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의 지난 8일 모습. 폭우로 마을 전체가 지붕만 내놓은 채 잠겨있다. 사진 AP연합뉴스
일본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의 지난 8일 모습. 폭우로 마을 전체가 지붕만 내놓은 채 잠겨있다. 사진 AP연합뉴스

“1995년 수해 때는 집 안 2층에 피하는 것으로 충분했어요. 그래서 7일 아침에 지역 방재팀이 ‘피난을 가야 한다’고 집에 찾아왔지만, 저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집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낮부터 수위가 급격히 높아지더니 베란다로 물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물이 차올라 생명에 대한 위협을 느꼈습니다. 가스통 같은 것들이 집에 흘러 들어와 부딪히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이날 오후 5시쯤 보트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구조된 일본 에히메(愛媛)현 오즈(大洲)시의 이케다 도요조(池田豊蔵·67)는 “처음으로 물의 무서움을 느꼈다”며 NHK 방송에 이같이 전했다.

일본 서남부에 지난 4일부터 8일까지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12일 기준 187명이 사망하고 60명 이상 행방불명됐다. 폭우가 절정에 달했던 7일, 일본 기상청은 ‘폭우 특별경보’를 최서단 나가사키(長崎)현에서 중부기후(岐阜)현에 이르는 서남부 9개 지역에 내렸다. 이는 폭우 특별경보 제도가 일본에 도입된 2013년 이후 최다 발령이다. 일본 고치(高知)현 우마지(馬路)촌에서는 4일부터 7일 오후 1시 30분까지 72시간 동안 1319.5㎜가 내려 1978년 관측 시작 이후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기후현 구조(郡上)시에도 같은 기간 868㎜의 비가 쏟아졌는데, 이 역시 관측 사상 최대치다.

폭우 소식을 전하고 있는 일본 방송. 북태평양 고기압과 오호츠크해 고기압으로 장마전선이 형성된 가운데, 왼쪽 밑에서부터 태풍도 올라오고 있다. 사진 ANN방송 캡처
폭우 소식을 전하고 있는 일본 방송. 북태평양 고기압과 오호츠크해 고기압으로 장마전선이 형성된 가운데, 왼쪽 밑에서부터 태풍도 올라오고 있다. 사진 ANN방송 캡처

일본 기상청은 큰비가 올 것을 사전에 감지하고 5일 오후 기자회견을 통해 “큰비가 동시에 여러 곳에서 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아무도 1000㎜ 안팎에 이르는 ‘물폭탄’이 떨어질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현재 일본에는 인명 피해는 물론 경제적 피해도 잇따르고 있다. 현재까지 농림·수산 피해액은 72억엔(약 723억원)으로 집계됐다. 자동차 제조업체 마쓰다의 히로시마(廣島)현과 야마구치(山口)현 공장은 교통이 끊겨 부품 조달이 어려워지자 가동을 중단했다. 전자회사 파나소닉의 오카야마(岡山)현 공장은 아예 침수돼 버렸다. 8일 폭우가 멈춘 직후부터 일본은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는데, 침수 여파로 25만 가구의 물까지 끊겨 피해 복구에 애를 먹고 있다.

일본 언론은 폭우가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쏟아지는 바람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해 피해가 커졌다고 보고 있다. 일본에서 집중호우는 국지적으로 짧은 기간에 쏟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번처럼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며칠간 지속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것이다. 일본 기상청은 장마전선이 장기간 머무르는 바람에 이 같은 기록적 폭우가 쏟아졌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장마전선이 일본 열도를 빠져나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장마전선은 북태평양 고기압과 오호츠크해 고기압이 만나 형성된다. 북태평양 고기압은 습하고 따뜻한데, 오호츠크해 고기압은 습하면서도 선선하다. 물기를 머금은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나면서 많은 비가 내리는 것이다. 더운 여름날 냉장고에 넣어뒀던 시원한 캔 음료를 상온에 꺼내두면 캔 표면에 물방울이 생기는 이치와 같다.

윤기한 기상청 기상통보관은 “장마전선은 북태평양 고기압과 오호츠크해 고기압의 확장과 수축에 따라 북쪽으로 점점 이동해야 한다”며 “이번엔 두 고기압이 일본 열도에서 크게 확장된 데다 힘도 비슷해 서로 마주보고 밀어대다 보니 같은 자리에 길게 머무르게 됐고, 이 때문에 특정 지역에 큰 비가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6일까지의 폭우는 위의 설명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7일부터다. 이전까지는 남쪽 북태평양 고기압과 북쪽 오호츠크해 고기압의 세력이 비등했지만, 7일부터 오호츠크해 고기압이 다소 약해진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태평양 고기압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지기 때문에 북쪽으로 장마전선이 올라갔어야 했지만, 장마전선의 위치는 그대로였고 일본의 폭우는 7일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에 대해 이승호 건국대 기후연구소장은 “태풍(8호 마리아)이 남쪽에서 올라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태풍은 저기압이라 자기 쪽으로 공기를 끌어들이게 된다”며 “남쪽에 있는 태풍이 장마전선을 계속 끌어당기는 바람에 장마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한곳에 머무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태풍은 장마전선의 발목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비의 양도 더했다. 안중배 부산대 대기환경과학과 교수는 “이번처럼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기 위해선 많은 양의 수증기가 필요한데, 장마전선만으로 이 정도의 집중 호우가 내리긴 어렵다”며 “태풍(8호 마리아)이 수증기를 몰고 올라왔고, 그 올라온 수증기가 장마전선과 부딪치면서 비의 양이 더욱 많아졌다”고 말했다. 장마전선이 형성되기 직전 일본을 통과한 7호 태풍 ‘쁘라삐룬’이 남기고 간 습한 공기도 더 많은 비를 내리게 만들었다.


한국도 폭우 가능성 배제 할 수 없어

한국에도 장마전선이 지나갔지만, 일본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민승기 포항공과대학 환경공학부 교수는 “태풍(7호 쁘라삐룬)은 원래 남부지방에 상륙해 서해안 쪽으로 빠져나가 한반도를 관통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다행히 동쪽으로 진로를 틀었다”며 “한국 쪽으로 왔다면 상당한 양의 수증기를 몰고 왔을 것이고, 그렇다면 한국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각해지고 있는 지구온난화 현상을 고려한다면 한국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 민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민 교수는 “최근 미국에서 이례적으로 거대한 허리케인이 발생하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허리케인·태풍이 점점 세지는 것이 지구온난화에 따른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역시 2002년 태풍 ‘루사’ 영향으로 강원도 강릉에 900㎜의 폭우가 쏟아진 적이 있다”면서 “지구온난화가 더 진행된다면 한국에도 이번 일본 수준의 폭우가 내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지구온난화는 지구의 평균 기온이 상승하는 현상으로, 인구 증가와 산업화에 따라 화석연료 사용이 늘어나 온실가스 배출량이 증가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무분별한 삼림벌채 역시 대기 중의 온실가스 농도를 높이는 요인이다. 공기가 따뜻할수록 더 많은 수증기를 보유할 수 있기 때문에 지구온난화는 대기 중 수증기량의 증가로 이어진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너무 많아져 그 물기가 한꺼번에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이 바로 집중호우다. 민 교수는 “똑같은 크기와 강도의 태풍이라도 대기 중 수증기가 많을 경우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윤기한 기상통보관은 “폭우가 오려면 비가 내리는 시간이 길어져야 하고 시간당 내리는 비도 많아져야 하는데, 시간당 내리는 비의 경우 지구온난화에 의해 점차 증가하고 있다”며 “일본처럼 비가 지속적으로 내리는 것이 일시적인 현상인지는 분석이 필요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한국도 비가 많이 오는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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