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철성 서울대 석좌 교수·재료공학부 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전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
황철성
서울대 석좌 교수·재료공학부 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전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

올해 반도체 산업 호황이 기대되면서 ‘산업의 쌀’인 반도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최근 자동차용 반도체가 부족해지면서 자동차 생산이 차질을 빚거나, 미국이 화웨이의 반도체 공급을 끊자 스마트폰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이던 화웨이가 불과 1년도 안 돼 순위권에서 사라진 것을 보면서 반도체가 산업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한 번 더 실감하는 분위기다.

반도체는 요즈음 산업의 쌀을 넘어 ‘국가 안보의 쌀’로 여겨진다. 인공지능(AI)이 킬러 드론처럼 국방용으로도 활용되면서 첨단기기·무기를 구성하는 반도체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미국과 중국도 반도체의 중요성을 체감하고 산업을 키우고 있다. 중국은 반도체 개발 이유로 “석유 수입 비용보다 큰 반도체 수입 비용을 줄이겠다”는 것을 들고 있지만, 내면에는 국가의 안위를 결정하는 국방 분야의 핵심 부품을 서방에 계속 의존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있다.

미국이 반도체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는 최근 미국 인공지능 국가안보위원회(NSCAI)에서 발간한 756쪽짜리 ‘AI에 관한 NSCAI의 최종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는 2017년 1월 버락 오바마 행정부 마지막 시기에 백악관의 대통령과학기술자문위원회(PCAST)에서 발간한 미국의 반도체 분야 장기 우위 전략 보고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오바마 행정부 시기 PCAST 보고서가 반도체에 집중했다면, 최근 보고서는 AI 전반으로 시야를 넓혔다는 게 특징이다.

두 보고서의 공통적인 특징은 중국 등을 첨단 기술 분야의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하고, 기술 분야 경쟁을 ‘국가의 안위, 번영,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백악관이 주도하고 의회가 법안으로 뒷받침하는 전략으로, 미국의 관련 분야 산업이 가지고 있는 첨단 기술 분야에 대한 위기감이 잘 느껴진다.

예를 들어보면 NSCAI의 AI 관련 보고서가 “반도체 분야에서 대만에 과도한 의존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부분이다. 미국의 잠재적 경쟁자인 중국으로부터 해상 거리 약 177㎞(110마일) 떨어져 있는 곳에 핵심 칩을 생산하는 기지(대만 TSMC)가 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지적이다. 정확한 경제적, 기술적 판단과 국제 정세에 따라 대응해야 국가의 장기적 안위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보고서에서는 미국 국방 분야가 AI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국방부에서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세울 것을 제안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보고서는 미국이 AI 분야에서 중국에 뒤떨어지고 있을 가능성을 심각하게 제시하고, 이와 같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 정부 차원에서 AI 관련 연구에 약 45조원을 투입하고, 첨단 반도체 생산을 미국 내에서 이뤄내기 위해 40조원을 쓰는 것이다. 둘째, AI 분야 우수 인력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국방 분야 사관학교처럼 운영하자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우수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이민 관련법, 제도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도 담겼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약점으로 AI를 다루는 우수 인재 부족을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반도체 정책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일단 중국의 첨단 반도체굴기를 억제하고자 하는 미국 정부의 노력은 당장 우리나라 메모리 반도체 업계가 중국의 추격권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자국의 반도체 제조 역량을 제고하려는 움직임은 우리에게는 큰 위협일 수 있다. 다행히 미국의 중요 반도체 제품은 CPU(중앙처리장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등의 시스템 반도체이고, 이 제조 기지는 대만의 TSMC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미칠 직접 영향은 작은 편이다. 그러나 D램 제조 업체인 미국의 마이크론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비슷한 경쟁력을 가진 상황에서, 미국이 정부 차원에서 제조 경쟁력 강화를 적극 지원할 경우 우리의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은 당연히 크게 위협받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메모리 반도체는 늘 한국이 세계 1등 기술력을 가졌다고 전제하고 정책, 산업 육성 방안을 논의해왔으나, 그 전제가 통하지 않게 됐다.

특히 AI는 메모리 반도체 중요성이 크기 때문에 우리가 경쟁력을 키워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미국이 자국 기업을 밀어준다면 우리 기업들의 잠재 경쟁력 확보에 큰 위협일 수밖에 없다. 사실 지난 30~40년간 반도체 제조 기술 패권·기지가 미국→일본→한국·대만으로 변화해온 추세에는 미국 정부의 상대적인 무관심이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반도체를 국가 안보의 일환으로 보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큰 도전이 될 수 있다.


세계 파운드리 기업 3위인 글로벌파운드리의 유럽 공장. 사진 블룸버그
세계 파운드리 기업 3위인 글로벌파운드리의 유럽 공장. 사진 블룸버그

韓 반도체 인재 부족…학계·국민 인식 바뀌어야

우리나라의 반도체 분야에 대한 국가적 지원은 최근 다시 시작되고 있지만, 경쟁국들에 비해서는 턱도 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는 AI 분야에 10년간 1조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경제 규모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미국(5년간 45조원)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정도 연구비를 받아서 제대로 쓸 수 있는 인력이 학계와 관련 연구계에 턱도 없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온 세상 우수 인재가 다 모여드는 미국이 우수 인재 부족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나라는 어떻겠는가? 우리나라 학계에서 반도체 분야에 공급하는 우수 인력은 필요 인력의 20% 정도 수준에 그친다. 최상위 회사도 이 정도이고, 소재·부품·장비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에서 설계 인력 보강을 하기 시작하니 국내 팹리스 업계가 비명을 지른다. 우수 인력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 기존 인력을 돌려쓰는 데 그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산업계 리더들이 뒤늦게라도 이런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인식하고 국내 대학에 대한 지원이나 인력 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학계의 인식은 여전히 뒤떨어져 있다. 산업계가 2019년 서울대 공과대 내 시스템 반도체 계약학과를 설치하려다 실패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기업이 대학에 장학금과 학과 운영비를 지원해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제도인데, 대학이 기업에 종속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 여론이 불거졌다. 필자는 우리나라에 여전히 ‘사농공상(士農工商)’에 대한 인식이 남았고, 학계 리더들이 세계적 경쟁 체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욱이 대학들은 여전히 QS(영국 대학평가 기관) 랭킹 같은 평가에 목을 매고 있다. 반도체 분야 연구를 하고 인력 양성에 올인했다간 QS 랭킹이 더 떨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 리스크로 작용하는 듯하다. 학제와 평가 방식부터 혁신해야 반도체 산업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수준의 인재를 고루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학계뿐만 아니라 정부와 국민도 기술과 산업의 현실을 정확히 봐야 한다. 정부가 정치적으로 산업을 이용하는 것, 국민이 기업의 세제 혜택이나 인력 양성을 특혜라고 반대하는 것은 대표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기술이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는 시대로 질주하고 있는데, 기술과 과학의 영역조차 정치적 이념이나 구호에 영향을 받고 있음이 실로 안타깝다. 경제적 이익, 국가의 장기적 안위를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미국의 마이크론은 2014~2018년 기준 매출의 3.8%에 해당하는 자금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았지만, 삼성전자는 0.8%, SK하이닉스는 0.5% 지원받는데 그쳤다. 우리가 경쟁해야 하는 기업들은 큰 거인의 어깨에 올라앉아 있는데, 우리는 거인의 발밑에서 허우적대고만 있다. 우리는 어느 길로 나가야 할 것인가.

황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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