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염 세계반도체협회 아시아태평양 리더십 위원, 실리콘마이터스 대표, 매그나칩반도체 대표, 하이닉스반도체 부사장
허염
세계반도체협회 아시아태평양 리더십 위원, 실리콘마이터스 대표, 매그나칩반도체 대표, 하이닉스반도체 부사장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 업계는 ‘주연’과 ‘조연’으로 나뉜다. 업계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핵심 기술을 만들면 대량생산을 통해 가격을 낮춰 경쟁사들을 견제할 수 있다.

자신의 기술이 시대적으로 계속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아니면 기회를 봐서 인수·합병(M&A)될 건지 잘 판단해야 한다.”

허염 한국시스템반도체포럼 회장은 대한민국 시스템 반도체 업계의 ‘원로’를 꼽으라 하면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그의 일생이 한국 시스템 반도체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가 시스템 반도체에 몸담기 시작한 것은 1985년부터였다. 당시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을 배우면서 반도체 설계 분야를 익혔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1989년부터 삼성전자의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스템 반도체 관련 경영 결정을 하게 된 것은 1999년 하이닉스반도체 부사장을 하면서 시스템반도체사업본부장을 맡았을 때다. 이후 2004년에는 하이닉스에서 시스템 반도체 사업 부문을 독립해 매그나칩 반도체를 설립했고, 퇴사 후 현재까지 전력 관리용 시스템 반도체를 만드는 실리콘마이터스 대표직을 역임하고 있다. 그가 시스템 반도체에 몸담은 세월만 34년, 경영 결정을 내린 세월만 20년에 달한다. 그에게 국내 기업의 시스템 반도체 성공 전략에 대해 물었다.


시스템 반도체는 상대적으로 종류가 많은데, 당신의 주력 포트폴리오는 무엇인가.
“나는 주로 시스템 반도체 중에서도 로직 반도체를 개발하던 사람이다. 논리적인 연산 구조를 설계해서 자동화 기법으로 반도체에 새기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게 고난이도 공정 기술을 사전에 개발해야 해서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규모의 경제가 필요한 분야다. 그래서 소수 정예로 시작할 수 있는 분야인 파워 아날로그 반도체를 공략했다. 대기업에서 몇 번 시도했지만 실패한 분야이기도 하다. 틈새시장인데, 아주 필요한 틈새시장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했다.”

국내 팹리스의 포트폴리오 구성은 어떤가.
“과거에는 로직 반도체가 많았는데, 변화의 흐름을 잘 못 맞춰서 많이 없어졌다. 로직 반도체 개발 비용을 감당하려면, 규모가 1조원은 돼야 해서 대기업 위주로 많이 이뤄진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칩을 공략하는 곳이 많아졌더라. 인공지능 칩은 두 가지로 나뉜다.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CPU)처럼 대용량 그래픽을 처리하는 고성능 칩이 있고, 인공지능 칩이 대용량 서버가 아니라 디바이스에 들어가서 간단한 연산을 처리해주는 모델도 나오고 있다. 기술이 변화할 때 새로운 기회가 생기면 팹리스들이 빨리 들어가서 일단 개발한다.”

결과가 어떨 것이라고 보나.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면, 기업 규모가 커지거나 M&A되거나 둘 중 하나다. 기술의 메가 트렌드가 변화할 때 핵심 기술을 가진 팹리스가 되면 확 성장할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나왔다가 바로 사라진다. 팹리스 업계는 ‘주연’과 ‘조연’으로 나뉜다. 업계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핵심 기술을 만들면 대량생산을 통해 가격을 낮추고, 경쟁사를 견제할 수 있다. 만약 그러지 못한 채 ‘조연’으로 3년을 지내면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진다. 기술의 흐름, 시장의 흐름에 따른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이 있다. 자신의 기술이 시대적으로 계속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아니면 기회를 봐서 M&A될 건지 잘 판단해야 한다.”

어떻게 시장에서 살아남는 포트폴리오를 설정하나.
“‘앵커 프로덕터(anchor productor)’가 돼야 한다. ‘앵커’는 닻, ‘프로덕터’는 생산자다. 내 기술을 닻처럼 하나의 축으로 삼고 다른 기능을 추가하는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다양한 기능을 융합하다 보면 본인의 위치가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다. 예컨대 내가 만드는 아날로그 파워 반도체는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반도체 크기가 작아지면서 여러 칩을 하나의 집적회로(IC)에 모아서, 설계하는 ‘단일 칩 체제(SoC)’에는 파워 아날로그 반도체를 넣을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 파워 아날로그 반도체는 SoC 바깥에서 또 다른 핵심 축이 돼서 다른 기능들을 합친다. 파워 반도체 비즈니스는 지속 가능한 영속성이 있는 셈이다.”

한국이 여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취약한 이유가 무엇인가. 정부 정책의 문제인가.
“사실 정부 정책은 굉장히 성공적이었고 중요한 과제였다고 생각한다. ‘시스템 IC 2010(1998~2011년)’과 ‘시스템 IC 2015 (2011~2016년)’ 정책 당시 정부가 반도체 연구 사업 과제를 대학에 주면서 대학원생 양성에도 도움이 됐다. 경종민 카이스트 교수가 정부에 제안해서 시작한 반도체설계교육센터(IDEC)도 매우 좋았다. 가입 학교 간 설계 자동화 소프트웨어를 공유하고 교육을 진행했다. 하지만 정부 예산이 끊기면서 어려워졌다. 어느 정도 정부 지원이 이뤄졌으니 자생하라는 것이었는데, 사실 교육은 수익 사업이 아니어서 어렵다.”

정부 정책 집행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로드맵을 갖고 지속적으로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 로드맵 없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시장이 되면 실패한다. 우리가 시스템 반도체의 모든 부문을 잘할 수는 없다. 대기업과 팹리스 간 해야 할 일을 구분하면 다 같이 발전할 수 있다. 한 분야의 기술이 뜬다고 해서 다 같이 몰려들면, 망하는 기업이 속출한다. 팹리스들은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포트폴리오를 분명히 정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겹치지 않는 포트폴리오를 만든 팹리스끼리 서로 협력하면서 발전해 나가야 한다. 결국 ‘협력’이 핵심이다.”

해외 업체와 협력하는 것도 방법이 될까.
“국가 간 경계를 두면 한계가 생긴다. 서로 보완 관계에 있는 국내외 업체들은 협력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왜 정부가 해외 업체들에 돈을 주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이 한국에서 채용하고, 세금을 내지 않느냐. 협력하다 보면 필요한 경우 M&A도 나올 수 있다.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자.”

세계 시스템 반도체 매출에서 한국 업체 비중은 3%에 불과하다. 어떻게 높여야 하나.
“점유율을 높이려면 글로벌 팹리스가 나와야 한다. 보통 팹리스는 한국 시장을 보고 시작한다. 하지만 한국의 고객사는 대기업들이고, 이들은 이미 자회사가 있다. 이들과 경쟁해야 해서 시장이 작은 편이다. 우리가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절대 강자인 이유는 수출 산업 덕분 아닌가. 시스템 반도체도 글로벌화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상황이다. 기술력, 제품력, 글로벌 비즈니스 역량이 모두 있어야 한다.”

글로벌 무대로 나가는 방법은. 실리콘마이터스가 진출한 중국 시장은 어떤가.
“중국 시장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실리콘마이터스도 3년 넘게 중국 시장에서 정착하느라 애를 먹었고, 최근 통신 장비 업체 고객사가 생겼다. 중국 팹리스들은 가격 경쟁력이 있고, 이 시장에서 미국 팹리스들은 품질 경쟁력이 있다. 국내 팹리스는 어중간한 위치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간 마찰이 한국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최근 중국 업체들이 미국과 협력 관계가 끊길 위험에 처하면서 한국 기업들에 좀 더 친절해졌다. 아시아 시장을 잘 공략하면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꼭 해결했으면 하는 부분은.
“전문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대학이 산업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학생은 50명 그대로다. 이번에 여러 대학이 반도체공학과를 만드는데, 제대로 추진됐으면 좋겠다.”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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