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심’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시대다. 그러나 세종특별자치시에 가보니 이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퇴근하고 나면 청사 앞 술집에 삼삼오오 모여든다. 일상 얘기로 시작한 술자리는 성장 엔진이 꺼져가는 한국 경제를 어떻게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 열띤 토론으로 이어진다. 나라를 생각하는 이들 모습을 보다 보면 없던 애국심마저 생겨날 정도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도 옛말이 돼가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적폐청산’이라는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또 나라를 위해 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범죄로 지목돼 공무원을 옥죄고 있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검찰 수사를 받는 모습을 본 이들이 예전과 다름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현 정부 들어 청와대의 정책 주문이 더욱 강력해지면서 정책 생산의 주도권까지 빼앗긴 상황이다.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 등 경제 분야 공무원들이 ‘이코노미조선’에 속내를 털어놓았다.

먼저 A씨는 “요즘 사무관들은 메모가 필수”라고 전했다. ‘상사의 지시를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인가’라고 물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정권 바뀌고 나서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당할 수 있으니 뭐든지 (증거로 남기기 위해) 적어놔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 정부의 ‘적폐청산’ 타깃 중 하나가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과거 정권에서 이뤄진 사업에 적극 협조했다는 이유에서다.

공무원 사회의 동요가 심해지자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진화에 나섰다. “정부 방침을 따랐을 뿐인 중하위직 공직자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정책상 오류만으로 (해당 공무원이) 사법처리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은 신뢰를 얻지 못한 듯하다. A씨는 “실무자까지 문책하니 책임감을 갖고 일을 처리하기 두렵다”고 말했다. B씨는 “법을 벗어난 일탈은 당연히 처벌받아야겠지만, 정책 목표에 따라 법의 범위 내에서 집행한 공무원은 무슨 죄냐”며 “이래서 ‘정권 말기에는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는 부서에 안 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국정 농단 지시를 이행한 공무원이 처벌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는 시각도 있었다. 이 같은 의견을 낸 C씨는 “(재발 방지를 위해) 불법적 지시가 내려올 때 이를 불이행할 수 있는 제도적, 문화적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며 “공무원은 영어로 ‘civil servant’, 즉 ‘공복(公僕)’이다. 국민을 바라보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공무원이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동력은 한국 경제를 ‘책임진다’는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이 자부심은 정책을 직접 기획하고 생산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최근 청와대로부터 내려오는 정책 주문이 점차 강해지면서 공무원들은 자괴감에 휩싸였다. D씨는 “힘들게 정책을 만들어도 어차피 청와대나 국회 등 정치인들이 다 뒤집기 때문에 날밤을 새워서 정책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며 “예전같이 정책을 주도한다는 느낌도 없다”고 말했다. 기재부 공무원들이 더 이상 ‘엘리트 코스’를 원하지 않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기재부에서는 고위직까지 올라가려면 통상 거쳐야 하는 곳이 있는데, 한 해의 경제정책 방향을 총괄하는 ‘경제정책국’이 대표적이다. E씨는 “경제정책국, 국제금융국 등 메인 부서에서 실력을 인정받아야 높이 올라갈 수 있고, 이 때문에 이런 부서로 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었다”면서 “요즘 사무관들 사이에서는 그런 경쟁이 덜한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업무 강도는 센 반면, 일하는 보람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E씨는 “업무 강도가 덜한 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자는 게 요즘 분위기”라고 말했다.

다만 최근 조직 내에서도 엘리트로 꼽히는 공무원들이 민간으로 이탈하는 현상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컸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다양했다. 고위 공직자의 경우 취업 제한 규정이 엄격해져 민간으로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의견이 있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개인적 만족감이 여전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F씨는 “민간으로 옮길 계획은 없다. 지금도 충분히 자부심을 느끼면서 일하고 있고, 솔직히 연봉 수준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정년 보장 등 다양한 혜택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G씨는 “공무원 연금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아는가”라며 “20년만 버티면 된다. 어차피 정권은 바뀐다”고 말했다.

이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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