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문이 닫힌 채 텅 비어 있는 대구 성서공단 거리. 사진 이윤정 기자
공장 문이 닫힌 채 텅 비어 있는 대구 성서공단 거리. 사진 이윤정 기자

10월 11일, 동대구역에서 차를 타고 약 30분 달려 대구 최대 산업단지인 성서공단을 찾았다. 이곳에 입주해 있는 섬유·의복 관련 업체는 2016년 말 기준 530개사. 그러나 지금 이 숫자가 맞는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날 찾은 성서공단엔 ‘공장 매매·임대’ ‘평수 다양’ 등이 쓰인 현수막이 전봇대마다 걸려 있었다. 과거 섬유 업체 여럿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3층짜리 건물을 마주했을 땐 황망함마저 느껴졌다. 입구에 걸려 있던 업체 간판은 빛이 바랬고,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탓에 내부는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았다. ‘현 위치 매매’라는 커다란 현수막만이 건물을 지키는 수위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낮 12시, 한창 점심시간이지만 공단 골목골목은 여전히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단체급식과 한 달치 식사값을 한 번에 지불하는 월 식사 전문이라 공장 노동자들이 주요 고객인 ‘삼성구내식당’은 일찌감치 점심 장사를 끝내고 뒷정리 중이었다. 이곳에서 4년째 일하고 있다는 종업원은 “처음 일하러 왔을 때와 비하면 점심 손님이 절반도 넘게 줄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 남성은 “지금 공장들이 다 문닫고 나가고 있는데 당연한 것 아니냐”고 거들었다.

한국을 제조업 강국으로, 수출 주도형 경제로 견인했던 일등공신인 섬유산업이 무너지고 있다. 1990년까지만 해도 섬유산업은 한 해에 148억달러어치를 수출하며 한국 수출(650억달러)의 23%를 차지했다. 그러나 지난해 섬유산업의 수출 성적표는 엉망이었다. 전체 수출액이 5736억달러로 9배 가까이 늘어나는 동안 섬유산업 수출액은 137억달러에 그쳐 28년 전보다 오히려 줄었다.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 역시 2.4%에 불과하다. 섬유 수출이 줄어드는 동안 수입은 오히려 늘어, 2016년 사상 처음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섬유산업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와 연결돼 있는 패션 산업 역시 상황이 녹록지 않다. 한국은 브릭스(BRICs) 등 신흥국을 제외한 경제 규모 상위 15위권 국가 중 유일하게 세계적인 의류 브랜드가 없다. 산업 전반이 급성장하면서 뛰어난 의류 제조 기술력을 갖췄고, 유행에 민감해 소비자의 패션 수요가 많은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스페인 ‘자라’, 스웨덴 ‘H&M’, 일본 ‘유니클로’ 등의 약진을 지켜보면서 한국 역시 제조·직매형 의류(SPA) 산업에 뛰어들었지만, 아직 세계 시장에서 이렇다 할 좋은 성적은 내지 못한 상황이다.

한국 섬유패션산업의 문제는 무엇일까. 한때 ‘섬유산업의 메카’로 불렸던 대구·경북 기업인들에게 물었다. 이들은 근로시간 단축, 최저임금 상승 등 점점 기업 운영을 옥죄는 한국의 현실을 첫 번째로 꼽았다. 연구·개발(R&D)과 설비 투자가 부진한 점도 후발국에 자리를 내준 요인이다. 그중에서도 이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이라는 사회의 낙인이다. 이 낙인 때문에 청년층이 섬유산업을 외면하고, 정부의 지원 등을 받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낙인은 1997년, 외환위기 때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10월 11일 찾은 대구 달서구 성서공단. 전봇대에 ‘공장 매매·임대’ 현수막이 붙어 있다. 사진 이윤정 기자
10월 11일 찾은 대구 달서구 성서공단. 전봇대에 ‘공장 매매·임대’ 현수막이 붙어 있다. 사진 이윤정 기자

사양산업·3D 업종 낙인도 큰 문제

올해로 섬유산업을 시작한지 30년이 다 돼가는 A대표는 1997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은행에 투자금을 빌리러 갔는데 ‘섬유산업에는 돈을 빌려줄 수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해 8월 전국은행연합회는 ‘금융기관 여신심사 체계의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며 섬유와 신발 산업 등을 사양산업으로 분류했다. 대출 한도를 줄이고, 심사 기준을 한층 강화했다. 김 대표는 “그때부터 정부가 섬유산업을 사양산업이라고 못 박은 것”이라고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 수출 산업의 ‘첨병’ 역할을 해온 종합상사가 IMF 위기로 몰락하면서 섬유산업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각 섬유기업은 ‘상사맨’들이 해외에서 주문받아오면, 이를 받아 생산하는 데 집중했다. 즉 직접 고객과 대면한 적이 없었던 셈이다. 심승범 한국섬유개발연구원 전략기획실장은 “상사가 사라지면서 기업이 자발적으로 바이어를 찾아가 거래를 따내야 했지만, 다이렉트로 영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보니 당시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다”며 “그때 대구에서만 1000개 이상의 기업이 부도를 맞았다”고 말했다.

한국 섬유산업이 여전히 활기를 되찾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 부분과 관련이 있다. 김영무 한국섬유산업연합회 기술지원팀장은 “과거부터 상사 시스템에 의존하다 보니 섬유기업의 마케팅 능력이 길러지지 않았고, 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며 “대만 섬유기업만 봐도 영어가 안 되면 손짓 몸짓 모두 활용해 해외 물량을 따내는데, 한국 섬유기업은 이 같은 마케팅 능력이 부족해 여전히 중간 무역 기능을 담당하는 ‘컨버터’를 끼고 거래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렇게 중간 단계가 많아지면 기업에 돌아가는 마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상사 의존 현상이 한국 섬유산업을 병들게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산업 내 고령화 현상도 한국 섬유산업의 성장 엔진을 꺼트리는 요인이다. B대표는 “내가 50대인데, 우리 공장에 나보다 나이 많은 직원이 20%에 달한다”며 “사양산업, 3D 업종이란 인식에 젊은이들이 찾지 않는다. 가장 젊은 직원이 40대 중반”이라고 말했다. 실제 산업연구원의 ‘전국 섬유 업체 실태조사’에 따르면 섬유산업의 고령화는 심각한 상황이다. 생산기술직과 단순생산직 인력은 50대 이상이 전체 종사자의 각각 57.8%, 56.6%에 달하는 반면, 30세 미만은 각각 5.2%, 10.5%에 불과했다. 특히 봉제 업체 종사자의 경우 40대 이상이 전체의 92%에 달했다.

젊은이들이 섬유산업을 기피하다 보니 섬유산업의 앞날을 견인할 각 대학의 ‘섬유과’ 역시 속속 사라지고 있다. 2000년 섬유고분자공학과를 재료공학부로 개편한 서울대가 대표적이다. A대표는 “업황이 계속 좋지 않다 보니 대학들이 섬유과를 없애고 있는데, 섬유과가 없어지니까 고급 인력 공급이 안 된다”며 “의류 분야에서 신소재를 이용하는 비(非)의류 분야로 업종을 전환하고 싶어도,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섬유산업 구조조정은 현재진행형

C대표는 최근 진지하게 베트남으로 공장 이전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점점 높아지는 인건비 때문이다. C대표는 “우리 시설을 그대로 가지고 베트남으로 가면, 인건비를 포함한 직접비에서 40% 이상 절감할 수 있다”며 “요즘 워낙 한국 사람이 많이 가서 토지 임대료가 올랐다고 하는데, 그래도 한국보다는 저렴해 지금 생산량을 그대로 유지해도 이익은 더 많이 생긴다. 우리 현실을 생각하면 무조건 가야 한다”고 말했다.

통계청의 ‘광업·제조업 보고서’와 ‘전국 사업체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섬유산업은 부가가치 10억원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종사자 수(종사자 10인 이상 사업체 기준)가 2015년 기준 10.1명으로 제조업 평균 5.9명보다 4.2명 더 많다. 즉 인력 의존도가 높은 산업이란 뜻이다.

섬유산업 매출액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통계청의 ‘경제 총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기준 12.9%가 인건비에 쓰이고 있었다. 이는 제조업이 10.4%인 것과 비교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이며, 2010년 11.1%보다 1.8%포인트 상승한 것이다.

섬유기업인들은 지역별·업종별로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B대표는 “최근 주변에 폐업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며 “인건비가 올랐다고 해서 무조건 제품 가격을 올릴 순 없다.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 저임금 국가들이 관세를 포함한다고 해도 우리보다 30% 이상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우리가 가격을 올리면 망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그렇게 손익분기점을 넘나들다 보면, 결국 폐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며 “섬유산업의 구조조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인건비를 마련하는 데 허덕이다 보니 투자는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다. 산업연구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생산 설비 중에서 구매한 지 10년 이상 된 노후 설비가 63.6%로 나타났다. 특히 20년이 넘은 생산 설비가 16.1%에 달했다. 김영무 팀장은 “섬유산업은 인력의 기술 수준에 따라 좌우되는 면도 있지만, 장치 산업이기도 하기 때문에 좋은 설비 기계만 있다면 품질이 함께 올라간다”며 “한국은 설비 투자가 정체돼 있어 대규모로 설비에 투자하는 중국 등에 뒤처지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C대표는 “최근 R&D와 설비에 투자하지 않으면 사업을 접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섬유기업인들도 알고 있다”며 “이 때문에 최근 기업 내에 조그맣게라도 연구소를 차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섬유산업의 이 같은 고전은 이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패션 브랜드’가 없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윤한영 한국패션산업연구원 패션사업본부장은 “소재가 발전하기 위해선 완제품을 공급하는 패션 브랜드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패션 브랜드는 소비자와 직접 소통하는 만큼 시장 동향과 소비자의 니즈 등을 파악하고 소재 분야를 끌어줘야 하는데, 현재 한국에선 이 같은 역할을 수행할 ‘리딩 그룹’이 약하다”고 말했다.


세계적 패션 브랜드도 부재

실제 제조·직매형 의류(SPA) 브랜드가 전 세계 패션 시장의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한국 역시 토종 SPA 브랜드를 내놓았지만,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가지는 못하고 있다. 2009년부터 등장한 스파오나 탑텐, 에잇세컨즈, 데이즈 등 토종 브랜드는 1000억원에서 4000억원대 매출에 머물러 있다.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패스트리테일링그룹의 지난해 매출(연결 기준)이 19조원인 것과 비교하면 약 50분의 1에 불과하다. 설상가상으로 3조7000억원대에 이르는 국내 SPA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다. 국내 SPA 시장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유니클로의 경우 최근 국내에 자매 브랜드 ‘GU’까지 진출시켰다.

윤한영 본부장은 “결국 자본의 차이”라며 “자라, H&M 등 글로벌 SPA 브랜드의 경우 아주 짧은 주기로 디자인에 변화를 주고, 완성품을 전 세계에 빠르게 전달하는 공급망이 잘 갖춰져 있다”며 “반면 한국 토종 SPA의 경우 자본과 인프라 측면에서 이들과 차이가 있다 보니 세계 SPA 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했다.


plus point

서울은 패션, 경기는 니트, 대구는 직물

한국 섬유산업은 전국 각지에 분포해 있고, 지역별로 특화된 분야도 제각기 다르다. 현재 가장 많은 섬유패션기업이 몰려있는 곳은 서울이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에 따르면 서울에 적을 두고 있는 섬유패션기업은 총 2만462개로, 42.7%를 차지한다. 종사자는 10만8352명으로 35.9%다. 서울은 ‘한국 패션 산업 1번지’ 동대문이 있는 만큼 패션의류에 강점을 보이고 있다. 봉제와 디자인을 지원하는 동대문패션비즈센터와 패션 비즈니스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국생산기술원이 서울에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두 번째로 큰 곳은 경기 북부다. 경기 북부에 위치한 섬유패션기업은 총 8774개(18.3%)로, 종사자는 6만3319명(21%)이다. 이곳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니트의 약 90%를 담당하고 있다. 양주엔 염색 가공, 포천엔 니트 편직을 중심으로 한 기업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 있는 한국섬유소재연구원 역시 니트 직물과 염색 가공을 주로 연구한다.

대구의 경우 ‘섬유산업의 메카’로 불리며 한때 전국 최대 섬유산업 규모를 자랑했지만, 현재 대구에 위치한 섬유·패션 사업체와 종사자 수는 각각 5024개(10.5%), 3만2486명(10.8%)으로 서울, 경기에 이어 3위로 내려앉은 상황이다. 대구는 원단 제작과 봉제 업체가 각각 40%, 30%대로 나뉘어 있다. 대구의 섬유산업 규모는 이전보다 줄었지만, 과거의 영광 덕에 서울에 버금가는 연구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화학섬유와 제직을 연구하는 한국섬유개발연구원과 염색 가공을 연구하는 다이텍연구원, 패션과 봉제를 주로 다루는 한국패션산업연구원 모두 대구에 있다.

이외에도 염색 가공 업체가 주로 포진해 있는 경기도 안산, 자카드 직물이 특화된 충남 유구읍, 실크 직물에 집중하는 경남 진주, 탄소섬유와 천연 의류가 발달한 전북 등이 있다.

이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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