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 ‘스탠드 업(2009)’ ‘왜왔니? 복수의 칼을 갈아 왔단다. 왔단다!(2003)’ 감독·각본, ‘빅매치(2014)’ 프로듀서, ‘그때 그사람들(2004)’ ‘사생결단(2006)’ ‘본 레거시(2012)’ 조감독 / 사진 키다리이엔티
박상현
‘스탠드 업(2009)’ ‘왜왔니? 복수의 칼을 갈아 왔단다. 왔단다!(2003)’ 감독·각본, ‘빅매치(2014)’ 프로듀서, ‘그때 그사람들(2004)’ ‘사생결단(2006)’ ‘본 레거시(2012)’ 조감독 / 사진 키다리이엔티

여성의 서사를 전달할 책무를 오롯이 여성만 떠맡아야 하는 건 아니다. 더 많은 사회 구성원이 여성의 이야기를 해야 세상은 진짜로 변한다. 여성이 더욱 많은 영화에서 입체적으로 그려지려면 비당사자인 남성 감독의 노력도 함께 필요하다.

한국 여성 영화사에서 대표적인 흥행작으로 꼽히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조감독 출신인 박상현 감독은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남성 감독이다. 박 감독은 올해 6월 여성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법정 영화 ‘결백’을 통해 장편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박 감독은 ‘그때 그사람들(2004)’ ‘사생결단(2006)’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다양한 장르 영화 제작에 참여해왔다.

영화 결백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막걸리 농약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딸이 어머니의 결백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아들을 우선시하는 가부장적 아버지를 못 이겨 집을 나온 딸이 서울에서 변호사가 되고, 이후 어머니의 살인 사건을 뉴스로 접하면서 변호에 나선다. 딸 정인은 ‘비밀의 숲’으로 이름을 알린 신혜선이, 어머니 화자는 배종옥이 연기했다. 박 감독은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하던 당시는 2015년으로, 여성 영화가 거의 전무했다”면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어머니의 결백을 증명하는 여성 변호사 이야기를 법정 스릴러 형태로 구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이어 “한국판 여성 히어로물을 만든다면 여자 홍길동이 나오는 일종의 시대극이 가능하지 않을까”라고도 말했다. 다음은 김 감독과 일문일답.


막걸리 농약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정인(신혜선). 사진 키다리이엔티
막걸리 농약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정인(신혜선). 사진 키다리이엔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데뷔작을 개봉했다. 86만 명의 관객을 모았는데.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었는데도, 소중한 발걸음을 해주신 관객분이 있었다. ‘결백’은 소니코리아가 처음으로 투자·배급한 한국 영화다. 키다리이엔티도 공동 투자·배급했다. 대만에서도 7월 22일 극장 개봉을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손익분기점에 가까워진 상황으로, 전체적인 스코어는 나쁘지 않다.”

첫 장편 영화를 내놓은 소감이 궁금하다.
“이정재와 이미숙이 주연한 이재용 감독의 영화 ‘정사(1998)’ 마케팅 아르바이트로 영화 일을 시작한 지 20여 년 가까이 흘렀다. 데뷔 준비에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백’ 시나리오는 2015년 8월부터 썼는데, 무척 힘들었다. 마치 앞이 안 보이는 터널 같았다. 한 자 한 자 묵묵히 써 내려간 시간이 데뷔로 이어졌다.”

영화 데뷔작으로 여성 주인공의 법정물을 선택한 이유는.
“시나리오를 집필할 당시 여성 영화가 거의 전무했다. 영화를 만든다면 꼭 다뤄보고 싶은 주제가 어머니였다. 어머니를 알아가는 자식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 영화 외길을 걷는 동안 개인적으로 가계에 도움을 못 드려 어머니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의 감정을 안고 살았다. 누나도 있어서 시나리오 집필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막걸리 농약 살인사건을 소재로 채택한 계기는.
“극적인 상황에 몰린 모녀 이야기를 쓰던 중, 농촌 지역의 독극물 사건을 접했다.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권력과 이해관계가 이 이야기와 접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극 중 막걸리 농약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오랜 기간 마을에서 우정을 다져온 추인회 시장과 그의 친구들. 본사건은 살인이지만 정인은 필지 소유권을 둘러싼 남성 무리 간 알력 관계를 포착한다. 그 알력 관계에서 어머니는 배우자를 잃고 아름다운 청춘을 반납해야 했다. 가부장적인 가족의 울타리에서 딸이 겪었던 아픔을, 어머니는 마을 안에서 겪어왔던 것이다. 정인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아차리는 장면에서 정인의 얼굴과 유리창에 비친 화자의 얼굴이 나란히 겹쳐진다. 정인과 어머니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는 순간이다.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정인은 평소 아버지의 구박을 막지 못하는 어머니를 원망하면서 산다. 그런 그녀가 살인 사건의 전말을 알고 난 이후 어머니의 삶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한다. 이 과정에서 결백이란 무엇인지, 당신이 생각하는 결백은 맞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영화에서 제목 결백의 글씨체는 초반부와 후반부에 다르게 나타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결백 글씨체는 여기저기 스크래치(흠집)가 있다. 어머니가 복수심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정인이 중간에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아들의 결백을 믿었던 어머니가 아들의 죄를 알아차리고 절망하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를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마더’에 등장했던 어머니(김혜자)가 아들(원빈)을 지켰던 것처럼, 정인은 어머니를 끝까지 변호하는 길을 택한다. 어머니가 정말 결백하다고 생각하냐는 검사의 질문에 “어머니는 이미 충분한 대가를 치렀어요”라고 말한다. 가부장제의 폭압 속에서 죄를 저지른 여성이 있을 경우, 범죄 처벌에 집중할지 근본적 원인을 고찰할지 질문한다면, 이 영화는 후자를 따르겠다고 답을 내놓는다.

정인이 어머니의 결백을 끝까지 주장하는 이유는.
“원죄는 어머니의 삶을 망쳤던 아버지 태수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미 충분한 대가를 치렀어요’라는 대사를 넣을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다. 명징하게 메시지를 드러내고자 넣는 것을 택했다.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고 싶었다. 영화의 플롯은 ‘마더’를 레퍼런스로 삼았다.”

정인도 여성 히어로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히어로로 보면 좋을까.
“정인은 남성 중심 사회인 법조계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녀는 변호사로서 의뢰인의 편에 서야 한다는 직업적 윤리관과 죄인을 변호할 수 없다는 도덕적 윤리관이 부딪칠 때마다 후자를 선택했다. 그런 정인이 어머니를 변호하면서 직업적 윤리관을 받아들인다. 윤리관이 포괄적인 방향으로 이어지면서 자아가 완성된다. 정인은 어머니를 구하는 구원자이면서, 가부장제 사회의 피해자이고, 동시에 자아를 형성해가는 평범한 개인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이 주인공인 상업 영화가 점차 많아지고 있는데.
“‘미씽(2016)’ ‘82년생 김지영(2019)’ ‘정직한 후보(2019)’ ‘오! 문희(2020)’ 등 여성 주인공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다. 상업 영화계에서도 소재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투자사들이 여성 영화에 대한 투자를 점차 열고 있다. 긍정적인 방향이다.”

할리우드에선 판타지 요소를 가미한 히어로물 시장이 탄탄하다. 여성 히어로가 대거 등장할 수 있는 이유다. 한국판 여성 히어로물은 어떤 방식으로 구현이 가능할까.
“조선 시대 배경의 사극으로 풀면 어떨까.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기개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라를 망치는 이들을 심판하는 멋있는 여성이 등장했으면 좋겠다. 마치 홍길동의 여자 버전처럼 말이다.”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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