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밍제 미디어텍 회장이 지난 2014년 중국 하이난에서 열린 보아오포럼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차이밍제 미디어텍 회장이 지난 2014년 중국 하이난에서 열린 보아오포럼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중국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을 정육점에 빗댄다면, ‘미디어텍’은 가장 잘 드는 칼이었다.”

중국 시장조사기관 핀투왕(品途网)은 최근 대만 반도체 회사 ‘미디어텍’의 성장 과정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핀투왕이 미디어텍을 ‘칼’이라고 한 이유는 미디어텍이 생산한 값싼 반도체 칩이 중국 제조 업체에 유입되면서, 중국이 휴대전화 단말기를 쉽고 싸게 만들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디어텍은 중국 ‘산자이(山寨·짝퉁)폰’ 제조 업체의 대부로 불린다.

세계 반도체 산업은 메모리와 시스템으로 나뉜다. 데이터를 저장하는 용도인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시스템 반도체는 데이터 연산·처리에 쓰인다. 시스템 반도체는 고차원 연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설계(팹리스)→생산(파운드리)→포장(패키징)→테스트 등으로 분업화돼 있다.

미디어텍은 공장 없이 설계와 판매만 하는 팹리스(설계 전문) 회사다. 지난해 기준 팹리스 산업의 세계 시장 규모는 800억달러(약 90조원) 수준. 퀄컴과 화웨이(하이실리콘)가 대표적인 팹리스 회사다. 삼성이나 SK하이닉스는 모든 공정에 다 참여하는 종합제조회사(IDM)이며 대만의 TSMC, UMC는 설계를 받아 생산만 하는 파운드리 회사다.

미디어텍은 시스템 반도체 중에서도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AP(Application Processor·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핵심 칩)를 주로 설계한다. 2017년 3분기, 미디어텍의 글로벌 스마트폰 AP 시장 점유율은 14%로 퀄컴(42%), 애플(20%)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삼성전자는 4위(11%)였다.

미디어텍이 시작부터 지금의 모습이었던 건 아니다. 미디어텍은 초창기 CD-ROM, DVD플레이어 칩을 주로 설계하는 업체였으나, 2000년대 중반 휴대전화 반도체로 사업을 전환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미디어텍은 ‘빠른 B급 전략’으로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 퀄컴 등 대기업이 3G(3세대 이동통신)용 칩 개발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2G(2세대 이동통신)용 칩을 생산했다. 미디어텍은 최첨단 휴대전화는 비싸서 살 여력이 없는 중국·인도 시장을 겨냥했다.

중국과 인도 단말기 제조 업체에 퀄컴의 반값에 칩을 공급했다. 또 복잡한 휴대전화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하나의 반도체 칩으로 통합해 누구나 쉽게 휴대전화을 만들고 또 빠르게 신모델을 시장에 유통할 수 있도록 했다. 칩을 개발한 후에는 그 기술을 일반에게 공개했다. 기술이 없어 휴대전화를 만들지 못했던 중국 업체가 미디어텍 덕분에 단말기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고 미디어텍의 AP 시장 점유율은 30%까지 치솟았다.


M&A로 확보한 기술로 위기 돌파

미디어텍은 애플 아이폰 출현으로 시작된 스마트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한동안 주춤했으나, 기업 인수·합병(M&A)으로 확보한 기술로 이겨냈다. 스마트폰 시장 접근 전략도 2G 휴대전화 시장을 대할 때와 비슷했다. 대신 미리 준비했다. 중국 스마트폰 시장 성장 가능성을 보고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제조 단가를 낮추는 데 집중했다.

2011년 미디어텍의 중국 본토 스마트폰 반도체칩 출하량은 1000만 개에 불과했으나, 2012년에는 1억1000만 개로 폭증했다. 주 고객인 화웨이·오포·비보 등 중국 스마트폰 제조 업체가 부상하면서 미디어텍은 날개를 달았다. 2016년 미디어텍은 매출 2755억대만달러(약 10조원)를 돌파했다.

하지만 현재 시장 상황은 미디어텍에 우호적이지 않다. 미디어텍의 AP를 탑재한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이 정체된 데다, 중저가 시장을 겨냥하는 중국 팹리스 반도체 업체의 기술력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 취임에 따라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가 요동치는 것도 불안한 부분이다. 미디어텍의 지난해 매출은 78억7500만달러(약 8조9000억원)로 전 세계 팹리스 시장에서 퀄컴(170억7800만달러), 브로드컴(160억6500만달러), 엔비디아(92억2800만달러)에 이어 4위로 미끄러졌다.

미디어텍이 저가 시장을 공략했다고 해서 기술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메모리반도체는 미세공정 전환을 통한 원가 절감 전략이 통할지 몰라도, 시스템 반도체 분야는 설계 능력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동일한 성능이라도 설계 능력에 따라 구현 방식은 물론 원가도 달라진다.

미디어텍은 5G(5세대 이동통신) 시장의 선두주자로 올라서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미디어텍은 지난해 대만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회사인 TSMC 출신인 차이리싱 대만중화텔레콤 회장을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했다. 미디어텍은 핀란드에 통신기술연구개발센터를 두고 있으며, 올해 주주총회에서 5G와 인공지능(AI) 기술에 매년 30억대만달러(약 1000억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창업주인 차이밍제 회장은 미디어텍 출범 30년을 맞은 올해 1월 CEO 직에서 물러났다.


plus point

구내식당에서 밥 먹는 ‘괴짜’ 회장님

‘산자이(山寨·짝퉁)’의 왕 ‘대만 반도체의 대부’, 미디어텍의 창업자인 차이밍제(蔡明介·69) 회장을 수식하는 단어다. 뒷골목 큰형님을 연상시키는 별명과 달리 차이 회장은 전형적인 ‘이공계 모범생’ 스타일의 괴짜 경영자로 알려졌다.

언론 인터뷰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극히 꺼리면서도 주기적으로 최신 정보통신(IT) 기술을 소개하는 칼럼을 신문에 기고한다. ‘파괴적 혁신 4.0’ ‘혁신 기업의 딜레마’의 저자인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석좌교수의 열렬한 팬이어서 “미래 IT 시장에서는 현존하는 기술의 연장선이 아닌, 비연속적 성격의 융복합 기술이 변화를 이끌 것”이라는 크리스텐슨 교수의 지론을 입버릇처럼 강조한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면, 시장 상황이 늘 바뀐다는 것”이라는 말도 차이 회장이 즐겨하는 말이다. 그는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첨단 기술을 제품에 탑재하진 못했더라도, 개발비를 낮추고 개발 기간을 줄여 시장이 필요로 하는 제품을 내겠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의 최근 언론 인터뷰는 2016년이 마지막이었다. 당시 한 대만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짝퉁왕이라는 별명이 기분 나쁘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든 무슨 상관인가. 나는 우리 회사만 잘되면 된다”고 응수했다. 미디어텍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98억대만달러로 전년(230억대만달러)의 반 토막이 났지만, 사기진작 차원에서 연말에 전 직원에게 100만대만달러(약 3500만원)의 인센티브를 지급했다.

차이 회장은 주식을 포함한 전 재산이 1조원에 이르지만 최근까지 회사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줄을 서서 식사할 정도로 소탈하다.

차이 회장은 대만의 최고 명문대인 국립대만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신시내티대 공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3년 유학을 마치고 대만으로 돌아와 롄화전자 연구개발직으로 입사해 부사장까지 올랐으며, UMC의 개발사업부문장을 맡았다가, 1997년 UMC의 개발사업부가 분사돼 만들어진 회사인 미디어텍의 CEO로 취임했다.

김명지 기자, 하지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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