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버 카스텔은 257년간 지속돼온 세계 최장수 연필 생산 업체이다.
파버 카스텔은 257년간 지속돼온 세계 최장수 연필 생산 업체이다.

“이 연필은 딱 알맞은 굵기에, 목공용 연필보다 부드럽고 질이 좋아. 검은색이 아름답고 특히 큰 그림을 그릴 때 좋더군. 이 연필은 부드러운 삼나무로 만들었고 겉은 짙은 녹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하나에 20센트야.”

1883년 빈센트 반 고흐가 친구이자 스승인 네덜란드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편지에 묘사된 20센트짜리 녹색 연필은 바로 ‘파버 카스텔(Faber Castell)’ 제품이다. 고흐뿐 아니다. 세계적 아티스트들은 파버 카스텔 연필을 사랑했고, 사랑한다. ‘도널드 덕’으로 유명한 미국 만화가 칼 바크스, 현대 추상화의 시조인 독일 화가 파울 클레, 샤넬의 부흥을 이끈 현 시대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 노벨상 수상 작가인 귄터 그라스까지 모두 파버 카스텔 연필 애호가로 유명하다.

1761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시작한 이 기업은 9대에 걸친 가족경영을 통해 257년간 지속돼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필 생산 업체다. 캐비닛 제조 업자였던 카스파르 파버가 넓적하고 얇은 나무막대기 두 개 사이에 흑연심을 끼워넣은 최초의 연필을 선보였고, 2세대(안톤 빌헬름 파버), 3세대(조지 레오나르도 파버)를 거쳐 4세대인 로타르 폰 파버로 이어졌다. 특히 로타르 폰 파버는 뉴욕과 파리를 중심으로 판매처를 전 세계로 확대하고, 연필에 브랜드 네임을 부여해 세계 최초로 연필을 상품화한 주인공이다. 이후 파버 가문의 손녀와 결혼한 알렉산더 카스텔 루덴한센 백작이 이어받으면서 6세대부터는 가문의 성과 회사의 명칭이 ‘파버 카스텔’로 바뀌었다.

이메일과 소셜미디어로 대표되는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이전만큼 연필을 찾지 않게 됐다. 이 같은 사회적 변화는 파버 카스텔과 같은 문구류 회사의 위기로 이어질 법도 하지만, 파버 카스텔은 여전히 성장 중이다. 2013년 회계연도 당시 5억9000만유로(약 7547억원)였던 매출액은 지난해 6억6700만유로(약 8532억원)로 4년간 약 13% 증가했다. 매년 전 세계 9개 공장에서 23억 개 이상의 연필을 생산하며 ‘연필의 제국’을 건설한 파버 카스텔의 비결을 ‘평범한 일을 비범하게’ 하려는 혁신 정신 그리고 자사 직원과 환경에 대한 사회적 책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파버 카스텔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연필의 형태를 완성한 기업이다. 단순한 나무 연필처럼 보이지만 뜯어보면 곳곳에 이 기업의 혁신적인 시도가 녹아 있다. 파버 카스텔이 선보인 가장 혁신적인 사례로는 연필 ‘모양’이다. 현재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연필은 육각형인데, 이 육각형 연필을 고안해 낸 기업이 바로 파버 카스텔이다. ‘연필(The Pencil)’의 저자 헨리 페트로스키에 따르면, 연필의 가장 효율적 모양은 육각형이다. 원형, 팔각형 연필과 비교하면 육각형 연필은 경사면에서 굴러떨어질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삼각형 연필은 육각형 연필보다 굴러떨어질 확률이 훨씬 더 낮긴 하지만, 생산비가 더 많이 든다. 손으로 잡는 ‘그립감’ 측면에서도 다른 모양은 육각형을 따라올 수 없다.

연필의 경도(굳기)와 농도(진하기)의 구분 역시 파버 카스텔이 고안한 것이다. 현재 우리는 미술시간엔 4B 연필을, 수업시간 필기를 위해선 HB 연필을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전까진 이 같은 기준이 없었다. 연필심의 굳기와 진하기가 모두 제각각이어서 소비자는 기호에 맞게 골라 구매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파버 카스텔은 이 같은 소비자 불편에 착안해 단단함(Hard)을 나타내는 H, 짙음(Black)을 나타내는 B를 조합해 총 18가지 단계로 연필심을 나눠 상황에 맞춰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높은 숫자의 H심일수록 딱딱하고 흐리게 쓰이며, 높은 숫자의 B심일수록 부드럽고 진하게 쓰인다.

이외에도 파버 카스텔만의 특수 공법으로 제작해 연필을 뾰족하게 깎은 뒤 바닥에 던져도 심이 부러지거나 빠지지 않는 점, 어린이가 입에 넣어도 해롭지 않도록 친환경 수성 페인트를 사용하는 점,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연필 앞쪽에 오돌토돌한 돌기를 넣은 점 등도 파버 카스텔 제품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혁신의 사례다.


지속 가능 경영 중시

파버 카스텔의 대표작, ‘카스텔 9000’. 사진 파버 카스텔
파버 카스텔의 대표작, ‘카스텔 9000’. 사진 파버 카스텔

파버 카스텔 경영자들은 자신을 회사의 ‘연결 고리’라 여기며 가업을 이어 가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꼽는다. 지난해 작고한 8대 회장 안톤 볼프강 폰 파버 카스텔 백작은 2011년 창업 250주년사에서 “전통이란 재가 아닌 빛을 살리고 지켜나가는 일”이라며 “중요한 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 내려오는 태도다. 성장을 생각하기 이전에 회사가 장기간 존속하는 방법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파버 카스텔 가문의 정신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지속 가능 경영으로 이어진다. 먼저 직원에 대한 책임이다. 파버 카스텔은 1800년대부터 직원을 위한 사내 복지 체계를 도입했다. 1844년 사내 건강보험 제도를 시작으로, 1849년 직원을 위한 저축은행과 연금제도까지 도입했다. 직원 사택은 물론 직원 자녀를 위한 보육·교육 재정 지원 제도 역시 마련했다. 1884년 직원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유치원을 만들었는데, 이는 독일 최초의 기업 부설 유치원으로 기록돼 있다.

파버 카스텔은 환경 역시 책임을 다해야 할 분야 중 하나로 꼽는다. 파버 카스텔은 매년 23억 개 이상의 나무 연필을 생산하기 위해 15만t의 목재를 사용하고 있다. 이 목재는 모두 파버 카스텔이 직접 관리하는 숲에서 조달하는데, 파버 카스텔은 재료 수급의 안정성과 환경 보호를 위해 약 30년 전부터 직접 숲을 조성해 왔다. 브라질 남동부의 한 황무지에 조성한 100㎢(1만ha) 규모의 소나무 숲이 대표적이다. 이 숲은 UN의 ‘청정 개발 체제(CDM)’ 프로젝트에 등록됐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축시킨다는 의미로 UNFCC(유엔기후변화협약) 인증서를 받기도 했다. 이곳의 3분의 1은 멸종위기 동식물을 위한 보금자리로, 조류 200여 종, 포유류 50여 종 이상이 서식하고 있다.

파버 카스텔의 산림 프로젝트는 콜롬비아에서도 진행 중이다. 안톤 볼프강 폰 파버 카스텔 백작은 “사업가로서 절대로 미래 세대의 비용을 사용해 이익을 창출하지 않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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