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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이하 현지시각) ‘동남아판 우버’로 불리는 승차공유 앱(app) 운영사인 그랩이 기술인수목적회사(SPAC·스팩)를 통해 미국 뉴욕 증시 상장을 추진 중이라는 얘기가 국제 금융가에서 흘러나왔다.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차량 호출 서비스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그랩의 기업 가치는 160억달러(약 18조원)로 추정되지만 스팩과 합병이 성사될 경우 합병 회사 가치는 400억달러(약 45조2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이 관측했다. 높은 가치가 2018년 우버의 동남아 사업을 인수하며 이 지역 1위 업체로 등극한 성장세 덕분만은 아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교통 혁명이 가속화하면서 그랩 같은 모빌리티 혁신 업체들이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인식 덕이 컸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 교통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마차에서 기차로, 자동차로, 항공기로, 교통의 발달은 늘 효율성을 높이는 과정이었다. 최대한 많은 여객과 물류를 최단거리로 실어나르는 것이 교통의 진화였고, 이를 통해 상품 교역과 문화 교류가 이뤄지며 인류의 삶도 발전했다. 19세기 국토 전역에 깔린 철도를 통해 물자와 여객을 대량으로 실어나르며 서부 개척 시대를 연 미국과 1869년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 개통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 해상로가 연결되며 대륙 간 교역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게 대표적이다.

코로나19 확산은 이런 교통의 본질에 혼란을 가져왔다. 출퇴근 시간대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중교통은 코로나19에 노출될 수 있는 최악의 장소다. 교통의 효율성만 추구했다가 자칫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효율성에만 매달린 그동안의 교통과는 다른 개념이 필요하다. 기존 교통에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로봇 등의 기술이 더해져 방역 차원에서의 개인화와 안전, 비대면, 교통량 분산 등에 초점이 맞춰진 ‘모빌리티 혁명’이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가장 덜 북적이는 시간대에 상대적으로 원활한 경로를 찾는 이동 시스템 개발이 가속화했고, 대중교통 대신 공유 킥보드 같은 개인 이동수단 서비스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인간이 운전하는 것보다 더 안전한 주행 서비스 출시도 잇따라 예고됐다. 심지어 구글의 자율주행 서비스 웨이모는 ‘세계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운전자를 만들고 있다’는 구호를 내걸며 무사고를 내건 자율주행차 상용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루카스 넥커만 넥커만 전략자문 대표는 2015년 출간된 ‘모빌리티 혁명’이라는 저서를 통해 “미래 자동차 산업을 정의하는 3개의 ‘제로(0)’는 제로 사고와 제로 배출, 제로 오너십”이라고 말했다.

모빌리티 혁명의 주역은 플랫폼이나 IT 업체만이 아니다. 우버, 디디추싱, 그랩, 카카오모빌리티의 플랫폼 서비스에 대항해 폴크스바겐, 도요타, 현대차 등 제조 업체는 서비스 영역까지 넘본다. 모빌리티 개념 자체가 구글 웨이모, 엔비디아, 중국 바이두, 포니닷AI의 자율주행 서비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 알리바바 등이 선보이는 커넥티드카, 이들이 통합된 테슬라, 중국 니오(NIO)의 전동화 차량을 모두 뜻하는 의미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모빌리티 생태계는 합종연횡이 일상인 춘추 전국 시대를 방불케 한다. 이 생태계에선 전통적인 제조 업체가 플랫폼 업체가 되기도 하고, 테크놀로지(기술) 기업이 제조 업체가 되기도 한다. 특정 업종에 갇히지 않고, 필요하면 언제든 경쟁과 협력을 하며 사업을 확장하는 식이다.


업역 경계 무너진 모빌리티 생태계

인도네시아 차량 호출, 승차공유 업체 고젝이 3월 11일 핀테크 업체 토코피디아와 합병을 예고한 것은 확장하는 모빌리티 생태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고젝과 토코피디아는 택시 호출부터 음식 주문, 전자상거래 등을 모두 포괄하는 ‘슈퍼 앱’을 만들 계획이다. 현재 고젝의 기업 가치는 105억달러(약 11조8800억원), 토코피디아는 75억달러(약 8조4800억원)지만, 합병 회사의 가치는 4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차량 호출로 사업을 시작한 고젝이 음식 배달, 전자화폐로 사업을 확장한 데 이어 전자상거래와 결제까지 하는 멀티플레이어로 거듭나는 셈이다. 그랩의 성장사를 그대로 닮았다.

애초 인터넷 검색 기업이었던 구글은 웨이모를 통해 자율주행 서비스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웨이모는 지난해 10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자율주행 택시 서비스를 확대했고, 무인트럭으로 배송 서비스를 하는 ‘웨이모 비아(Waymo Via)’도 선보이고 있다. 애플의 아이폰을 수탁 생산해온 폭스콘은 미국이나 멕시코에서 전기차를 생산할 계획이며, 중국 알리바바와 바이두도 전기차와 자율주행 등의 모빌리티 사업에 적극적이다. 모빌리티가 테크 기업의 핫 테마가 된 것이다.

자동차 업체 입장에선 자칫 손놓고 있다간 음식점이나 숙박 업체처럼 플랫폼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소프트웨어와 플랫폼까지 아우르는 기업이 되기 위해 이들이 변신 중인 이유다. MS와 손을 잡은 폴크스바겐은 미국 시애틀에서 통신 솔루션과 개인화에 초점을 맞춘 커넥티드카를 연구하고 있다. 커넥티드카는 주행하는 동안 발생한 차량 정보와 외부 환경을 분석해 운전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차를 말한다. 지난해 11월에는 향후 5년간 디지털 개발에 기존보다 두 배 늘어난 280억달러(약 31조68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미국 엔비디아와 차량 정보 시스템을 스마트폰 운영체제(OS)처럼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도요타는 아마존웹서비스(AWS)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를 커넥티드카에 활용할 계획이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3월 16일 열린 온라인 타운홀 미팅에서 “현대차는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이 돼야 한다”고 말하는 등 연일 모빌리티 기업으로의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변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경영계 격언을 절실히 느끼는 곳이 자동차 업계다.

전기와 수소 등 친환경 에너지를 이용한 차량 전동화에도 집중하고 있다. IT·플랫폼 기업이 진출하기 어려운 산업이며, 차량 제조 업체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분야이어서다. 글로벌 1위 자동차 업체인 폴크스바겐은 이달 2030년까지 유럽에서 판매되는 차의 70%를 전기차로 채우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도요타는 2025년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탑재 차량을 선보일 계획이다. IHS마킷과 딜로이트에 따르면 2020년 250만 대에 이른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2025년 1120만 대, 2030년 3110만 대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메가 트렌드가 되고 있는 차량 전동화는 친환경차 시장 성장뿐 아니라 자동차가 스마트폰을 대체하는 정보 혁명을 이끌 것으로 전망된다. 임두빈 삼정KPMG경제원구원 수석연구원은 “친환경차로 차의 심장이 변하고 자율주행으로 차의 두뇌가 바뀌며 모빌리티로 차의 활용과 거래 방식이 변하며, 기존 밸류체인이 붕괴하고 새로운 모빌리티 생태계가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plus point

해외선 되는데, 한국선 안 되는 모빌리티 서비스

타다는 지난해 3월 정부 규제 탓에 핵심 서비스를 접어야 했다. 사진 타다
타다는 지난해 3월 정부 규제 탓에 핵심 서비스를 접어야 했다. 사진 타다

2020년 3월 6일은 고속 성장하던 한 스타트업이 핵심 서비스를 접은 날이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 개정안’ 이른바 ‘타다금지법’이 국회에서 의결됐기 때문이다. 운송 업체가 11~15인승 승합차를 빌릴 때 관광 목적으로 6시간 이상 사용하거나 대여·반납 장소가 공항 또는 항만일 경우에만 사업자의 운전자 알선을 허용하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결국 타다는 핵심 사업을 접어야 했다. 한국의 경우 개인과 개인 간(P2P) 차량 공유와 출퇴근 시간을 제외한 카풀도 불법이다. 우버와 그랩, 디디추싱 등 글로벌 기업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진혁·이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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