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연말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은 흔히 ‘평가의 계절’로도 불린다. 어느 때보다 유달리 풍파가 많은 2008년이었다. 연초부터 닥치기 시작한 원유 및 원자재 가격 상승,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후폭풍, 글로벌 금융 쇼크, 국제 경기 침체 등으로 우리나라 주요 대기업집단(그룹)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여파는 올 연말 각 그룹에서 실시될 CEO 및 임원급 인사에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불황 때문에 잔치 성격의 대규모 승진 인사는 줄겠지만 생존 돌파구 마련을 위한 새판 짜기 식 인사는 늘어날 것으로 재계는 전망하고 있다. 따라서 올 한 해 경영 실적이 부진한 CEO들은 연말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실적 부진과 상관없이 그룹이 처한 저마다의 ‘사연’ 때문에 교체되는 CEO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재계를 대표하는 재벌그룹 총수들에게도 2008년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무대였다. 전에 없던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전반적인 경제 여건도 그랬거니와 각각의 총수들이 겪고 있는 저마다의 상황도 한 편 한 편 시나리오감이라 해도 손색없을 만큼 드라마틱했다.

증권선물거래소와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지난 3분기 상장기업들의 매출은 호조를 보였음에도 환율 급등에 따른 환차손 등으로 순이익이 크게 떨어졌다. ‘금융 후폭풍’에 된통 당한 꼴이다. 때문에 저마다 기업의 실적 부진을 외부 악재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불황 속에서 장사를 잘 한 기업도 분명히 있다. 각 그룹은 대개 연말·연초에 임원단 인사를 실시한다. ‘젊은 피’가 임원단에 영입되면서 실적이 부진한 계열사 CEO는 이 시기에 책임 추궁을 당하기도 한다. 올해엔 실적 평가 기준을 정하기가 까다롭겠지만 실적 부진 등에 따른 CEO 교체 폭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재벌그룹 가운데 가장 먼저 임원인사를 단행하면서 재계 임원인사의 신호탄을 알려온 금호아시아나그룹이 11월1일로 예정됐던 그룹 인사를 뒤로 미루자 그룹 주변이 일시에 뒤숭숭해졌다. 인사를 앞두고 불안과 기대가 엇갈렸다. 지난 11월20일 부사장 2명을 포함한 115명의 임원인사가 공개됐을 때까지 온통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금호아시아나는 이상한·박의승 대우건설 전무를 부사장으로 승진시키는 등 부사장 2명, 전무 12명, 상무 61명, 상무보 40명 등 총 115명의 임원을 승진 발령했다. 올해 임원인사 규모는 지난해 125명에 비해 조금 줄어들어들었지만 안팎의 경기 상황과 불황 그리고 고유가 등 항공업계에 치명적인 환경에 비춰봤을 때 큰 폭의 인사라는 평가다.

지난해 대우건설에 이어 올 초 대한통운까지 삼키며 M&A 최강자로 떠오른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선 2008년이 만족스러운 해이기도 하다. 실적 면에서도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이번 인사를 시작으로 재계는 바야흐로 ‘인사의 계절’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금호아시아나의 임원인사가 좀 늦었던 것처럼 올해는 전반적으로 임원인사 시기가 늦춰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때문에 평가를 기다리는 CEO들은 더욱 좌불안석이다.

불안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경영 실적 부진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른바 ‘라인’ 때문에 자리를 옮겨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 그룹 분위기 쇄신이라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물갈이 대상에 포함되는 경우도 예상된다. 특히 전년 대비 매출 상승에도 환율 급등 때문에 순이익이 급감해 실적이 부진한 것으로 나타난 기업 CEO들의 경우는 자신의 거취가 어떻게 될지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룹별 순이익을 놓고 봤을 때 삼성그룹은 지난해에 비해 13.1% 증가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이 악화일로를 걷는 중이란 점을 감안하면 좋은 성적이다. 하지만 라이벌 LG그룹이 10대 그룹 가운데 가장 높은 순이익을 냈다. 95%이상의 순익 증감률을 기록했다. 삼성이 ‘어려운 환경에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LG의 성적이 월등하기 때문에 일 잘하고도 책임추궁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구본무 식 인재 기용, 다시 화제”

3분기 들면서 경기 둔화의 영향권이 확대되는 양상이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실적 둔화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실적이 좋지 않았던 CEO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실적 악화의 주된 원인이 세계 경기 악화, 환율 급등,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의 3중고가 3분기에 집중됐던 탓이겠지만 그룹 입장에선 그저 손 놓고 있기도 어렵다. 위기 극복을 위해 다각적인 인사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재계의 한결같은 관측이다.

어느 대기업 간부는 3분기 실적이 우수한 LG그룹을 예로 들었다. 기업의 실적 위기 때 CEO를 교체해 대박을 터뜨린 최근 사례다. 

“LG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LG전자 실적이 엉망이었을 때(2006년 말) 구본무 회장이 남용 부회장을 영입해 그에게 전권을 일임했던 일이 종종 회자됩니다. 그때 LG전자는 최악의 위기였는데 결국 돌파했습니다. 실력자를 잘 선별해서 완전히 믿고 맡기는 그런 믿음의 경영이 요즘 같은 때 구미 당기지 않을까요?”

LG그룹은 유난히 올 한 해 장사를 잘 했다. ‘상생경영’ 덕이라고들 한다. 남용 LG전자 부회장과의 파트너십이 효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남 부회장 취임 전이었던 2006년 말, 그룹 주력사인 LG전자는 영업이익 2.31%, 순이익 1.03%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그룹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LG디스플레이 등 전자·통신 계열 위주의 그룹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암울한 분석이 뒤따랐다. 당연히 구 회장의 경영능력도 도마 위에 올랐다.

구 회장은 남용 부회장을 ‘구원투수’로 끌어들였다. LG텔레콤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남 부회장에게 LG전자를 통째 맡겼다. 그리고 남 부회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구 회장의 ‘카드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LG전자는 2007년 말 영업이익 2.40%, 순이익 5.20%로 1년 전의 위기상황을 훌쩍 넘어섰다. 올 2분기에는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각각 12조7351억원과 8560억원을 기록하면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3분기에도 호조세는 그대로 이어졌다.

남 부회장은 휴대전화 사업에 승부수를 던졌다.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매출액은 3조7540억원을 기록했고, 영업이익 5400억원, 영업이익률 14.4%, 판매량 2770만 대를 기록하며 사상최고치를 기록했다. LG전자의 호조에 힘입어 전자·통신 계열사들까지 실적이 동반 성장했다. 전문경영인인 남 부회장이 LG전자의 변화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오너인 구 회장의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본무 식’ 인재 기용 방식을 우려하는 재계의 목소리도 있다.  

“LG그룹이 2006년 말 ‘구원투수’를 등장시켜 재미를 본 그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구본무 식 경영을 따라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총체적으로 상황이 어려운 중에 핵심 계열사의 경영을 한 사람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나 가능한 무리수일 수 있습니다.”

한편, LG그룹의 올해 인사 폭은 제법 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전무 직급을 부활시키는 등 예년보다 큰 폭의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이노텍과 마이크론의 합병이 추진되는 데다 LG전자 내 PC사업을 MC사업본부로 이관하는 등 헤쳐모여 식 사업 조정이 진행되고 있어 인사 폭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경영 실적이 좋아도 자리는 불안

괜찮은 실적을 낸 곳이라 하더라도 CEO나 임원이 여유를 부릴 수도 없는 상황이 바로 요즘 같은 때다. 철강금속과 화학업종의 경우 제품 가격 인상과 수출 호조 등에 힘입어 지난 3분기 성적은 비교적 양호했다. 하지만 경기에 민감한 업종 특성 때문에 내년에는 글로벌 경기 침체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경기 침체 여파가 뒤늦게 나타나는 특성으로 인해 ‘앞으로가 문제’인 그런 기업군이란 분석이다. 지금까지는 철강 시황 호조로 괜찮은 실적을 유지했지만 실물경기 침체가 본격화하면 철강과 화학업종이 부진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위기를 정면돌파하는 공격적 CEO가 나을지, 아니면 위기는 일단 넘고 봐야 한다는 식의 안정적 CEO가 유리할지 그룹 총수들은 선택해야 한다. 그간의 경영 실적이 좋았어도 향후 시장 변화에 맞는 스타일의 CEO가 새롭게 낙점될 수 있어, 예측하기 힘든 때다.

통신, 식음료 등 글로벌 위기에서 한발 떨어진 내수 분야의 경우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 환율 급등과 원자재 가격 상승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어려운 시기만 잘 넘기면 사업은 타 업종에 비해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문제는 수출 비중이 높은 쪽이다. 전기·전자업종이 대표적이다. 영업이익과 순이익이 지난해에 비해 각각 59.33%, 96.48%나 크게 떨어졌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 악화 때문에 삼성전자 역시 고전이 예상될 정도다.

대기업들은 한결같이 ‘비상시기’임을 외치고 위기 극복에 나서고 있고 대개의 경우 ‘인사’ 조치로 첫 단추를 끼운다. 하지만 CEO급 및 임원인사가 꼭 실적 부진을 이유로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경영승계와 관련된 인사의 규모가 사실상 더 크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재계의 연말 인사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곳은 단연 삼성그룹이다.

삼성그룹은 12월말 일부 사장단 교체와 더불어 대규모 임원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동안 삼성은 1월 임원인사를 해왔지만 올해는 특검 정국으로 연초에 인사를 하지 못했다. 지난 5월 경영체제 정비를 위한 인사를 단행하긴 했지만 소폭이었다. 따라서 삼성의 이번 인사는 전에 없던 대규모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 성격이 짙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재용 식 인사’ 첫선 보일까?

이번 삼성 인사에 대한 관측은 이 전무의 최근 행보와 여러모로 연관이 많을 것으로 재계는 내다보고 있다. 이 전무는 2008년 한 해의 대부분을 ‘삼성 비자금 특검’에 시달렸다. 지난 4월 삼성이 내놓은 경영쇄신안에 따라 이 전무는 최고고객책임자(CCO)직을 사임하고 여건이 열악한 해외사업장에서 시장을 개척하는 등 해외업무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법원 재판 때문에 발이 묶여 반 년가량의 시간을 보냈다.

법원이 지난 10월 2심 판결에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 대한 조세포탈 혐의만 일부 유죄로 인정, 징역 3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경영권 편법승계 의혹에 대해선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이 전무는 ‘자유의 몸’이 됐다. 특히 이 전무가 연루됐던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 발행 등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면서 이 전무를 옥죄던 족쇄가 사실상 모두 풀렸다. 일단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 전무는 약속했던 대로 해외로 나갔다.

이 전무는 중국 상하이를 거점으로 해외업무를 시작했다. 중국 경제 성장의 상징적 장소인 상하이에 베이스캠프를 차린 것이다. 이 전무는 미래 성장 동력과 관련한 사업을 챙기고 있다. 관계사들을 방문하고 핵심 관계자들과 만나고 있다. 발광다이오드(LED),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LCD, 반도체 등의 사업 쪽으로 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전무는 일본, 러시아, 브라질, 인도, 동남아 등 신흥시장을 두루 살피고 있는 한편 중남미, 아프리카 등 삼성의 손길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고 있는 곳까지 활동 범위에 뒀다.  

최근엔 태국에서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을 만났고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단독 회동하는 등 삼성의 대표자 자격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또 이 전무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하버드대 동문인 점 때문에 오바마 측과의 새로운 채널로도 활약할 것이란 삼성 내부 기대도 크다.

공식직함은 ‘삼성전자 전무’지만 대외적으로 그는 ‘리틀 이건희’나 다름없다. 그의 활동 폭은 계속 확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해외시장 개척의 공로를 쌓아가는 데 총력을 다 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일련의 행보는 당연히 경영권 승계 맥락과 맞물려 해석된다. 이 전무의 해외순환근무는 ‘후계자 검증 코스’나 다름없다. 이 전무가 주주와 임직원 그리고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경영권을 승계할 경우 자칫 경영 주도권이 허약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전무는 해외순환근무를 통해 공인받을 만한 성과를 얻어내야 한다. 연말에 진행될 삼성 인사의 코드는 ‘이재용’이 될 가능성이 점쳐지는 이유도 이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삼성그룹은 이 전 회장이 바라는 성공적인 경영권 승계가 이뤄질 수 있도록 새 판을 짜야한다는 암묵적인 과제가 있다. 이 때문에 이른바 ‘이재용 삼성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거국적인 인사가 진행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제기되는 것이다.

재계 소식통들에 따르면 이 전무는 언론 등의 시선을 피해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삼성에버랜드 등지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각종 현안 등에 대한 보고를 받고, 그룹 최고경영진들과 수시로 업무 등을 협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미 ‘준 총수’로서의 행보를 취하는 중이라고 한다.  

향후의 삼성그룹은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제조그룹과 삼성에버랜드 중심의 삼성증권·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카드·삼성캐피탈·삼성투신 등 금융그룹으로 크게 나뉠 것으로 예상된다. 다가올 ‘이재용 삼성 시대’에 두 개의 삼성이 어떤 경영 통치와 구조하에서 운영될지도 관심사다. 재계는 에버랜드 대주주인 이 전무가 금융그룹을 장악하면서 이를 통해 제조그룹까지 통치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정의선 거취가 인사 최대 변수될 듯 

현대기아차그룹도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엿보인다. 기존 CEO들을 대상으로 실적 악화에 대한 책임을 묻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현대차의 경우 도약을 위한 공격경영의 일환으로 인사가 개편될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지난 9월 김동진 부회장을 현대모비스로 전보하는 등 최근 두세 달 동안 순차적으로 1세대 경영진에 대한 인사를 진행해왔다. 이에 따라 올해 말에는 2세대 핵심 경영진의 부회장 승진이 잇따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아직 ‘안개 속’이라는 전망이 더 많다. 올 하반기 들면서 주요 계열사 사장단 인사가 부정기적으로 이어졌고, 또 내년 경영환경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큰 폭의 인사는 없을 것이란 예상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론 그룹 ‘황태자’인 정의선 사장의 거취에 따라 인사의 폭과 성격이 크게 좌우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정 사장의 입지 역시 삼성 이재용 전무한테 쏠리는 것만큼이나 관심사다.

현대기아차그룹 부회장급 자리가 정비되면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향후 거취도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정 사장이 2006년부터 기아차 사장을 맡아 2년 연속 적자 기업을 흑자 기업으로 돌린 것은 물론 최근 경기 침체 상황에서도 경쟁사에 비해 판매 성과가 좋은 점 등을 고려하면 ‘화려한 복귀’가 될 수도 있다. 나이와 경력 면에서 아직 부회장으로 곧바로 올라서긴 어렵겠지만 주력 계열사인 현대차로의 자리 이동을 통해 핵심 역할을 맡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시각도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내년 경영 실적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은 불 보듯 뻔하다. 따라서 정몽구 회장이 정 사장에게 새로운 중책을 맡기긴 부담스럽지 않겠느냐는 분석이다. 승계구도를 확실히 다지기 위해서는 경제 상황이 중요한데 현 시점에서 굳이 무리수를 두겠느냐는 것이다.

한화그룹의 경우 승진잔치가 예상된다. 어려운 한 해였지만 순이익 증가세를 기록하는 등 10대 그룹 중 실적이 좋은 축에 속했다. 무엇보다 올해 최대의 M&A 매물이었던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이겼기 때문에 한껏 고무돼 있다. 분위기가 좋기 때문에 CEO 교체 폭은 적을 것으로 전망되지만 산적한 과제가 많아 적임자들 간 수평이동도 예상된다.   

김승연 회장은 이번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의 승리로 ‘실력자’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다. 6조5000억원가량으로 알려진 인수자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12월 본계약 때 최종 인수금액의 10%인 6500억원을 계약금으로 내야하고 이로부터 늦어도 3개월 내에 5조원 이상의 잔금을 치러야 한다. 한화그룹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이 3조5000억원에 이른다고 자신하고 있다. 인수자금 마련에 별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비상장 계열사의 기업공개와 부동산 처리 등으로 2조원가량의 돈을 마련해야 하는데 증시폭락과 부동산 가격 하락 등의 불리한 경제 여건 때문에 기대치만큼의 자금 마련이 쉽지 않을 수 있다. 한화그룹이 인수자금 마련을 위해 내놓은 대한생명 지분도 좀처럼 팔리지가 않고 있다. 한화그룹은 JP모건을 통해 대한생명 지분 21.37%를 주당 1만원에 내놓았지만 증권가에서는 대한생명의 주가가 지금처럼 유동성이 줄어들고 주가가 떨어진 상황에서는 주당 7500~8000원도 받기 어려울 것이라 전망한다.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 입찰에 써낸 인수가격인 6조5000억원은 대우조선해양 주가의 6배가 넘는 규모다. 투자자 입장에서 볼 때 향후 주가 상승에 따른 수익을 크게 기대할 수 없다는 점도 한화그룹으로선 고민거리다.

SK그룹의 경우 SK에너지, SK텔레콤 등 주력 계열사 사장단은 그대로 유지한 채 12월말 일부 임원인사 및 조직개편을 실시할 것으로 전망된다. SK에너지의 경우 4개 사내회사(CIC) 중 경영지원(CMS) 부문이 ‘글로벌 헤드쿼터’라는 이름을 달고 기능을 바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올 초 CIC제도를 도입한 SK텔레콤과 SK네트웍스도 올해 말 인사와 함께 경영지원 부문의 기능 일부를 사업 CIC로 양도할 방침이다.

SK그룹엔 숙원사업이 있다. 다름 아닌 지주회사체제 정비 문제다. SK그룹은 지난해 7월 지주회사체제로 새로 출범했다. SK(주)에서 에너지사업 부문을 떼어내 SK에너지를 설립하면서 SK(주)로 하여금 그룹 지주회사 역할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아직 미완의 작업이다. SK(주)가 완벽한 지주회사 요건을 갖추기 위해선 SK텔레콤·SK네트웍스 등의 계열사가 보유하고 있는 정보기술업체 SKC&C의 지분을 정리해야 한다. SKC&C 상장이 급선무다. SK는 SKC&C 상장을 지난 6월 중 마무리하려 했지만 증시 상황 악화 등의 이유로 이를 미뤘다.

이 과정에서 최태원 회장의 SKC&C 지분 44.5%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당시 주가로 SKC&C가 상장될 경우 최 회장의 상장 차익은 무려 1조원대 규모였기 때문이다.

SKC&C는 그룹 계열사 간의 순환출자구조 해소를 통한 지주회사체제 완성과 기업가치 및 신뢰도 제고를 위해 그 동안 기업공개를 추진해 왔지만 아직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6월 당시 SKC&C 측은 “현재 너무 저평가돼 있고, 연말 증시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에 사정이 나아지면 그때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증시 상황은 더 악화됐다. 차라리 그때 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당시 SK 측은 “일시적인 연기”라고 했지만 공모 시장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업공개를 추진하기가 요원한 상황이다.

SKC&C는 SK텔레콤과 SK네트웍스가 보유 중인 SKC&C 지분 900만 주(전체 주식 수 중 45%)를 일반인과 기관에게 매각하는 방식으로 상장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순환출자구조를 해소하고 최태원 회장-SKC&C-SK-계열사로 이어지는 지주회사체제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올해 총수 취임 10년을 맞은 최 회장은 그룹의 깔끔한 지주회사 전환을 기대했지만 때를 놓친 모양새가 됐다. 기업공개가 불투명해짐에 따라 SK그룹의 지배구조 개편도 난항을 거듭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지주회사법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부담도 다시 안게 됐다. 이런 정황 때문에 SK그룹 연말 인사에선 ‘지주회사 전환 완수’의 변수가 작용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신격호의 고민… 첫째? 둘째?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은 10대 그룹 총수 가운데 최고령이다. 때문에 2세 경영권 승계가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명목상 회장 직함을 유지하고 있을 뿐 실질적인 그룹 경영은 두 아들에게 넘어갔다. 물론 지분 승계도 거의 마무리 됐다. 일본롯데는 신동주 부사장이, 한국롯데는 신동빈 부회장이 맡는 구도다. 관건은 총수를 누가 맡느냐다. 두 아들은 계열사 지분을 거의 동등하게 갖고 있다. 장자승계 원칙을 따르자면 신동주 부사장이 총수를 맡을 테고, 본국에서의 영향력을 놓고 보자면 신동빈 부회장이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선 그룹 핵심 계열사인 롯데쇼핑의 지분을 형보다 0.01% 더 보유하고 있는 신 부회장의 총수 가능성을 높게 점친다. 근거가 희박한 분석이지만 신 회장은 이미 그렇게 낙점을 했고 그 상징으로 소량이나마 롯데쇼핑의 지분을 신 부회장이 더 갖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그룹 주변에서 종종 회자된다. 

이런 가운데 올해 들어 롯데가에 새롭게 뜬 ‘사건’이 있었다. 신 회장의 숨겨진 부인 서미경씨가 자신의 딸과 함께 롯데쇼핑 지분을 매입하면서 등장한 것이다. 롯데삼강 CF모델 출신의 전직 탤런트 서씨가 딸과 함께 롯데 ‘로열패밀리’에 합류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서씨 모녀가 갖고 있는 롯데쇼핑 지분이다. 서씨는 롯데쇼핑 3만531주(0.11%), 딸 유미씨는 2만89032주(0.10%)를 갖고 있다. 이들 모녀가 100% 지분을 갖고 있는 유원실업의 롯데쇼핑 주식 보유량 3000주까지 합치면 모녀의 롯데쇼핑 주식은 5만 주를 넘어서고 지분은 0.17%에 달한다. 모녀가 롯데쇼핑 지분을 계속 늘릴 경우 경영권 참여로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총수의 굴욕’ 물갈이 인사 가능성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패배한 포스코와 GS그룹 등은 침울하다. 특히 GS그룹의 경우 어떤 식으로든 인적 쇄신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GS그룹은 포스코와 파트너로 나선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느닷없이 발을 빼는 바람에 포스코에 물을 먹였다. 이후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총수”, “배짱 없는 총수”, “말만 앞세우는 총수” 등 맹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간 재계 총수들 가운데 뚜렷한 특징이 없어 주목을 끌지 못했던 허 회장이었지만 지난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는 단연 두각을 보였다. 다만 불명예 이미지만 한껏 부각됐다는 게 문제였다.

허 회장은 취임 이후 여러 차례 M&A를 통해 몸집 불리기에 나설 것이라고 공언했다. 지난해 9월 ‘최고경영자 전략회의’에서 “M&A를 통해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해 11월 말 제주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선 “어떤 기업이 M&A 시장에 나오더라도 자금력은 충분할 것 같다”고 했다. 또 올 초 신년사에서도 “필요한 투자를 두려워하거나 실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까지 강조했다. 지난 4월 임원모임에서는 “성장의 기회를 효과적으로 포착하고 일단 전략적 선택을 했으면 가용한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확실한 경쟁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며 “그룹의 미래 성장 동력이 되는 사업은 모든 역량을 투입해 꼭 성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M&A 성과가 전무하다. 인천정유, 하이마트, 대우인터내셔널, 현대오일뱅크, 대한통운, 대우조선해양 등 잇단 M&A 경쟁에서 그저 관심과 의욕 가득한 ‘말’만 내뱉었을 뿐이다. 

“오랫동안 LG그룹에서 2인자 역할을 맡아온 허씨가의 습성 때문”, “미래를 보고 과감히 투자를 하는 게 아닌 돈의 흐름을 따져 값을 매기는 허씨 일가의 전통적 경영방식 때문” 등등의 뒷말이 무성했다. 하지만 재계 사정에 밝은이들은 “허창수 회장을 비롯해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등 사촌들의 공동경영이 이뤄지고 있는 현재 GS그룹의 지배구조가 허 회장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는 탓”이고 분석한다.

돈 되는 알짜 기업들을 다수 보유한 재계 6위 그룹의 총수에게 쏟아진 비난으론 가혹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대우조선해양 인수 실패로 리더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허 회장이 이미지 쇄신을 위해 나설 가능성도 점쳐진다. 그렇게 되면 연말·연초 인사에서 적지 않은 폭의 주요직 물갈이가 감행될 수도 있을 것이란 전망이 가능하다.

한진그룹은 올 한 해 성적이 엉망이다. 3분기까지 9개월 동안 1조6000억원 이상의 적자를 냈다. 실적 부문에선 10대 그룹 중 꼴찌다. 때문에 연말 인사가 실적에 따른 ‘책임 인사’ 성격이 짙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아울러 현재 진행 중인 세대교체도 그룹 인사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진그룹 1세대가 지배구조에서 사라지고, 동시에 조양호 회장의 장녀 조현아 상무와 장남 조원태 상무가 부상하는 중이다. 

지난 10월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과 김성배 한진관광 고문 등 한진그룹 1세대는 그룹 지배구조에서 완전히 퇴장했다. 한진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정석기업이 김성배 고문과 조중건 전 부회장이 보유 중인 회사 지분 전량(각각 4만5904주, 10만9476주)을 처분한 것이다. 조 전 부회장과 김 고문은 한진그룹 창업주인 고 조중훈 회장과 함께 그룹을 일군 1세대로 조양호 회장에게는 외숙부와 숙부다. 정석기업은 부동산 관리업을 하는 회사지만 대한항공과 한진관광, 조양호 회장이 20~25%의 지분을 갖고 있다. 또 정석기업 자체적으로도 한진 지분 17.94%를 보유하고 있어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서 있는 기업이다. 김 고문과 조 전 부회장의 지분은 조양호 회장과 조 회장의 어머니인 김정일 여사 등에게 넘어갔다.

비록 경영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진 않았지만 이들 1세대의 퇴진은 적자 속에서 허덕이는 한진그룹에게 있어 쇄신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조현아 상무, 조원태 상무, 조현민 과장 등 한진가의 3세들이 적극적으로 자사주를 매입하며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는 점도 한진의 향후 인사에 직간접적으로 반영될 것이란 전망이다.

조양호 회장의 맏딸 조현아 상무는 지난 11월19일 그룹 계열사인 항공종합서비스의 등기이사에 선임됐다. 조 회장의 장남 조원태 상무는 지난 8월 대한항공 자재부 총괄팀장에서 핵심 보직인 여객영업본부 부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올 들어 한진과 한덱스(구 쎄덱스)에 잇따라 등기이사에 선임되는 등 경영수업에 가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한진 후계자로 성장하고 있는 조원태 상무는 최근 한진드림익스프레스(구 신세계드림익스프레스, 쎄덱스) 등기이사로 선임됐다. 지난해 유니컨버스, 올 3월 한진에 이어 세 번째로 한진 계열사 등기이사를 맡는 등 빠른 속도로 경영권에 진입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정씨 현대그룹 재건’ 야욕   

현대중공업 각 계열사엔 ‘회장’ 직함이 없다. 그룹의 핵심 회사인 현대중공업은 민계식 부회장이 경영하고 있다. 대권을 노리고 있는 한나라당 최고위원 정몽준 의원이 사실상 그룹의 총수나 다름없다. 명목상은 경영에 참여를 하지 않고 있지만 실질적인 최고 실권자다.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건설 인수를 지상과제로 삼고 있다. 궁극의 목적은 현대가의 적통을 잇기 위함인 것으로 해석된다. 현대건설을 놓고 싸울 최대 라이벌은 다름 아닌 현대그룹이다.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기업이 실질적인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에 정 의원은 현(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씨 일가로 넘어간 그룹 경영권을 다시 찾겠다는 각오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을 통해 그룹을 지배하고 있는데, 현대상선 지분 7.22%를 보유한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그룹 경영권은 간단하게 챙길 수 있다. 현대중공업은 이 점을 노리고 현대건설 인수에 사활을 걸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올 초 TV광고에 고 정주영 명예회장을 모델로 내세운 점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현대중공업 TV광고에 정 명예회장의 영상자료와 현대중공업의 과거와 현재 모습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나왔다. 2007년 말엔 정 명예회장이 평소 즐겨 쓰던 ‘해봤어?’란 말이 시리즈 인쇄광고로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은 조선업계 세계 1위로서의 지위를 지키고 있지만, 선박의 원자재인 후판 가격 상승과 환율 상승 등의 요인 때문에 수익률이 갈수록 떨어져 고민이다. 지난해 이맘때만 하더라도 사상 최대치 수익으로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올해는 불황에 씁쓸한 연말을 보내고 있다.

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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