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 대선 당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 캠프는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 가상 유세를 펼쳤다(왼쪽).‘모여봐요 동물의 숲’ 캐릭터들이 발렌티노 제품을 입고 있다. 사진 바이든 캠프 공식 사이트·발렌티노
지난해 미국 대선 당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 캠프는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 가상 유세를 펼쳤다(왼쪽).‘모여봐요 동물의 숲’ 캐릭터들이 발렌티노 제품을 입고 있다. 사진 바이든 캠프 공식 사이트·발렌티노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던 지난해 5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발렌티노는 닌텐도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 안에서 가상 패션쇼를 열었다. 발렌티노는 플레이어가 캐릭터에게 원하는 의상을 만들어 입힐 수 있는 이 게임의 특징을 살려 자사 신상품을 소개했다. 마크제이콥스·안나수이·GCDS 등도 같은 전략을 펼쳤다. 구찌는 온라인 스포츠 게임 ‘테니스 클래시’ 속 캐릭터를 위한 옷을 선보였다.

이런 현상은 패션과 무관한 정치권에서도 벌어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 대선 후보 시절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 가상 유세 활동을 펼쳤다. 바이든 캠프는 게임 캐릭터에 적용할 수 있는 스킨을 무료로 배포했다. 유저들은 자신의 섬에 바이든 깃발을 세우거나 캐릭터에 바이든 의상을 입히는 식으로 바이든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 비대면 사회를 앞당긴 뒤 오프라인 접점을 잃은 기업과 정치인이 목표 달성을 위해 디지털 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은 익숙하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든다. 왜 굳이 게임일까. 인간 모델에게 옷을 입혀 온라인 패션쇼를 개최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말이다.

이 지점에서 게임 전문가들은 ‘흥미를 유발하고, 경쟁 관계를 만들고, 성취에 보상하는’ 게임 특유의 메커니즘을 떠올린다. 게임 유저가 자신의 캐릭터에 명품 브랜드와 대통령 후보의 의상을 입히면서 재미와 경쟁심을 느끼는 동안 기업과 정치인은 원하던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린다. 게임이 아닌 분야에 게임 작동 원리와 구조 등을 적용해 상대방의 행동을 의도한 방향대로 이끄는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게임화)’의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게이미피케이션은 새로운 게 아니다. 기원전 고대 그리스 리디아왕국 시절 혹독한 기근이 18년간 이어지자 새로운 국가 정책이 공개됐다. 바로 ‘하루는 모두가 음식을 먹고, 그다음 날은 모두가 게임을 해야 한다’는 것. 이때 양의 관절 뼈로 만든 주사위 게임이 발명됐다. 게이미피케이션의 가장 오래된 사례다. 1938년 네덜란드 철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유희(遊戱)하는 존재 ‘호모 루덴스’라 불렀다.

자장면 10그릇을 사 먹으면 1그릇을 공짜로 제공하는 식당 이벤트도, 경쟁하듯 지코의 ‘아무노래’에 맞춰 춤춘 뒤 이를 소셜미디어(SNS)에 올리는 행위도, 모두 게이미피케이션 원리가 적용된 경우다. 게임이 아닌 분야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임무를 부여해 ‘도전’하게 하고, ‘경쟁’ 관계를 만들어 승부욕을 자극하며, 임무 달성 시 ‘성취’에 대한 ‘보상’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친구를 초청하고 이를 자신의 SNS에 공유하는 등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 몰입감을 느끼게 하는 원리다. 여기서 행동의 변화를 유발하는 동기 부여가 핵심인데, 이는 매슬로의 5단계 욕구 중 상위 단계인 사회적·존경·자아실현 욕구와도 관련 있다.

명시적으로 게이미피케이션이 사용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을 중심으로 마케팅 학문이 탄생했을 때다. 이때 동기 부여와 충성도 등 게이미피케이션의 기본원리에 입각한 마케팅 활동이 시작됐다. 도장을 찍어주고, 도장을 다 모으면 물건으로 교환해줬던 1896년 S&H의 그린스탬프 제도가 최초의 게이미피케이션 마케팅 사례로 전해진다.

게이미피케이션이라는 용어는 2002년 영국의 게임 개발자 닉 펠링이 처음 사용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네트워크 발전, 인터넷 발전에 발맞춰온 게이미피케이션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2007년 애플 아이폰을 필두로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을 통해 게이미피케이션을 구현하기가 쉬워졌기 때문이다. 이후 2011년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게이미피케이션 서밋’을 통해 이 용어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2013년 시장 조사 업체 가트너는 ‘최고로 떠오르는 신기술’로 게이미피케이션을 꼽았다. 가트너는 2014년까지 글로벌 기업 2000곳 가운데 70% 이상이 게이미피케이션이 적용된 서비스를 할 것이며, 2015년까지 혁신 프로세스를 관리하는 기업의 50% 이상이 게이미피케이션 개념을 활용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상당 부분 맞아떨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정보기술(IT) 기기와 함께 큰 ‘디지털네이티브(디지털 원주민)’, 개성 강한 MZ 세대(밀레니얼+Z세대·1981~2004년생)가 소비 주도층으로 부상한 점도 게이미피케이션의 발전을 촉발했다. 이들은 지갑을 열 때, 기능보다 감성과 체험을 중시한다. 여기에 스마트폰 활용 빈도 증가, 사용자 간 교류가 가능한 SNS 플랫폼 성장, 신기술이 융합되면서 게이미피케이션이 급성장하고 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와 시장 조사 업체 모도 인텔리전스는 게이미피케이션 시장이 2019년 70억달러(약 7조9100억원) 수준에서 2025년 350억달러(약 39조5500억원)로 연평균 30%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해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는 게이미피케이션을 각 분야의 해법으로 부상하게 했다. 기업은 소비자를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게이미피케이션 전략을 통해 이들의 반응을 끌어내고, 교사는 온라인 수업으로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의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게임적 요소를 더하고 있다.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게임 중독을 질병코드로 등록하며 게이미피케이션에 관한 편견을 만든 바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격리가 일상화되자 WHO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해 게임을 권장한다며 태세를 전환했다. 의사가 먹는 약 대신 ‘게임 약(디지털 치료제)’을 처방하는 시대도 서서히 열리고 있다.


모든 곳에서의 게임 원리

일련의 크고 작은 이슈를 거치며 게이미피케이션은 각 산업 분야 기업 마케팅뿐 아니라 인사 등 조직 관리, 사회 문제 해결 등 우리의 일상 곳곳으로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이코노미조선’이 이 시점에 ‘게임, 세상을 바꾸다’란 제목의 커버 스토리를 기획한 이유다.

2011년 게이미피케이션 서밋 당시 의장을 맡은 게이브 지커만 게이미피케이션닷코(Gamification.co) 최고경영자(CEO)는 ‘이코노미조선’에 “비대면 사회를 촉발한 코로나19는 개인뿐 아니라 기업에도 게이미피케이션의 긍정적 효과를 느낄 계기를 마련해줬다”고 했다. 위카이 초우 옥탈리시스 창립자는 “코로나19 이후 게이미피케이션 컨설팅 고객이 4~5배 늘었다”며 “이제는 기업 전략에 필수 요소”라고 했다.

국내 전문가들도 게이미피케이션 시장 성장에 주목하며 당부의 말을 남겼다. 김상균 강원대 산업공학전공 교수는 “인류는 태동 직후부터 놀이와 게임을 해왔다”며 “게임을 통해 경험을 만들어 주는 게 앞으로 모든 산업군의 핵심 과제”라고 했다.

김정태 동양대 게임학부 교수는 “메타버스(현실과 가상이 공존하는 3차원 세계)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로블록스도 사실은 게이미피케이션 원리”라며 “게임에 대한 불편한 인식으로 게이미피케이션을 메타버스나 디지털 트윈 등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이제는 한국이 이 산업을 이끌어가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했다.

안상희·전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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