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와 감사원 감사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매번 충격적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검찰은 공기업 비리와 국가보조금 비리를 ‘2대 중점 척결 대상 범죄’로 규정하고 지난 3월부터 관련 정보를 수집해 수사를 진행했다. 지난 7월 말 결과가 나왔다. 21개 기관의 37명이 구속되고 67명이 불구속 기소됐다. 또 440여억원의 국가보조금이 부당하게 지급된 사실이 드러났다. 척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공기업 비리, 도무지 뿌리 뽑히지 않는 영역일까. 병폐의 근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중 ‘낙하산 인사’라는 지적이 가장 먼저 제기된다. ‘보은·코드 인사’가 공기업 방만 경영의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정부는 ‘공기업 선진화 계획’을 추진 중이지만 속 빈 강정이란 비난을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 역시 이미 공기업에 대한 ‘낙하산 인사’를 자행해버린 터라 개혁이 힘을 받기 힘들 것이란 관측이 팽배하다. 비리를 봉쇄할 수 있는 애초의 강력한 개혁의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공기업 비리는 예상했던 대로 독버섯처럼 만연해 있었다. 검찰 수사와 감사원 조사에서 드러난 공기업의 비리백태는 분노를 넘어 허탈감을 들게 한다. 한국가스공사, 우리사주 구입 대출금 227억원 무상지원 및 1가구2주택자에 주택자금 대출. 한국석유공사, 해외 유전 개발 관련 예산 횡령. 한국도로공사, 국유지 임대 매각 청탁받고 수뢰 및 공사 발주 대가 성매매 태국 호화 여행. 근로복지공단, 5급과장이 15억원 횡령해 주식·도박으로 탕진. 한국기계연구원, 과학기자재 허위로 구입해 22억원 횡령. 경기도시공사, 11개 감정평가법인으로부터 뇌물 갹출. 한국증권선물거래소, 노조위원장이 납품 청탁받고 2억원 수수. 대한석탄공사, 어음 1678억원 담보 없이 구입. 증권예탁결재원, 직원 채용 때 점수 조작과 각종 서류 위·변조. 한국관광공사, 입찰 정보 유출하고 5000만원 수수 등. 국가 돈을 제멋대로 써댔거나 지위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른 공기업들이다.

공기업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어느 때보다 결과에 관심이 쏠렸다. 정부가 ‘공기업 개혁’을 호언장담했던 터라 검찰 수사 결과가 궁금했던 것이다. 추악한 공기업 비리 실상은 정부에게 강력한 개혁 명분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검찰이 눈에 불을 켜고 공기업 비리 실태를 샅샅이 뒤질 것이란 관측이 팽배했다.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5월, 대검중수부가 직접 나서서 중간수사 결과를 알렸다. 한국석유공사는 해외 유전 개발사업과 관련 임직원이 횡령한 혐의가 포착됐고, 석유개발기금 집행 과정의 비리 정황도 나왔다. 공기업 비리백태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치권의 우회적 압박 

대한석탄공사는 부도 직전의 모 건설사에 1800억원의 특혜 대출을 제공한 정황이 포착됐다. 또 자산관리공사의 경우 임직원들이 부실채권을 매각하는 과정에서의 비리 혐의가 속속 드러났다. 한국도로공사는 국유지 불하 과정에서 직원들이 수뢰한 혐의를 받았다. 증권예탁결제원은 신입사원 채용 비리 정황이 잡혔다. 한국증권선물거래소는 예산집행 과정에서 임직원 횡령 및 비리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공기업들의 비리 규모가 엄청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됐다.

검찰은 전방위적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공기업의 경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속전속결식 수사를 전개했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었지만, 일시적인 경영 피해보다 공기업 비리의 뿌리를 뽑는 것이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더 필요하다는 여론이 검찰의 수사 속도를 높인 측면도 강했다. 새 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또 공기업 개혁이 본격 진행될 시점이기 때문에 비리 근원까지 강도 높은 수사 칼날을 들이대야 한다는 정치권의 우회적인 압박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공기업 수사와 관련해 올해 초부터 비자금 조성과 횡령, 분식회계 및 탈세, 임직원의 직무 관련 금품수수, 인사 비리 및 경영 관련 업무상 배임, 담합 입찰과 불법 하도급, 업무 알선 비리 등을 단속 대상으로 정해 감사원 자료와 내부자 고발 등 각종 정보를 수집·분석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수사 칼날은 우선 공기업 임직원의 개인 비리 쪽을 겨냥했다. 개인 비리 수사 중 압수수색 등을 통해 조직 비리의 주요 물증이 확보되면 자연스럽게 공기업 전반의 비리나 고위 공직자 비리가 검찰 수사의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기대했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과 관가에서는 검찰의 공기업 수사가 이명박 정부가 추진 중인 공기업 민영화와 공공기관장 교체를 위한 구실로 활용될 것이란 분석과 전망이 파다했다. 공기업 수사가 구조적 비리로 확대될 경우 직전 참여정부 실세들의 외압이나 인허가 과정에서의 이권 챙기기 실상이 드러날 수 있고, 결국 권력형 비리 수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곁들여졌다.  

이번에 드러난 공기업 비리백태는 이명박 정부에게는 공기업 개혁의 명분이 되면서 또 야권을 옥죌 수 있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검찰이 지난 4월 말 한국관광공사 자회사인 그랜드코리아레저를 진격 압수수색했을 때, 권력형 비리 수사가 본격화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이 회사는 참여정부 시절 정·관계 인사들에게 금품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검찰 안팎에서는 3~4개 대형 공기업이 추가 수사 대상이 될 것이란 이야기도 나돌았다. 정부의 공기업 개혁의지가 강해 보였기 때문에 비리에 연루됐을만한 참여정부 핵심 인사와 고위 관료들의 혐의를 찾는 데 검찰이 혈안이 돼 있다는 설이 공공연하게 회자됐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7월24일 대검찰청의 공기업 비리 중간수사 결과가 나왔다. 전국 21개 공기업 소속 임직원 104명이 기소되고 이중 37명이 구속 기소됐다.

구조적 비리는 없다? 

검찰 수사 결과는 예상대로 끔찍했다. 추악한 각종 비리 혐의가 쏟아져 나왔다. 공사 발주 대가로 성매매가 포함된 해외여행 접대를 받았는가 하면, 인사팀장이 신입사원 채용 시 특정인의 합격을 위해 합격자 순위를 바꿨고, 수년간 지속된 거액의 내부 횡령을 적발해내지 못하는 등 비리 정도가 심각했다.

부산동부지청에 따르면, 한국도로공사 과장 A씨 등 2명은 2004∼2006년 무면허 업자에게 1억원대의 철거 및 폐기물 공사 6건을 임의로 발주해주는 대가로 현금과 함께 성매매가 포함된 2박3일짜리 태국 여행을 다녀왔다. 이들은 평상시에도 수시로 수백만원 상당의 술·골프 접대를 제공받았다. 한국도로공사 간부와 직원 29명이 고객을 가장해 ‘고객만족도 평가’에 응답한 혐의도 검찰 수사 도마 위에 올랐다.

수원지검 성남지청은 근로복지공단 직원 B씨를 구속했다. 3년간 15억원의 자금을 횡령한 혐의다. 직원들의 공금횡령 여부를 점검할 수 있는 내부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사이 B씨는 횡령금을 경마·경륜 등 도박에 탕진했고, 심지어 로또복권 구입 자금으로도 썼다. 한 번에 무려 1000만원어치씩이나 로또복권을 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단은 횡령금을 전혀 회수하지 못했다. 또 연구그룹장 등 6명이 지난 6년 동안 물품구매요청서를 허위 작성해 총 22억원의 연구비를 가로챈 사실이 창원지검에 적발됐다. 한 책임연구원은 이렇게 챙긴 돈을 술값으로 2억원을 썼다.

서울남부지검은 증권예탁결제원 경영지원본부장과 인사팀장 등 5명이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특정인을 뽑기 위해 채점표상의 점수를 조작하고 서류를 위·변조한 혐의를 잡았다.

이처럼 다양한 유형의 공기업 비리 정황이 검찰에 속속 포착됐다. 하지만 검찰의 전방위 수사로 비리의 구조적 문제가 깊숙이 파헤쳐 질 것이란 당초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검찰은 총 40개 공기업에 대해 대대적인 기획수사를 벌였지만 절반가량인 20개 공기업에 대해서는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했다. 또 임직원 개인 비리 적발에만 그쳤을 뿐 공기업의 구조적·조직적 상납 비리를 밝히는 데는 한계를 드러냈다.

검찰은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국가 보조금의 경우 지급심사 및 관리가 형식적이고 담당 공무원까지 범죄에 가담하는 등 ‘주인 없는 눈먼 돈’이라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며 “보조금 사업이 기획 단계부터 부실하게 추진돼 예산 낭비 및 선의의 피해자를 발생시킨다”고 지적했다. 또 “공기업은 독점적 지위에서 국민생활과 직결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엄청난 예산을 움직이는데 재량 범위가 너무 넓어 감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공직자가 뇌물을 받는 것 이상의 구조적 비리’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검찰은 공기업 비리의 특징에 대해 공기업 임직원의 업무재량권 과다, 내부 감사 시스템 부재 및 도덕적 불감증 심각, 일부 공기업 노조에 의한 비리 심화, 임직원의 청렴도 및 책임의식 결여 등을 열거했지만 구조적인 비리 근절 조치는 내놓지 못했다. 소위 ‘거물급’ 연루 사실도 밝혀진 것이 없다.

실제로 구조적 비리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검찰이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던 것인지 현재로서는 그 진실을 알 수 없지만, 비리 척결의 근원적 해법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재차 확인된 셈이다.   

방만 경영의 진수

지난 5월 감사원은 3월24일부터 4월18일까지 31개 시장형 공기업을 대상으로 벌인 1단계 공기업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공기업은 불경기 무풍지대’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31개 공기업이 지난 2003년부터 부당하게 집행한 예산은 무려 1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 결과 300여 건의 위법·부당 사례가 적발됐고 감사원은 이중 횡령·수뢰 혐의가 있는 공기업 임직원 20여 명을 검찰에 수사 요청하고 100여 명을 엄중 문책하라고 해당 기관에 통보했다.

또 인건비 편법 인상, 방만한 조직 운용, 자회사 부당 지원, 복리후생비 편법 조성, 계약 업무 관련 비리, 기강 해이 사례도 속속 드러났다. 31개 공기업의 직원 1인당 인건비는 2003년 이후 연평균 7%씩 증가해 2006년에는 6037만원에 이르렀다. 같은 해 100~299인 중소기업의 1인당 인건비 2951만원에 비해 2배 이상 높은 액수다. 인력도 2003~2007년 사이 평균 13%가 늘어 전체 산업 평균 증가율 5.8%보다 2배 이상 높았다. 특히 한국토지공사의 인력 증가율은 58.9%나 됐고 기술신용보증기금은 같은 기간 임원만 2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감사원은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공기업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했다”면서 “일부 공기업은 민영화가 불가피하다는 게 감사원의 판단”이라고 했다. 감사 결과는 재정부가 진행 중인 공공기관 경영 평가에 반영됐다. 

감사원은 31개 공기업이 운영하는 65개 자회사를 종합 검토해 민영화 대상과 모기업 흡수 또는 청산 대상, 그리고 조직·기능 슬림화 대상 등으로 분류한 뒤 1단계 공기업 감사 결과와 함께 재정부에 전달했다.

이어 지난 7월 발표된 감사원의 공기업 감사 결과에서는 공기업 비리의 구체적 사례가 드러났다. 한국석유공사, 대한석탄공사, 대한광업진흥공사, 한국가스공사, 한국지역난방공사 등에 대한 감사원의 기관 운영 감사 결과, 국고를 지원받는 이들 공기업 대부분이 사내 근로복지기금을 부적절하게 조성하거나 직원 임금 등을 과다하게 지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질적 병폐로 지적돼 온 채용 편법 및 금품수수 비리도 여전히 횡횡했다.

한국석유공사는 2005∼2007년 398억원가량의 석유비축 자산관리 국가보조금을 당시 산자부에 반납하지 않고 이 중 20억원은 사내 근로복지기금 출연 재원 등으로 활용했다. 이 기간 동안 한국석유공사는 고의로 반납하지 않으려고 보조금을 적게 정산한 실적보고서를 산자부에 제출했고, 이를 통해 398억4200만원을 챙겼다. 또 2004∼2005년 정부 석유 비축유 812만9000배럴을 판매한 뒤 유가 상승에 따른 자금 부족으로 비축유 물량을 재구매하지 못했는데도 2005∼2007년 사내 근로복지기금의 출연 규모를 축소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석유공사는 통근 보조비가 폐지됐음에도 편법으로 교통 보조비를 지급하는 등 인건비를 과다하게 인상했고, 경력직 인사를 채용하면서 공개경쟁 규정을 지키지 않고 직원들을 대상으로 특채한 것으로 드러났다. 3급 이상 상위직도 직책 수보다 60명이나 많이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감사원 결과가 사실이라면 한국석유공사는 썩을 대로 썩은 인사 시스템으로 지금껏 용케도 잘 굴러온 셈이다.   

대한석탄공사의 경우 감사원은 탄질 관리 업무를 주관하는 직원 2명이 2005∼2006년 질이 낮은 무연탄을 민간 연탄공장에 판매해 15억3100만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취했다며 이들 직원을 징계처분 할 것을 요구했다. 감사원은 또 인사담당 직원 2명이 2006∼2007년 공개경쟁 채용 절차를 위반해 광업소 과장, 초등학교 동창, 광업소 노동조합 대의원으로부터 채용을 부탁받고 4명을 채용했고 2007년 말 설치 이후 개발 실적이 없는 해외개발실을 운영하면서 예산 5억5300만원을 낭비했던 사실을 적발했다.

감사원은 광업진흥공사와 관련, 직원 3명이 허위 검사 대가로 450만원을 받아낸 사실을 적발하고 이들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다.

정부에 허위보고 상여금 ‘왕창’

한국가스공사의 팀장 D씨는 2007년 12월 단합대회를 개최하면서 직무 관련 시공업체에 숙박비 17만여원을 부담시키고, 허위 출장 신청에 따라 지급된 여비 310만여원을 회식비로 사용한 혐의가 덜미를 잡혔다. 또 2005년 3월부터 7개월 여간 사장 직무를 대행한 부사장에게 업무추진비 등의 명목으로 사장 임금 수준과 같게 8090만원을 더 지급했고, 2005년 월차휴가를 없앴으나 9∼12일짜리 보전휴가제도를 새로 만들어 직원들에게 연차수당으로 73억원을 과다 지급한 것도 밝혀졌다.

지역난방공사의 경우 2004∼2007년 1년 이상 근무하지 않아 연차휴가 보상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는 장기 교육자 19명에게 5148만원을 준 것이 감사원 조사에 걸렸다. 

한국토지공사가 내부 자금을 엉뚱하게 유용한 점도 포착됐다. 감사원에 따르면, 직원 개인이 부담해야 할 통신비를 월 3만원씩 지원해 지난해 12월까지 11개월간 3급 이하의 전 직원에게 통신비 5억9600만원(1인당 월평균 2만7304원)을 쏟아 부었다. 감사원은 지난 3월10일부터 4월18일까지 한국토지공사를 감사한 결과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방만한 경영 사례가 적발되었다며 주의조치를 내렸다고 밝혔다.

‘통합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며 서로 날을 세우고 있는 대한주택공사나 한국토지공사 모두 비상식적 직원복지 등 방만 경영이라는 지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전력의 경우는 더욱 충격적이다. 한국전력은 경영 실적과 관련, 허위자료를 제출하거나 영업이익을 조정하는 수법으로 899억원 규모의 상여금을 과다 지급하는 등 돈을 펑펑 써댄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한국전력 및 6개 발전 자회사에 대해 기관운영 감사를 실시, 이 같은 문제점을 적발했다.

한국전력은 재정부 장관이 구성한 공기업·준정부기관 경영평가단의 경영 평가에 따라 경영 실적을 확정하고 인센티브 상여금 지급률을 결정했다. 한국전력은 이 제도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해 자신들의 경영 평가를 정부에 허위로 알려 돈을 과다하게 지급 받아왔다.

2006년에는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미 보전을 받은 석유수입부과금을 공공이익과 부가가치에 가산하는 방식으로 허위 경영 실적 자료를 경영평가단에 제출했다. 유가 인상분에 대해 보전해주는 명목의 석유수입부과금은 2005년 3월 이미 폐지된 제도다. 하지만 한국전력 등은 주무부처인 재정부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을 악용해 석유수입부과금 1787억원까지 가산하는 방법으로 경영 실적을 부풀렸다. 한국전력 등은 이를 통해 2006년 경영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고 이를 근거로 지난해 직원들에게 상여금을 216억원 과다 지급했다.

또 한국전력 등은 전력 구입비를 적게 지급하면서 늘어난 영업이익을 경영 실적에 포함시키는 방법도 썼다. 이를 통해 경영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다음 683억여억원을 상여금 명목으로 지급했다.

1인당 평균 인건비 1억원 ‘최고’

흔히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증권예탁결제원의 도덕적 해이도 엄청났다. 회원인 증권사들로부터 너무 많은 수수료를 챙긴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증권예탁결제원은 엉성한 근무, 과도한 접대, 부정 채용, 정부 사업 적자 운영 등 방만함의 극치가 감사 결과 드러났다. 

감사원은 지난 7월말 증권예탁결제원을 감사한 결과 업무, 인사, 실적 등 기업의 모든 부문에서 문제점이 있다고 발표하고 업무용 경비를 부당하게 집행한 직원 5명의 징계처분 등 인사조치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감사원에 따르면, 증권예탁결제원은 2005부터 2007년까지 11차례에 걸쳐 재경부 직원과 유흥주점 등에서 술을 마신 뒤 2290여만원을 법인카드로 결제했다. 또 공무원들에게 법인카드를 줘, 공무원들이 마신 400여만원의 술값을 결제하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증권예탁결제원은 임직원들끼리 마신 술값과 골프비용을 회계증빙서류로 허위 기재해 법인카드로 결제하기도 했다. 증권예탁결제원 임직원들은 함께 골프를 친 뒤 회계증빙서류를 마련해 골프비용 7500만원가량을 법인카드로 냈고, 30여 회에 걸쳐 내부 임직원의 유흥비 3844만원도 법인카드로 처리했다.

증권사로부터 수수료를 과다하게 징수하고 있기 때문에 증권예탁결제원 직원들이 돈을 물 쓰듯 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감사원에 따르면, 증권예탁결제원은 지난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수수료로 3384억원을 챙겨 자체 사업 적자분 236억원을 보전하고도 2891억원의 흑자를 남길 정도였다. 증권예탁결제원은 이렇게 남긴 이익으로 ‘경로효친 기념품 지원’ 명목으로 2007년 전 직원에게 1인당 180만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을 제공하는 등 모두 7억6700만원을 지급했다. 또 2003년부터 체육·문화행사 지원 명목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전 직원에게 21억원어치 상품권을 지급했다.

지난해 증권예탁결제원의 1인당 인건비는 무려 1억원에 달했다. 금융·공공기관을 통 털어 가장 많다. 일은 편하고 돈이 넘쳐나는 이른 바 ‘신이 내린 직장 중 으뜸’이란 얘기도 이 때문에 나왔다. 당연히 채용 비리가 없을 수 없다. 감사원은 신입직원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시험점수를 조작하여 부당하게 합격시킨 사례를 적발하고, 담당 직원에 대한 징계처분을 요구했다.

전직 임원이 자회사 요직 ‘싹쓸이’

공기업 임직원들의 낯 뜨거운 비리백태는 과거에도 넘쳐났다. 지난해 10월 대덕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공기업 간부가 기업의 돈으로 자신의 외상값을 갚는 데 쓴 사실이 드러났다.

대덕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 고위 간부는 국민 혈세로 자신의 외상값을 변제하는가 하면 사무실 에어컨을 뜯어가거나 법인카드를 개인 용도로 쓰는 등의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또 다른 간부는 1인당 100만원씩을 주고 모두 17명의 허위 건축주를 모집해 4000만원의 부당이득을 챙겼다가 경찰에 불구속 입건되기도 했다. E 소장은 간부직원을 시켜 만보기 100개(250만원)를 허위 구매하도록 하고 본인의 유흥업소 외상값으로 변제하도록 지시했다가 적발됐다. 특히 E 소장은 2004년 이사장 재직 시 법인카드를 개인 용도로 21회(246만원)나 사용하고 1인당 3만원이 넘는 식사를 하면서 허위 정산하도록 방조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E 소장은 2006년 특별성과급 508만원까지 챙겼던 것으로 드러났다.

중앙기관의 전직 임원이 자회사 요직을 싹쓸이 한 일도 있었다. 지난해 국정감사 당시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소속 대통합민주신당 우윤근 의원에 따르면, 농협 자회사에 임명돼 근무했거나 현재 근무 중인 임원들의 현황을 보면 전체 127명 중 농협중앙회나 농협 내부 출신들이 임명된 경우는 116명으로 91.3%를 차지했다. 출신 기관별로는 농협유통은 전체 12명의 임원 중 농협중앙회 8명, 농림부 4명이었고, 남해화학의 경우 전체 25명중 농협중앙회 10명, 농림부 2명, 외부인사 2명, 국회 1명, 남해화학 내부인사 10명 등이었다.

우 의원은 “기업들이 경영혁신을 통해 거듭나고 외부의 유능한 인재들을 영입해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농협의 자회사를 보면 과연 어떤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지 심각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철도공사의 계열사에 대한 불법취업 사례도 충격적이었다. 건설교통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윤두환 의원에 따르면, 계열사 특채 시험에서 실기 및 면접위원이 자신의 처남을 합격시켰고, 면접 시 연필로 우선 기재한 뒤 면접 종료 후 사인펜으로 답안을 재작성해 제출한 일이 있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아예 지원 자격을 철도가족 자녀 및 친·인척으로 한정해 채용한 경우도 있었다.

사라질 순 없나?

입사 청탁, 특혜 대출, 실적 부풀리기, 선심 출장, 과다한 접대 등은 공기업 비리의 단골 메뉴다.

지난 2006년 12월 대학교수·공인회계사·각계 전문가 등 49명으로 구성된 정부투자기관 경영평가단(단장 장지인 중앙대 교수)은 한국전력·KOTRA·한국석유공사·한국조폐공사 등 14개 정부투자기관들의 2005년도 경영 실적에 대한 경영평가보고서를 공개했다. 정부 당국이 정부투자기관의 경영평가보고서를 만천하에 공개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경영평가단은 정부투자기관들의 내 맘대로식 경영 행태를 신랄하게 까발렸다. 당시 정부의 이 같은 ‘개혁의지’는 좋은 여론을 낳았다. 뿌리 뽑히지 않는 공기업 비리 척결이 이를 계기로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컸다.

평가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부투자기관들은 직원들에게 특혜 대출, 선심성 해외출장, 자녀 입사 우대 등의 혜택을 제공하는가 하면 정부의 지침을 무시하고 직원들의 임금을 마구잡이로 올렸다. 일부 공기업들은 감사원 등으로부터 특혜 대출에 대한 지적을 받고도 고치기는커녕 ‘배째라식으로’ 버티기도 했다. 일부 직원들이 저지르는 금품수수 등의 불법행위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과도한 접대비 지출은 관행처럼 뿌리내려 있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노조위원장이 업무 편의·인사 청탁 등의 명목으로 직원으로부터 거액의 금품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직원 자녀에 대한 입사 우대, 과도한 해외연수, 휴대전화 요금 지원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KOTRA는 업무추진비가 과다하게 편성됐고, 접대비에 대한 별도의 기준이 필요할 만큼 접대비 낭비가 심각했다. 비상임이사들에 대해 안건의 사전보고 등 각종 정보 제공 노력이 미흡, 결국 경영진에 대한 견제도 부족했다.

농수산물유통공사는 1인당 주택자금, 학자금 대여금이 정부투자기관 중에서 가장 많고 일회성·선심성 해외출장이 빈번했다.

공기업의 뇌물수수 비리 유형은 그때도 지금과 비슷했다. 한국석유공사는 임원이 공사 수주의 대가로 하청업체로부터 뇌물을 수수하다 국무총리실 암행감찰반에 적발된 것으로 밝혀졌다. 비축석유감시원이 석유의 교환·저장 과정에서 석유를 빼돌리는 비리가 근절되지 않고 있었다. 한국석유공사는 또 다른 19개 공기업들과 함께 임직원에 대한 ‘특혜성 대출 금리’에 대해 개선권고를 받았으나 이를 무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적 부풀리기’ 행태도 심각했다. 한국관광공사는 외국인 관광객 600만 명 유치 달성을 마치 공사의 실적인양 적시했다. 9억원의 예산으로 6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해 90배의 투자수익률(ROI)을 창출했다고 주장했지만 감사원은 한국관광공사의 자화자찬을 두고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일축했다.

한국전력은 2015년 중 기업가치를 50조원으로 끌어올린다는 청사진을 제시했으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없고 전력 장기 수요에 대한 예측 방법도 객관성과 타당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대한주택공사는 향후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국민임대주택의 장기수선충당금 부족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냈지만, 감사원은 이 내용이 모호하고 주택 보급률이 높은 곳에 임대주택을 건설하는 등 임대주택 사업에 대한 수요 예측과 물량 예측이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한국조폐공사는 사진 부착식 여권의 제조상 결함으로 민원인의 불편을 초래, 손해배상으로 1억2000만원을 물었고 품질 불량으로 리콜 조치한 사진전사식 여권도 9400권에 이른 것으로 드러났다.

실적 부진 공공기관 경영 컨설팅, 하지만…

정부는 ‘공기업 선진화 계획’이란 이름으로 공기업 개혁을 진행한다. 우선 지난해 실적 평가에서 성적이 부진한 15개 공공기관들에 대한 경영 컨설팅이 시작된다. 재정부는 지난 8월4일 지난해 경영 실적이 부진한 것으로 평가받은 15개 공공기관들의 경영 효율성 제고를 위한 경영 컨설팅을 이번 달 초부터 착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5개 부진 기관은 대한석탄공사,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등 공기업 2개와 한국소방검정공사, 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 한국과학문화재단, 독립기념관, 한국원자력문화재단, 우정사업진흥회, 증권예탁결제원, 한국산업기술재단, 영화진흥위원회, 한국부품소재산업진흥원, 한국청소년상담원, 한국노동교육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준정부기관 13개다.

재정부가 추진하는 이번 경영 컨설팅의 주체는 인사·조직, 재무·회계, 전략·성과관리 등 3개 부문에 학식과 경험을 갖춘 교수, 회계사, 컨설턴트 등 총 45명의 전문가들이다. 이번 컨설팅은 지난해 부진기관의 방만 경영에 대한 주요 요인 분석 및 서비스 경쟁력 제고를 위한 경영시스템 개선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실시된다.

부진기관은 8월 중 컨설팅을 받고 그 결과를 반영한 경영개선계획이 재정부로 넘어간다. 재정부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경영개선계획의 이행상황을 10월 중 점검한다.

재정부는 “이번 경영 컨설팅으로 공공기관의 경영관리 시스템을 개선하고 방만 경영 요인을 해소해 경영 효율성 및 서비스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경영 평가의 환류 기능이 강화되고 경영 성과에 대한 책임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기대만큼 실효성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당최 공기업 개혁의지가 없어 보는데 무슨 기대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지난 8월11일 정부가 발표한 1차 공기업 선진화 방안은 숫자 부풀리기를 보여주기에만 급급했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공기업 개혁’은 계속 진행돼온 과제였다. 대선에서도 공기업 개혁은 주요 공약이었다. ‘정권 초기에 밀어붙이지 않으면 공기업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사실로 드러나는 듯 정부는 힘이 다 빠져버린 모양새다.

최종 결정권을 가진 공공기관운영위원회나 공기업선진화추진위원회는 공기업 개혁과 관련한 실효적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여당과 정부가 정한대로 방향을 반영하는 수동적 입장이다. 때문에 ‘개혁’이 가능할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이젠 정부 쪽에서도 ‘공기업 개혁’이라는 표현이 잘 나오지 않는다. 출발은 ‘공기업 개혁’이었지만 지금은 ‘공기업 선진화’다. 썩은 비리와 갖은 방만 경영을 일삼으며 국민의 혈세를 물 쓰듯 했던 상당수 공기업을 뜯어 고치겠다는 당초 의지는 오간데 없어 보인다. 역대 정부에서 공기업 개혁은 번번이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현 정부 스스로 자신했지만 역시 시간이 갈수록 개혁의지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촛불’에 발목이 잡힌 듯 보이기도 했다. 미국산 쇠고기 사태로 국정이 혼돈에 빠지고 대통령의 지지도가 초유의 바닥세를 헤매면서 개혁 드라이브에 제동이 걸렸다. 광범위한 조직의 ‘공기업 촛불’을 의식이라도 한 듯 ‘개혁’은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당초 50~60개 달할 것이라던 민영화 대상 공기업은 점차 줄어들었다. 결국 ‘반타작’ 정도로 계획이 수정됐다.

초반부터 모든 공기업을 개혁 대상으로 삼겠다는 광범위한 개혁 계획은 집중력이 부족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낳았지만, 아쉽게도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몇 개의 핵심 공기업을 집중적으로 개혁해나가는 방법이 옳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정부의 개혁 전략이 부실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의 공기업 개혁의지가 허술하다는 지적을 받는 결정적 계기는 계획성 없이 말만 앞세우는 행태 때문이다. 정부가 공기업 선진화 1차 계획을 발표했던 지난 8월11일 오전, 강만수 재정부 장관은 당정협의에 앞서 1차 공기업 선진화 대상 기관을 33곳으로 보고했다. 하지만 불과 몇 시간 뒤 언론에 배포된 보도자료에는 대상 기관이 41곳으로 늘어났다.

한나라당이 강 장관에게 선진화 대상 공기업 숫자를 늘리라고 주문한 결과다. 이로 인해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계열사, 인천국제공항공사 등 8곳이 갑자기 민영화 대상에 추가됐다. 중차대한 국가적 과제인 공기업 민영화 계획을 정부가 어떻게 진행하는지 잘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이명박 정부, 공기업 개혁 자격 논란

한나라당에서조차 1차 계획안에 대한 비판이 줄을 이었다. 국민의 눈높이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내부 비판이 강하게 나왔다. 특히 최고위원 등 당내 지도부 및 중진의원들 사이에서 이런 지적이 제기되면서 향후 발표될 2, 3단계의 공기업 선진화 방안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정부가 공기업 개혁 대상의 수를 가지고 ‘숫자놀음’하는 것처럼 보인 점도 정부의 개혁의지에 대한 믿음을 떨어뜨렸다. 정부가 발표한 민영화 대상 공기업 27곳 중 대우조선해양 등 공적자금 투입 기관 14곳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민영화 대상 기업은 13곳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미 민영화 작업이 진행 중이거나 민영화 방침이 확정된 7곳 가량을 제외하면 6곳 정도만 남는다. 이 중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지분 49%를 매각하겠다는 계획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져 민영화 대상에 두기 어렵다. 또 뉴서울컨트리클럽이나 경북관광개발공사 등은 비리와 부패가 만연한 타 굵직한 공기업보다 개혁이 시급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번 공기업 선진화 방안의 핵심인 대한주택공사와 한국토지공사의 통폐합에 대해서는 원칙만 서 있을 뿐 세부 방안이 없는 점도 정부의 개혁의지를 의심하게 한다. ‘고작 1차인데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냉정히 보자면 2, 3차 선진화 방안에 큰 기대를 걸기도 어렵다. 공기업 개혁은 앞으로 있을 당장의 국정 현안에 밀릴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실효성을 찾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다. 더군다나 향후 공기업 기관장에 종전과 같은 ‘낙하산 착륙’이 재현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공기업 개혁의 강도는 갈수록 약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지난 수개월 동안 이미 낙하산 인사가 자행돼 왔다. 참여정부 사람이 퇴출된 자리를 대선·총선 등 선거에 도움이 된 인사나 이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자들이 대거 메웠다.

고려대, 현대건설, 서울시 등 출신 인사들이 공기업 기관장으로 진출했다. 당초 이 대통령은 총선 낙천·낙선 인사들에게는 6개월간 자리를 주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때문에 공기업 개혁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공기업을 민영화해 국가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출범했다. 그리고 출범과 동시에 공기업에 대한 감사 시스템이 가동됐다. 정권의 공기업 개혁의지에 발맞춰 진행된 감사와 검찰 수사에서 공기업의 케케묵은 비리백태가 또다시 드러났다. 공기업 경영진과 갈등을 빚고 있는 노조도 이 기회에 경영진의 비리를 들춰내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 공기업은 ‘비리 백화점’처럼 인식되고 있고, 자연스럽게 ‘이번만큼은 공기업을 제대로 개혁해야 한다’는 여론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 인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공기업의 존재 이유와 필요성, 기능 등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고, 또 왜 이 같은 비리가 반복해서 재현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을 파고드는 노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기업 비리 원죄는 ‘낙하산’

공기업의 최고경영자 자리는 ‘낙하산 인사’로 채워졌고, 비리 문제가 반복해서 터지더라도 여태껏 최고경영자가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번 감사원 조사나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듯 비리 실무 담당자에 대한 처벌 수준에서 일은 마무리됐다. 그리고 이 같은 비리는 반복됐다.

전문성이 부족한 정치권 인사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면 감독해야 할 정부와 공기업 간에 보이지 않는 봐주기와 타협의 고리가 생겨나게 된다. 공기업은 정치인의 민원을 들어주고 정부에 압력을 넣게 되며 정부의 감독 기능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 정권에 비해 ‘낙하산 인사’, ‘코드 인사’가 현격히 줄었다고 자평하면서 최근 ‘이명박 정부와 참여정부의 공공기관장 이력 분석’이라는 이례적인 자료집까지 냈다. 하지만 이 정부 역시 타 정부와 다름없이 낙하산 인사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고질적인 공기업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낙하산 파행 인사부터 없애야 한다. 그 다음 직무 분석을 통해 불필요한 조직과 인력을 과감하게 도려내고 투명성을 높이는 방향에서 경영 시스템을 혁신하는 개혁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전문성도 없고 업무에 별 뜻 없이 ‘감투’ 하나 받아 내려온 정치권 출신 낙하산 인사들이 감사로 있는 한 공기업 비리는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공기업 개혁의 바로미터 ‘주택공사-토지공사 통합’

15년째 실패 뒤엔 그만한 이유가…  

이명박 정부의 핵심 공약 가운데 하나가 공기업 개혁이다. 정부는 41개 공기업과 공적자금 투자기업을 민영화하거나 통합 또는 기능 조정할 계획이다. 이런 가운데 공기업 개혁의 최대 이슈로 손꼽히는 대한주택공사와 한국토지공사의 통합 성공 여부가 관건으로 떠올랐다. 정부는 통합을 밀어붙일 기세다. 하지만 반대 여론이 만만찮다. 또 주공은 통합 찬성이고 토공은 결사반대다. 접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통합 찬성론자들은 주공-토공의 업무중복 해소를 통한 효율성과 시대에 맞는 기능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인 반면, 반대론자들은 두 기관의 설립 목적이 다르고 공공기관 간 경쟁이 필요하다는 점과 ‘부실 공룡 공기업’의 탄생은 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15년을 이어온 두 공기업의 통합 논란. 긴 시간 동안 실패를 거듭했던 주공-토공 통합 작업 앞에 놓인 걸림돌과 현실적 한계점을 진단했다.

‘공기업 개혁’이 어느 샌가 ‘공기업 선진화’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정부의 공기업 개혁의지가 약해진 게 아니냐는 해석이 뒤따랐다. 전반적 개혁은 이미 물 건너갔고, 기껏해야 부분 손질에 그치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제기되면서 일각에서는 ‘결국엔 무늬만 개혁이 될 것’이란 비아냥거림마저 나왔다.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 중인 주공과 토공의 통합 작업에 대한 시선도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두 기관 통합론은 지난 15년간 때만 되면 나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런 전례 탓에 통합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굳어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정부는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로 밀어붙이는 중이다.

1단계 공기업 선진화 작업의 핵심인 주공-토공 통합 작업은 오래 전부터 추진돼온 ‘골칫거리’ 과제다. 공기업 개혁은 대통령 선거 때마다 각 후보의 공약으로 등장했고, 정부 출범과 동시에 최우선 개혁 대상이 되곤 했다. 주공-토공 통합 문제는 늘 공기업 개혁 과제의 한 가운데 있었다. 1993년 처음 두 기관 통합이 거론된 이래 모두 6번이나 통합 추진 계획이 잡혔다. 하지만 실행에 옮겨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장 최근 통합이 추진된 것은 2003년 4월의 일이다. 참여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논의됐다. 국민의 정부 말기인 2001년에도 정부는 두 기관의 통합을 밀어붙였으나 노조의 반발과 국회의 비협조로 무산됐다. 당시 국회가 의뢰한 통합 타당성 분석 용역 결과는 부정적으로 나왔고, 통합은 없었던 일이 돼버렸다.

두 기관 통합론이 매번 거론되면서도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통합의 당위성을 가로막는 현실적 장벽은 과연 무엇일까.

국회통과 쉽지 않을 듯   

우선 찬반양론이 너무 팽팽하다. 거대 공기업이 통합되는 데 따른 실효성을 둘러싸고 찬반 주장이 극명하게 맞선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지역 간 입장차는 물론이고 학자·전문가들의 논리도 뚜렷하게 양분된다.

통합에 대한 찬반이 양립하더라도 현실적으로 통합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국회 관문을 넘어야 한다. 통합공사법이 국회를 통과해야 실질적인 통합 작업이 진행된다. 국회통과가 무산될 경우 통합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없던 일이 돼버릴 수 있다. 

국토해양부는 지난 8월14일 열린 주공-토공 선진화를 위한 토론회 결과를 토대로 세부 방안을 마련하고 이를 기획재정부 산하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소위원회인 선진화추진위원회에 보고했다.

정부는 선진화추진위원회의 심의가 끝나면 9월까지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통합안을 정부안으로 최종 확정할 방침이다. 그런 다음 가칭 ‘한국토지주택공사법’을 10월 국회에 제출한다. 정부는 이 법안을 가급적 빨리 통과시켜 2010년 통합공사를 출범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정부가 할 수 있는 통합 기초 작업은 일단 여기까지다.

통합공사법 제정 법률안이 올해 안으로 국회를 통과한다면 통합공사의 출범 시기는 2010년 초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법안이 예전처럼 표류하거나 국회통과에 실패할 경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한나라당이 전에 없던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와 여당이 힘을 합치면 국회통과가 쉬울 것처럼 보이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찬반양론이 워낙 극명하기 때문에 통합 문제는 국론을 양분시키는 새로운 이슈로 떠오를 수 있다. 가령 이 이슈에 대한 여론이 ‘5 대 5 대결’로 가게 될 경우 한나라당으로서는 큰 부담이다. 의석 수에서는 유리하지만, 이를 믿고 힘으로 밀어붙였다간 ‘오만한 정권’이란 공세에 부딪히면서 국정이 또다시 발목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주공과 토공의 유치 예정지인 경남 진주와 전북 전주가 각각 영남과 호남이기 때문에 이 이슈가 묘한 지역대결 양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여권으로서는 결단코 피하고 싶은 경우의 수다. 특히 야권이 통합 반대 입장인 토공 편을 들면서 여권의 독주를 막겠다고 나설 낌새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주공-토공 통합 문제가 결국은 정치 쟁점화할 공산이 크다.

지난 2003년 통합법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심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폐기됐을 당시 정치권에서는 “주공-토공 통합에 대해서는 좀 더 숙고할 필요가 있고, 통합 작업보다 더 시급한 현안이 많다”는 한결같은 답이 나왔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당시 통합법 무산을 두고 “주공과 토공이 집요하게 벌인 로비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통합 당사자들의 입장은 서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주공은 ‘선 통합 후 구조조정’을 원하고 있지만 토공은 정반대 입장이다. 토공은 통합 반대를 주장하면서 일간지에 광고를 내는가 하면 지난 5월 중순부터는 노조원들이 경기도 분당 본사 앞에 천막을 치고 무기한 농성까지 벌이고 있다. 토공 노조는 농성의 수위를 높여나갈 각오다. 노조 특히 토공 측 노조의 극렬한 반대는 과거 정부에서의 통합 논의를 번번이 좌절시켰을 만큼 파괴력이 크다.

노조와 로비

두 기관의 입장 차는 우선 규모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주공과 토공의 임직원 수는 각각 4385명과 2805명. 토공 입장에서는 주공의 덩치가 자신들과 비슷해져야 동등한 입장에서 통합 논의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주공은 토공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어차피 통합으로 가야 한다면 구조조정을 하기 전인 지금 상황에서 먼저 통합하는 게 더 낫다. 통합부터 해야 향후 구조조정에서 각종 사업에 대한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주공 노조도 토공 노조 못지않다. 지난 7월 초 열린 한국토지공법학회 학술대회에서 ‘통합 반대’로 의견이 모아지자 주공 측은 과격해졌다. 주공은 규탄 성명을 내는 등 강력 반발했다. 심지어 선 통합 찬성론자들을 동원해 언론에 통합의 당위성을 홍보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혁신도시 유치에 얽힌 문제도 복잡하다. 오는 2011년 주공과 토공이 이전하기로 예정돼 있는 경남 진주와 전북 전주 혁신도시 주민들의 반발이 심상찮다. 정부는 어느 한 쪽의 저항을 무마시킨다는 방안으로 사업부를 양쪽으로 나눈다는 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이들 자치단체의 주 관심사는 본부가 어디로 오느냐에 쏠려 있다. 두 기관을 통합시킨 뒤 사업부제 형태로 혁신도시로 이전시키는 정부 방안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분위기다.

통합의 또 다른 걸림돌은 바로 ‘거대 부실 공기업’이 탄생될 수 있다는 우려다. 두 기관이 통합하면 통합공사의 총자산 규모는 무려 84조4000억원. 임직원 수는 7200명을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말 현재 주공과 토공의 부채는 각각 39조8736억원과 27조353억원이다. 두 기관이 통합될 경우 통합 비용 등이 합산돼 향후 부채 규모는 103조를 상회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주공과 토공의 사업 영역을 조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다. 결국 구조조정 문제다. 주공은 주택 사업을, 토공은 토지개발 사업을 하고 있지만 사업 영역이 중복된 것이 많아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느 한 쪽의 사업이 통폐합되면서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진다는 얘기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향후 두 기관의 통합 작업은 단계별 절차를 밟아나갈 예정이지만 얽히고설킨 수많은 난제가 어떻게 해결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TIP

통합공사 신임 사장 누가 될까?


주공-토공 통합공사 신임사장이 누가 될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린다. 건교부 차관 출신 최재덕 주공 사장 내정자와 서울시 균형발전본부장을 지낸 이종상 토공 사장 내정자가 그 주인공이다.

두 기관이 통합될 경우 중복되는 업무의 통폐합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주공과 토공 측은 서로 자기네 사장이 통합사장이 되길 바란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입장을 더 많이 대변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주공의 최 내정자와 토공의 이 내정자는 각각 건교부와 서울시에 몸담으면서 부동산 정책을 놓고 이견을 보였던 전력이 있어 향후 통합사장 자리를 놓고서도 치열한 힘겨루기를 벌일 것 같다.  

최 내정자는 참여정부 건교부 차관 출신이었음에도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으로 참여했던 만큼 이 대통령으로부터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았다는 평가다. 건설 정책 능력이 뛰어나 임대주택 건설과 택지개발 등 주공의 핵심 업무에 능통할 것이란 점도 높은 점수를 얻는다. 규모면에서 주공이 토공을 앞서기 때문에 최 내정자가 일단은 통합공사의 사장이 되는 게 순리라는 주장이다.

반면, 토공 쪽에서는 이 내정자가 유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함께 근무하면서 주택·도시 정책을 무리 없이 펴왔기 때문에 이 대통령의 낙점이 이 내정자에게 쏠릴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향후 주공-토공 통합공사가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여러 면에서 곡절이 예상되는 만큼 정권 수뇌부와의 긴밀한 ‘핫라인’ 속에서 자리 잡기 작업이 추진돼야 한다는 논리로 ‘MB 코드’를 갖춘 이 내정자가 적격이라고 주장한다.



  부메랑 된 청와대 내부자료   

‘이명박 정부와 참여정부의 공공기관장 이력 분석’

‘보은·낙하산 인사’ 비난 해명하려다

공공기관장 인선이 ‘낙하산’, ‘보은’ 논란에 휩싸이자 청와대는 지난 7월 말 ‘이명박 정부와 참여정부의 공공기관장 이력 분석’이란 제목의 이례적인 내부문건을 만들었다. 이 문건은 현재 진행 중인 청와대의 공기업 개혁에 대한 방향과 의지를 가늠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공기업 개혁에 대한 청와대의 위기감과 다급한 심정도 엿보인다. 청와대는 이 문건을 토대로 재정부를 통해 공기업 개혁과 관련한 비판적인 언론 보도에 총괄 대응하도록 했고, 개별 사안에 대해서는 주무 부처별로 대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 문건을 ‘당·정 공기업 TF’ 등에 전달해 향후 공기업 대책 특위 시 활용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 문건은 오히려 ‘MB 실세’에 대한 보은 인사와 관료 출신의 약진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현 정부가 내세웠던 ‘진정한 공모’가 호언장담에 그칠 것이란 비난도 있다.  

청와대는 공기업 개혁을 서두르고 있지만 ‘낙하산 인사, 보은 인사’ 비난 여론에 발목이 잡혔다.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권 출범의 일등공신이자 특수관계인 격인 영남·고려대·서울시 출신 인사들이 공기업 기관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자 청와대는 여론 악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에 청와대는 부랴부랴 공공기관장 이력 분석이란 문건을 만들었다.

여권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청와대의 ‘이명박 정부와 참여정부의 공공기관장 이력 분석’이란 제목의 문건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임기응변식 대응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내부의 비판을 받았다. 대통령실 인사비서관실에서 작성했지만, 기획하고 이를 밀어붙인 주체는 여권 내부에서 실세로 통하는 타 수석실 A비서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권 사정에 밝은 한나라당 관계자는 “A비서관이 이 기획을 밀어붙였는데, 결국 여론이 더 안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이런 표면적인 데이터가 MB 실세들의 낙하산식 인사를 덮어줄 것이라고 생각한 발상이 참으로 유치하다”고 했다.

문건은 시종일관 청와대의 공공기관장 선임이 참여정부 당시의 코드 인사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선임 완료된 새 기관장들을 직업, 출신 대학 및 지역별로 분석해 역대 정권, 특히 직전의 참여정부보다 ‘코드 인사 병폐’가 덜 하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눈 가리고 아웅식’이란 비난이 쏟아졌다. 출신 분포라는 평면적인 차원이 아닌, 관계 분석을 따져볼 때 ‘편중 인사’, ‘낙하산 인사’라는 점이 두드러진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제기된 것이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문건 공개 이후 공기업 특위에서 “최근 새로 임명된 8명의 공기업 사장 가운데 6명이 ‘고소영 S라인’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 측근”이라고 비난했다. 문건은 이명박 정부의 신임 기관장들이 ‘고소영 S라인’이 아니라고 그토록 강조했지만 허점이 여기저기서 드러난 것이다. 

조급한 속내 드러낸 문건

A4 용지 24매 분량의 이 문건은 ‘선임 완료 공공기관장 이력 분석’, ‘참여정부 공공기관장 이력 분석’, ‘사직서 미제출 임원 이력 분석’ 등 총 3개 단락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선임 완료한 공공기관장들에 대해 경력 사항을 비롯, 출신 지역·출신 대학·서울시 근무 경력·소망교회 관련 등 세부 사항별로 분석하고 있다. 또 자료 두 번째 부분인 ‘참여정부 공공기관장 이력 분석’과의 비교를 통해 전 정권보다 ‘코드 인사’ 사례가 현저히 줄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세 번째 부문은 정치 공방을 야기하며 사표를 내지 않은 기관장·감사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문건의 여러 지적 가운데 금융 공기업 최고경영자 9명 중 7명이 영남 출신이라는 ‘편중 인사’가 먼저 도마 위에 올랐다. 이에 대해 청와대 인사비서실은 “공공기관장을 임명할 때 전문성과 역량을 주요 판단 기준으로 삼은 결과 공무원, 정치인은 퇴조하고 기업인, 금융인 등 전문직군이 약진했다”며 “일부 사례를 근거로 영남, 고려대 출신의 독식 운운하는 것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해명에도 편중 인사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임주재 주택금융공사 사장, 진영욱 한국투자공사 사장, 이수화 증권예탁결제원 사장 내정자 등 영남권 출신 인사들이 알짜 공기업인 금융사 CEO로 대거 발탁됐기 때문이다. 어떤 각도로 보더라도 ‘특정 지역 편중’ 논란을 피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청와대는 ‘공공기관장 이력 분석’ 자료를 통해 정치인들의 공공기관장 진출이 과거 정권보다 줄었다고 밝혔지만, 이른바 ‘MB 실세’의 득세 현상은 뚜렷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명박 대통령의 현대건설 대표 재직 시절 비서로 근무했던 노치용 현대증권 부사장이 산업은행의 자회사인 산은캐피탈 사장으로 내정되자 최측근 기용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18대 총선 낙선자인 안택수 전 의원이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에 오른 것을 두고 보은 인사 논란이 일었고, 정권 실세와 가까운 대구 출신 이수화 전 한국씨티은행 부행장이 증권예탁결제원 사장으로 의결된 것을 두고도 말이 많았다.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신임 회장 역시 이 대통령의 고려대 후배로 측근으로 통하고, 이종상 한국한국토지공사 사장도 현대건설 출신에다 서울시 요직을 두루 거친 측근이다. 류철호 한국도로공사 사장도 대선 캠프에서 함께 일한 정치적 동지다.

전직 관료들의 기용도 구설수에 올랐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 관료 배제 원칙을 내걸었다. 하지만 관료들이 정부산하기관에 속속 배치되는 과거 관행이 재현될 우려가 제기된다. 당초 기대를 모았던 교수·기업인 출신들이 정부 조직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면서 관료들의 재기용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진동수 수출입은행 은행장과 진영욱 한국투자공사 사장은 예전 재무부 출신이다. 흔히 ‘모피아’로 불리는 이들이다. 현재 ‘모피아’의 리더 격인 강만수 재정부 장관의 자질 논란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여서 관료 출신들이 공공기관장에 배치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하지만 인재 부족 현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직 관료들을 쓸 수밖에 없다는 해석도 있다. 

산자부 출신들도 공공기관장에 대거 발탁됐다. 산자부 국장과 특허청 차장을 지낸 이태용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 산자부 본부장을 지낸 정준석 부품소재산업진흥원장, 산자부 무역위 상임위원 출신인 김신종 광업진흥공사 사장, 산자부 산업정책 본부장 출신인 김용근 산업기술재단 이사장 등은 지식경제부 산하 기관에 속속 포진했다.

이 외에도 각 기관장에 선임 완료된 인사들 중 상당수는 이 대통령과 인연을 맺고 있다. ‘이력 출신’만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연’이 다들 끈끈하다는 이야기다. 주요직에 어떤 인물이 포진하고 있는지도 ‘코드 인사’를 가늠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문건에는 이런 분석이 포함돼 있지 않다. 따라서 청와대가 만든 이력 분석은 표면적인 분류에만 그치고 있기 때문에 ‘코드 인사’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로 쓰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문건은 이명박 정부가 역대 어느 정권보다 ‘코드 인사와 거리가 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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