ‘의무 규정도 없는데 (안전에 투자를) 안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KT는 통신과 같은 기존 사업으로는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 미래 먹을거리 발굴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기업의 존속을 위해 이 같은 투자는 필요하지만, 안전 관련 투자에 소홀하다는 것은 문제다. 김연학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 KT의 투자 우선순위는 5G 통신, 인터넷은행 등 신규사업이지만, 사실 KT에 돈을 벌어다 주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해왔던 유·무선 전화망, 인터넷망 등이고 신규사업에선 전혀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며 “신규사업 투자를 늘리기 위해선 통신과 같은 기둥 사업에 대한 투자와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가 필요한 곳에서 오히려 비용을 줄인 데 대한 대가는 KT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KTX를 운영하는 코레일이 대표적이다. 코레일에 따르면 올해 들어 현재까지 철도 사고는 66건, 운행 장애 등의 사건은 147건이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부채가 14조원에 달하는 코레일이 비용 절감에 급급하다 보니 차량 정비와 부품 교체 등에 소홀했다고 지적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안전 관련 기준은 구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점도 피해를 키운 원인이다. 강홍렬 연구위원은 “기업이 투자비용 때문에 재난 안전 대비를 회피할 때, 기준을 만들고 그것을 시행하도록 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며 “2000년 여의도 전기·통신 공동구 화재 사건을 계기로 만든 통신시설 지정 기준을 아직 적용하는 것부터 문제”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번에 화재가 발생한 아현지사는 서울 한복판의 5개구를 관할할 정도로 큰 규모의 설비를 운영하고 있다. 원효지사 등 주위 지사에 있던 네트워크 설비가 통합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급은 여전히 D등급에 머물러 있던 탓에 간부급 책임자 없이 직원 2명이 관리를 맡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현지사 통신구에 소화기 한 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던 점 역시 시대에 맞지 않는 법 때문이다. 현행 소방법은 전력이나 통신사업용 지하구가 500m 이상인 경우에만 스프링클러 등 연소방지설비와 자동화재탐지설비를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오성목 KT 네트워크부문 사장은 “(아현지사 통신구는) 150m 이하라 규정이 없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통신회선으로 전송하는 서비스와 트래픽 양이 급증한 시대 변화를 소방법이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연학 교수는 “시대가 흐르면서 발생하는 변화를 KT는 물론 정부마저도 놓쳤다”며 “이번 사고로 인해 일시적 통신 단절도 얼마나 큰 피해를 가져오는지 깨달았으니 비용이 들더라도 더 큰 사고를 방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윤정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