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하버드대 MBA, 보스턴컨설팅, 야후코리아 M&A 전략 총괄, 삼성물산 패션 부문 상무
김지영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하버드대 MBA, 보스턴컨설팅, 야후코리아 M&A 전략 총괄, 삼성물산 패션 부문 상무

최근 삼성물산 패션 부문 ‘최연소 여성 상무’ 출신의 스타트업 이직이 화제가 됐다. 주인공은 김지영 라엘 최고운영책임자(COO)다. 연매출 1조7590억원(패션 부문) 삼성 계열사에서 스포츠사업부를 이끌던 그가 창업 3년차 스타트업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김 COO는 새로워진 소비 시장에서 진정성 있는 작은 기업들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봤다. 1월 25일 삼성동 라엘 사무실에 김 COO를 만나 30~40대 여성 소비자들의 특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패션 대기업 임원을 거쳐 소비재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극과 극인데, 어떤가.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고 있다. 기존 큰 회사들은 ‘우리 정체성이 이러니, 이 영역까지만 한다’는 암묵적인 경계가 있는데, 스타트업은 그렇지 않다. ‘못할 게 뭐 있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게 대기업 의사결정 과정이라면, 이쪽은 정반대다. 라엘이 제품을 만드는 방식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일단 시장에 내놓고, 이후 소비자 피드백을 받아 부족한 점을 개선하는 식이다. 라엘은 초창기 1년 동안 총 7번의 제품 업그레이드를 했다. 한번에 최종 완성품을 내놓으려는 대기업과 차이가 있다.”

여성 소비 현장에서 시장을 이끌어왔다. 지금 30~40대 여성 소비 특징을 꼽는다면.
“과거의 30~40대 여성들은 입는 것, 즉 ‘의(衣)’에 집중했다. 그런데 지금은 입는 것을 넘어 먹는 것(食), 자는 것(住), 쉬는 것(休)까지로 소비 범위가 확대됐다. 예전 ‘미시’들이 자신을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방법으로 옷이나 가방을 활용했다면, 지금은 ‘라이프 스타일(생활 양식)’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물론 여기엔 인스타그램 같은 SNS 플랫폼 발전이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 내가 무엇을 먹는지, 어디에서 사람들을 만나는지, 휴가 때 얼마나 멋진 곳에 가서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지를 보여주는 식이다. 그러기 위해 자기 취향으로 잘 꾸며놓은 공간에 좋은 가구나 조명, 디자인이 예쁜 가전제품, 그릇 등을 놓는다. 브랜드, 제품군, 소비 대상이 전반적으로 다양화됐다. 과거에는 시즌마다 ‘잇백(it bag·유행하는 가방)’이 항상 있었다. 그런데 4~5년 전부터는 이런 트렌드가 사라지고 있다. 취향이 다양화된 데다, 남이 들었다고 해서 내가 꼭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난 좀 다르다, 남들이 모르는 걸 갖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네트워크 힘이 커졌기 때문인가.
“그렇다. 수익을 내는 것보다 더 순수한 목적을 가진 네트워크 집단의 입김이 세졌다. 서로 정보를 얻는 커뮤니티, 모임인데, 이 부분이 요즘은 더욱 세분화되고 다양해지는 모습이다. ‘이거 써봤는데 좋아요’ 등 소소하지만 진실성 있는 정보가 공유된다.”

소비자들이 똑똑해졌다는 뜻인가.
“그렇다. 초창기만 해도 인플루언서들이 추천한 제품이나 카페에서 유명한 제품을 무작정 따라 사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것이 홍보인지, 진정성이 있는지를 다 구별한다. 유통 시장 주도권이 공급자에서 소비자로 이동한 상황이다. 공급자가 컨트롤할 수 있는 여지가 적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브랜드 가치가 확고하면서 제품력이 좋아야 한다.”

본인의 소비와 비교한다면.
“여섯 살 남자 쌍둥이를 키우고 있다. 각종 일로 무척 바쁘다 보니 아이를 위한 소비를 할 때 관련 정보를 찾아볼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동네 엄마들 중심으로 구성된 지역별 ‘맘카페’에 가입해 동네에 있는 수영 학원, 유치원 관련 정보를 얻거나, 인스타그램 계정을 따로 만들어서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의 계정을 팔로한다. 어떤 아이템을 유용하게 쓰고 있는지 등을 보는 거다. 같은 나이대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엄마들의 정보가 더 진정성이 있어서 신뢰하는 편이다. 옆집 사는 비슷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평범한 사람의 판단을 믿는다.”

유통 업계는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제는 작은 기업들에 기회가 생긴다. 제품력이 좋고 진정성이 있다면, 규모가 작은 기업의 제품이라도 소비자들에게 먹히는 시대다. 세계적인 유통 시장 트렌드를 보라. 우리가 알던 P&G, 존슨앤드존슨 같은 대단한 소비재 회사들도 ‘디스럽션(disruption·혁신에 의한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런 매스 브랜드에 대해 사람들의 선호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소재나 제품 면에서 큰 혁신 없이 정체돼있던 소비재 시장에 여성의 몸을 우선시하는 라엘 같은 회사의 제품이 등장하면서 시장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과거 소비자들은 마트 진열장에 진열된 제품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진열대 장악’의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여성 소비자들은 정보가 모인 곳에서 알게 된 작은 브랜드의 상품평을 보고 제품을 산다.”

기존 브랜드들이 위기를 느낄 만하다.
“기존 브랜드들이 살아남기 더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기존 브랜드들에는 과거 화려했던 시절과 이 시절을 기억하는 단골, 파트너가 있다. 이런 기존의 충성 고객들을 지나치게 추종하다 보면 시장 트렌드를 따라 변화하기가 쉽지 않다. ‘빈폴 골프’는 빈폴이 국내에서 큰 성공을 거뒀을 때 ‘캐주얼 골프복’ 콘셉트를 갖고 나온 브랜드다. 운동복 같지 않은 디자인의 운동복을 추구했다. 그러다 골프 시장이 커지면서 연령대도 낮아졌는데, 이들은 나이키, 타이틀리스트 같은 기능성 스포츠 전문 브랜드 옷을 선호한다. 트렌드가 바뀌었지만, 빈폴 골프는 정체성 때문에 콘셉트를 바꾸기 쉽지 않았다. 그나마 제품에 살짝 변화를 줘봤더니, 기존 고객들도 혼란스러워했고, 새 고객도 잡지 못했다. 과거 고객, 과거 가치를 지키는 동시에 새로운 부분을 개척해 나가는 것은 너무 어려운 싸움이다.”

그럼 기존 강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해외 기업들은 포트폴리오 전략을 쓰고 있다. 미국 헤지펀드에서 일하는 동생이 최근 유럽의 글로벌 식품기업 CEO와 만나서 한 이야기를 전해줬다. 과거 이 회사는 카테고리별로 가장 덩치가 큰 브랜드에 회사 자원을 집중했지만, 지금은 그 전략을 바꾸었다고 한다. 오히려 한정으로 요구르트를 만드는 30~40년 된 작은 지역 농가를 인수해 이 브랜드를 강조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다고 한다. 대기업들도 기존의 것을 어떻게 더 성장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보다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고 새 브랜드를 더하면서 바뀌는 세상에 발을 맞춰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농가의 이야기에 열광한다.”

주 소비층의 세대가 바뀌어서일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밀레니얼 세대가 소비의 주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변화를 보면, 이런 소비 트렌드가 전 연령대로 확산하고 있다. 다양한 연령대에 이런 소비에 대한 욕구가 잠재돼 있다고 본다. 40대 여성들만 봐도 세대 구분상 밀레니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도 밀레니얼과 비슷한 소비 패턴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잠재된 욕구를 실현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지만, 세상이 바뀌면서 욕구 실현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라엘의 전략은.
“인위적으로 마케팅하지 않는다. 최근 유통시장에서는 온라인 동영상을 활용해 상품을 알리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자극적인 동영상들이 많이 먹힌다. 그렇지만 소비자들은 앞으로 이런 것들을 더 잘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진정성이 담긴 꾸준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정석대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다.”

송현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