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캐주얼 의류 브랜드 ‘갭’ 매장. 사진 블룸버그
미국 캐주얼 의류 브랜드 ‘갭’ 매장. 사진 블룸버그

“‘갭(GAP)’ 이사회에 간청합니다. 회사 이름을 ‘올드 네이비’로 바꿔주십시오.”

미국 투자은행 ‘제프리스’의 애널리스트 랜달 코닉은 8월 24일 미국 의류 업체 갭에 대한 분석이 담긴 투자자 레터를 이 같은 제목으로 보냈다.

회사명과 이름이 동일한 대표 브랜드 ‘갭’의 부진이 이어지는 동안 이 회사의 저가 의류 브랜드 ‘올드 네이비’는 약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50년 가까이 미국의 대표 의류 브랜드로 이름을 날렸던 갭의 수모라 할 수 있는 순간이다.

올해 2분기 갭은 계열 브랜드 올드 네이비의 선전 덕에 시장 예상치를 상회하는 양호한 실적을 냈다. 갭이 8월 23일 발표한 올해 2분기(4~6월) 실적을 보면 이 기간 순이익은 2억9700만달러(약 3300억원)로 전년 동기(2억7100만달러) 대비 10% 가까이 증가했다. 1주당 순이익은 76센트로, 미국 증권가의 예상치였던 1주당 72센트를 웃돌았다.

하지만 시장 전망치 이상의 성과를 냈음에도 실적 발표 당일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갭의 주가는 발표 직후 10% 가까이 하락했다. 회사를 대표하는 브랜드 갭의 동일 점포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는 월스트리트 애널리스트들이 예상했던 매출 감소율인 2.55%보다 두 배 가까이 큰 하락폭이었다.

반면 올드 네이비의 동일 점포 매출은 5% 가까이 늘었다. 전문가들의 예상치였던 4.5%를 가뿐히 넘었다. 이 회사의 다른 브랜드 ‘바나나 리퍼블릭’의 동일 점포 매출도 2% 증가했다. 회사를 대표하는 브랜드 갭의 부진으로 인한 손실분을 자매 브랜드들이 간신히 상쇄한 셈이다.

합리적인 가격에 비교적 좋은 품질의 의류를 판매하는 브랜드로서 소비자들로부터 사랑받던 갭. 1969년부터 쌓아 올린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실패요인 1│
트렌드 고려하지 않고 청바지 고수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갭의 2분기 실적 발표 다음 날, 어린 시절부터 갭 브랜드에서 만든 의류를 입고 자랐다는 서른세살의 뉴욕 시민을 인터뷰했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는 갭 브랜드에 대해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고, 매번 똑같은 옷을 판매한다”면서 “옷뿐 아니라 심지어 마네킹까지 똑같은 것 같다. 지난 5~6년간 단 한 번도 갭에서 옷을 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갭을 지루한 브랜드라고 평가하면서 “광고조차 지루하다”고 말했다.

패션 업계처럼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산업군에서 이 같은 지적은 치명적인 비판이다. 외신들과 전문가들은 다양한 상품을 구매하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의 수요를 고려하지 않고 갭 브랜드가 예전부터 판매해왔던 청바지 등 데님 소재의 의류만을 고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의 경제 매체 파이낸셜타임스(FT)는 갭 브랜드의 부진에 대해 “티셔츠나 데님과 같은 기본적인 의류를 파는 회사는 스포츠 의류 회사와의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면서 “소비자들은 ‘애슬레저(운동과 여가의 합성어로, 일상에서도 입을 수 있는 스포츠웨어)’ 트렌드에 따라 데님을 요가 바지나 타이즈로 대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통업 연구·컨설팅회사인 ‘글로벌데이터 리테일’의 닐 샌더스 매니징 디렉터는 “시장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갭 브랜드는 멈춰 서있다”고 지적했다. 포브스는 “고객들에게 이미 옷장에 있는 옷이 아닌 다른 것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실패요인 2│
SPA 브랜드가 대체 가능한 제품

갭 브랜드는 ‘H&M’ ‘자라’ ‘유니클로’ 등 의류의 기획부터 생산·유통·판매까지 직접 관리하는 스파(SPA) 브랜드의 무서운 성장세에 대응하지 못했다. 스페인 SPA 브랜드 자라의 경우 일주일에 두 번씩 신상품을 입고한다. 이처럼 저렴한 가격으로, 다양한 디자인의 상품을, 빠른 주기로 찍어내는 SPA브랜드에 대항할 만한 매력을 갭 브랜드가 갖추지 못 했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정보기술(IT) 전문 매체인 ‘쿼츠’는 “갭은 제품 가격을 내리고, 더 스타일리시한 옷을 생산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갭에서 파는 옷들은 이미 다른 SPA 브랜드들에서 파는 저렴한 상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 소비자들은 가성비 좋은 캐시미어 점퍼나 운동용 셔츠, 패딩 재킷을 사러 일본 SPA 브랜드 유니클로를 찾지, 갭을 찾지 않는다는 의미다.

갭은 갭 브랜드와 바나나리퍼블릭 브랜드 매장을 향후 3년간 200개 축소하고, 올드 네이비와 ‘애슬레타’ 매장 270곳을 새로 열 것이라고 올해 초 밝혔다. 갭 브랜드로 SPA 브랜드와 맞서기보다는 자사의 저가형 브랜드 올드 네이비로 승부수를 띄운다는 전략이다. 이는 지난 2000년 미국 내 매장이 10개도 안 됐던 H&M이 지난해 매장을 500개까지 늘릴 만큼 급격히 사세를 확장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실패요인 3│
오프라인 주력하다 역풍

온라인 전자상거래 공룡 ‘아마존’의 급부상은 갭 브랜드를 비롯한 기존 패션 브랜드들이 피할 수 없는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7월 미국의 경제전문 방송 채널 CNBC는 “아마존이 의류 소매 판매 분야의 성장세를 더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이는 아마존이 홈페이지에서 자사 의류 브랜드인 ‘라크앤드로’ ‘코어10’ 등의 제품들을 고객들 눈에 띄는 곳에 배치하는 경향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마존 유료 회원 대상의 세일 행사인 ‘프라임데이(Prime Day)’ 때도 의류 상품에 파격적인 할인율을 적용한다. 또한 아마존은 유료 회원들에게는 ‘프라임 워드로브’ 서비스를 제공해 온라인에서 선택한 의류와 신발, 액세서리 등을 집에서 사용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료로 반품할 수 있는 혜택을 준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이마케터는 아마존의 의류·액세서리 매출이 올해 말까지 400억달러(약 44조9200억원) 규모로 지난해 말보다 38%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미국의 전체 온라인 의류 매출의 38.5% 수준에 달하는 규모다. 전문가들은 아마존이 올해 안으로 다른 패션 회사들의 고객군을 빼앗아 미국 내 1위 의류 소매 업체로 거듭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갭은 이 같은 온라인 공룡의 기지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프라인 매장 판매에 심혈을 기울이겠다고 공언한 상황이다. 아트 펙 갭 최고경영자(CEO)는 “옷은 대부분 매장에서 팔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서 “매장은 가장 깊은 형태의 사용자 참여”라는 입장을 밝혔다. 갭 브랜드처럼 중저가에 질 좋은 의류를 팔아 인기를 끌다가 최근 침체의 늪에 빠진 미국 의류 소매 업체 ‘제이크루’가 9월 5일부터 아마존을 통해 일부 상품을 판매하기로 한 것과 사뭇 다른 행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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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 점포 매출 1년 이상 운영된 점포의 일정 기간 동안의 매출을 1년 전 같은 기간의 매출과 비교할 수 있는 지표다. 주로 미국에서 증시에 상장된 백화점이나 할인마트, 의류 판매회사들이 발표한다. 문을 연 지 1년이 채 안 돼 실적을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는 신규 점포의 매출을 전체 매출에서 제외하고 계산해서 나오는 지표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지출 트렌드 변화를 더 정확히 알려주는 수치다.

 

이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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